# 282
282. 결전(1)
이미르는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을 부정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인간이 신을 아바타로 삼은 채 합신하다니.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자는 여태 누구도 없었다.
시도한 적도 없었고 시도할 일도 없었다.
자존심 강한 신들이 누가 그런 어이없는 짓을 벌이겠는가.
심지어 상대는 외신이다.
인간을 벌레나 먼지처럼 보는, 외우주의 신.
이미르는 누구보다 외신에 대해 잘 알았다.
그들은 절대 그런 걸 허락할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뭔가?
“나름 괜찮네. 특별히 겉으로 보면 변한 건 없어 보이지만 바뀐 거겠지?”
몸에 흐르는 신격도, 이드라의 힘도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더 이상 가공할 힘에 숨이 막히지도, 이드라의 능력이 낯설지도 않았다.
“합신한 김에 힘을 좀 썼도다. 타인과 하나가 된다는 건 제법 신기한 기분이로구나.”
그때, 뿅 하고 어깨 쪽에서 작은 이드라가 나타났다.
인간형 옵저버와 비슷한 크기다.
공중에 둥둥 떠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은 옵저버와 같았지만 옵저버는 아니었다.
이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한 세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극히 만족스런 얼굴을 한 이드라에게 말했다.
“……근데 왜 넌 밖으로 나와 있어?”
보통 린과 아스트라이아처럼 인격은 하나만 담당하고 심처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던가?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던 세한이었지만 지금 둥실둥실 떠있는 이드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 ‘나’는 두 명 분이다. 지금 그대의 육체를 구성한 건 1회차의 내 몸. 잠시 나와 하나가 되어 보관 중이던 그것이다.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
“합신……인데 그런 게 가능하다고? 제대로 된 거 맞아?”
“그래, 합신이니까 더욱 그렇지. 확실히 지금 그대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잊었느냐? 광기의 마왕에서 나는 그대로 위장하여 사라진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건 훨씬 간단하도다.”
세한과 이드라는 합신이 되어 한 몸이 되었다.
육체의 기반은 이드라의 것.
이드라는 그것을 1회차의 이드라의 육신을 기반으로 세한의 신체를 재구성했다.
그리고 2회차의 자신은 분리하여 이렇게 겉으로 나온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합신인 이상 2회차의 힘도 세한에게 들어차 있는 건 맞다.
약간 꼼수를 썼을 뿐.
“거기다 그대 혼자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보단 내가 보조해 주는 게 나을 거다. 그렇지?”
“그건 확실히 그렇겠네.”
거기다 나와 함께 이드라가 함께 힘을 운용할 수 있다면 보다 전략의 폭도 넓어진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함께…… 켁!”
내 볼을 손바닥으로 착착 두드리던 이드라가 갑자기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디로 갔나 싶었는데, 지수의 손에 잡혀있었다.
지수의 얼굴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손에 쥔 것 같았다.
“이거 떨어지게 못하나요.”
“……그야 하나가 됐으니 힘들지 않을까? 일이 끝나면 다시 떨어지긴 하겠지만.”
그럼 다시 이전처럼 외신의 힘은 절반밖에 사용할 수 없으리라.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만.
우선 내 육체를 1회차 이드라의 힘으로 재구성한 게 중요했다.
“저는 못해요?”
“모,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이 건방진 것!”
“전 이제 마왕이에요. 누가 건방진 거죠?”
“놔, 놔라 놔! 아프다고!”
손에 쥔 이드라를 걸레처럼 쥐어짜고 있는 지수를 보고 있으니 세한은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까지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 아니었나?’
상황이 반전되기는 했지만 지수는 애초에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에겐 그런 것보다 세한과 하나가 되어버린 이드라가 훨씬 중요했다.
“이, 기생충이……!”
“기…… 생충?!”
“멋대로 세한 오빠의 몸에 기생하다니!”
아무튼 저대로 두면 이드라가 정말 말라비틀어질 것 같았으므로 지수의 손을 저지했다.
