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281. 반전의 시작(4)
“우와, 미쳤네. 진짜.”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영상을 지켜보던 신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는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게임을 플레이해 온 나름 고인물 신이었지만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신과 인간이 대립하는 걸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아주 오래전 신들은 인간과 같은 별에서 살았다.
지구만이 아닌, 다른 별도 대부분 비슷한다, 신들은 누구나 자신의 고향으로 둔 별과 지역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히 그 별에서 사는 경우는 드물었다.
페트로이아와 같은 이례적인 케이스가 아니라면 대다수의 신들은 결국 별을 떠나게 된다.
시스템이 신의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줄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신들은 전쟁을 벌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건을 벌이는 경우도 흔했지만 결과적으로 별을 떠나 초상계에 모이게 된다.
불멸자들이 살아가는 낙원.
퍼블리셔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확실히 초상계에서는 다툼이 일어날 일도 없었고, 퍼블리셔가 정한 구역에서 오순도순 살 수 있었다.
자극적이던 신화시대의 삶을 잊지 못하는 신들의 마음을 이용해 퍼블리셔가 ‘게임’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신들은 그것에 대해 특별히 반발하지 않았다.
초상계는 정말로 할 게 없었으니까.
신들의 유희라고는 신화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게임만이 유일한 유희거리였다.
조금이라도 신의 은총을 받길 바라는 인간들을 아바타로 삼거나 지켜보며 즐긴다.
몇 번이나, 몇십 번이나.
기나긴 세월 동안 신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 건 언제부터였던가.
‘퍼블리셔라는 존재를 당연히 받아들인 게 언제부터였지?’
지구가 퍼블리셔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부터 몇몇 신들은 그런 생각을 가졌다.
외신이 아닌 신들은 시스템에게 거역할 수 없기에 퍼블리셔와 굳이 대립하고자 하지 않았다.
설령 신이라고 하더라도 퍼블리셔를 이길 수는 없다.
어떤 별도, 신도 시스템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단정지으며 살았다.
외신이라는 규격 외의 존재가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며 설령 외신의 힘을 손에 넣더라도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전처럼 책임질 것도 없어서 좋네.’
인간과 함께 살아가던 나날이 그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강대한 존재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던 것이기에 달랐을 것이다.
아니, 분명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신이란 필요 없었다.
그러니 자신들을 환상으로 치부하며 잊고 문명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한때는 그런 인간들이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마음을 이해하게 된 건 우습게도 평화로운 초상계에 살아가게 되면서부터였다.
퍼블리셔는 신들에게 성심성의껏 베풀고 있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신들의 가슴속에 들어찬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게임을 즐겨도, 그건 결국 게임일 뿐이다.
현실이 되지 못했다.
‘뭔가 잘못됐어.’
그런 생각을 가진 신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퍼블리셔의 눈이 신경 쓰여 표현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퍼블리셔에게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뮤니티에선 그런 지구를 비웃고 곧 멸망할 거라 떠들었다.
‘멸망할 거라고?’
지금 실시간으로 지구의 상황을 촬영하는 영상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왕의 강림했으며, 수많은 악마들이 지구에 나타났다.
시스템이 마계에 부여한 족쇄가 끊어진 것이다.
‘저 이미르가…… 당황했다.’
금방 표정을 수습했지만, 악마들이 나타날 때 이미르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영상을 보던 신들의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로.
‘하지만 저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악마가 아무리 강해도 멸망을 막기엔 부족했다.
지금 이곳에서 영상을 지켜보는 자신을 비롯해 다른 신들도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악마의 힘이 강대하지만 저곳에는 외우주의 신들도 퍼블리셔를 돕고 있었으니까.
“……어, 뭐야.”
그런데 그때였다.
초상계를 덮고 있던 모든 방화벽이 사라진 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걸 막고 있던 경계선이 사라졌다.
“자, 잠깐만. 올림포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잖아?!”
경계선이 사라지기 무섭게 ‘그리스대장’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던 신이 하나의 게시글을 올렸다.
「난 지구로 간다 ㅂㅂ.」
그리스대장이 누구인지 짬이 좀 있는 신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올림포스 세력의 수장인 제우스.
그가 움직였다는 건 올림포스 신 전체가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스가르드도? 아니, 아스가르드만이 아니잖아? 지구의 신놈들 다 미쳤나?”
제우스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다른 지구의 신들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지구로 간다는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ㅋㅋㅋ 나도 간다 ㅋㅋㅋ 게임도 질렸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ㅅㄱ」
“잠깐, 너희는 지구와 관련도 없는 신이잖아…….”
지구의 신들이야 자신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별이니 갈 수 있다지만 전혀 연관없는 신들도 지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갈까?’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과연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오게 될 것인가.
퍼블리셔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지?
알 수 없다. 잘은 모르겠지만 초상계의 상황은 지금과 전혀 달라질 것이다.
이 상황을 모두 유도한 김세한의 목적이 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신들은 지쳐 있었다.
시스템과 만들어낸 이 가짜 유토피아에.
“가자.”
답은 금방 나왔다.
신은 영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수만 년 만에 자신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때 그 시절과 같이.
게임이 아닌 ‘현실’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
붉은 하늘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지구의 하늘을 뒤덮는 무수한 빛무리에 세상이 낯처럼 밝아졌다.
“……예쁘네요.”
다른 것에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는 지수조차 멍하니 그런 말을 중얼거릴 정도였다.
저 수없이 많은 빛줄기 하나하나