그리고 이런 농담을 하고 있을 때도 아니었다.
세한은 지수의 손에서 이드라를 구한 뒤, 이쪽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던 이미르를 향해 작게 헛기침했다.
조금 민망해졌기 때문이다.
“흠흠. 아무튼…… 이미르. 이렇게 됐다.”
딱!
세한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만신창이로 찢겨졌던 옷이 원상태로 돌아온다.
육신도 신격도, 힘도, 마력도.
플레이어 시절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이미 사실상 외신이 아닌가?
“김세한……, 너는 지금도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나?
“그래. 난 인간이다.”
“하. 그런 힘을 손에 넣고도?”
이미르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세한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김세한은 인간이다.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단지 조금 강하고, 오래 살 뿐인 인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한. 난 인간이다. 영원히.”
“그래, 알겠다.”
이미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터무니없는 일을 벌여온 김세한이니 분명 예상치 못한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내몰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미르.”
세한은 그런 이미르를 향해 말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으니까.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 분명 아까와는 전혀 다를 걸?”
“…….”
이미 상황은 되돌릴 수 없어졌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
이곳에서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일을 그르칠 뿐이라는 걸 절절히 깨달았다.
“더 이상, 많은 걸 생각할 여유는 없겠어.”
이미르는 중얼거렸다.
우주의 미래, 시스템의 권위. 이제 그런 먼 일보다 가까운 것을 먼저 걱정할 때였다.
“나는 스스로 시스템이 지배하는 우주를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돈해 왔다.”
그로 인해 수없이 많은 별을 멸망시켰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난 돌이 튀어나오면 부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 모난 돌은 자신도 포함하고 있었다.
“나부터 시스템의 권위를 어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기나긴 시간을 들여, 열쇠를 사용해 자신의 권한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미르의 힘은 커졌다.
계속해서 억눌러 본신의 힘을 억제해야만 했다.
자신부터가 시스템을 거역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면, 퍼블리셔에 속해있는 다른 이들이 같은 행동을 하려 할 수도 있으니까.
그는 본보기가 되어야만 했고, 자신의 룰을 철저하게 지켰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군.”
이미르의 이마에 박힌 자색의 보석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아까 전, 본신의 힘을 이끌어내려 했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김세한, 하나 물으마. 네가 생각하는 신은 누구냐? 넌 단 하나만을 신이라고 말했었지.”
세한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그저 오래살고 조금 더 강할 뿐인 인간이라고 했다.
그에게 신이라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다.
“맞아, 내가 생각하는 신은 하나뿐이다.”
1회차의 김세한이 2회차로 온 목적은, 바로 그 신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니까.
“시스템.”
감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의 모든 걸 관할하며 유지시키는 존재.
멋대로 멸망할 별을 정하며, 우주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리는 초월적인 무언가.
그런 시스템이 세한이 생각하는 신이었다.
물론 나쁜 의미로의 신.
기원의 대상이 되지 못한 신이다.
“과연…….”
이미르는 그런 세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한 걸음을 앞으로 뻗었다.
“나와 같군.”
쿵.
스스로 신의 대리자가 되길 원했던 사내가 발을 내디뎠다.
대지가 크게 흔들리며, 이미르의 몸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자색의 빛과 함께 점차 그의 본체와 가깝게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끝을 내자, 김세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둘이 걷는 길은 전혀 달랐다.
신의 사자가 되고자 한 자와, 신을 죽이려는 자.
순식간에 수십 미터가 넘게 거대해진 이미르가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건 전쟁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의 등 뒤에 서있던 퍼블리셔의 군대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세한이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구의 플레이어와, 악마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오빠.”
파도가 밀려오듯 달려오는 군대를 보며 지수가 말했다.
세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신들을 부탁할게.”
“오빠는요?”
“그야 당연하잖아.”
아직도 커지고 있는 거대한 거인들의 왕.
그가 바로 세한의 상대였다.
그런 세한의 생각을 눈치챈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나머지는 맡겨주세요.”
지수의 왕관에서 검은 신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신격은 지수의 팔을 타고 흉성의 학살자에 깃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이미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면을 향해 뻗었다.
그리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수백의 악마들을 향해 말했다.
“모조리 쓸어버려요.”
“명을 받듭니다!!”
지수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거인들과 외신 휘하의 군대를 향해 덤벼들었다. 신과 동등한 힘을 지닌 거인과 그레이트 올드원들은 플레이어들이 상대하기 벅찬 상대였다.
“우리도 갑시다!!”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악마들의 모습에 뒤늦게 박성혁이 소리쳤다.
적은 신급 존재들만이 아니다. 이세계에서 넘어온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그들이 바로 자신들의 상대였다.
“별자리들과 다른 군대는 어쩌고요!”
박성형이 앞장서 지휘하며 달려가자 이아영이 뒤늦게 달려오며 외쳤다.
“그쪽은 담당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담당?”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하늘을 가르며 불꽃으로 휩싸인 전차가 날아갔다.
“뭐, 뭐야. 저게.”
아니 전차만이 아니다.
저마다 무장을 갖춘 무언가가 앞다투어 날아갔다.
바로, 서울로 떨어진 신들이었다.
“우하하하! 지구여, 이 지존패왕님이 돌아왔다!”
그들은 마치 이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신나게 웃으며 날아갔다.
수천 년 만에 겪는 ‘게임’이 아닌 진짜 전투였으니까.
그들에게 별자리나, 그들이 이끄는 군대 정도는 식후 디저트에 불과했다.
여태 고전하게 만든 상대를 학살하는 신들을 보며 이아영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근데 지존패왕이 누구에요?”
“제 신 말로는 아레스라고 하더군요.”
뭐, 잘 싸우니 됐다 싶었다.
***
“일이 재밌게 흘러가는구나, 이미르.”
그 광경을 현재 전투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높은 건물 위에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은 마치 낮잠이라도 잔 것 같은 나른한 얼굴이었다.
마치 이미르를 아이처럼 말하는 소년이었지만, 그의 정체를 안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모든 아우터갓의 정점.
아자토스.
그것이 바로 소년의 정체였다.
아자토스는 시작된 퍼블리셔와 지구의 전투를 보며 자신의 몸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드라도 참 별나군, 이런 불편한 몸이 뭐가 좋다고.”
인간이 지닌 감정, 인간이 지닌 감각.
그것을 단지 흉내했을 뿐인 아자토스였지만 확실히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하찮아서 이래도 괜찮은가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튼 이제 장난은 그만하도록 해라.”
여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아자토스는 말했다.
슬슬 지구의 전력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 싶어진 참이었다.
확실히 관객의 입장에서는 세한이 벌인 일은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었으니까.
악마와 신이 연합해서 퍼블리셔와 싸우는 걸 또 언제 볼 수 있겠는가.
“이대로 흘러가면 내가 뒤처리를 하게 될 수도 있겠어.”
아자토스는 건물에 걸터앉아 슬슬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세 외신들을 지켜봤다.
“보기 힘드니까, 되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싸우거라.”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모습은 본체의 모습을 축소시킨 것에 불과한 터라 영 재미가 없었다. 그건 매번 보는 모습이 아닌가.
아자토스는 보다 이곳의 ‘인간’들의 싸움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래, 그래…… 음?”
천천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세 외신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던 아자토스는 문득 묘한 시선이 느껴짐을 느꼈다.
‘저건…… 악마인가?’
아자토스 시선의 끝에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백색의 소녀가 서있었다.
이미 그녀의 시선은 다른 외신들에게 향해 있었지만, 분명 방금 전에 아자토스를 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쯧.”
아자토스는 싱겁다는 듯 혀를 찬 뒤, 신경을 껐다.
자신의 시선을 느낀 걸로 보아 좀 예민한 감각을 가진 아이다 싶었지만 그뿐이다.
아자토스에게 다른 존재란 고작 그 정도의 것이었으니까.
설령 같은 외신들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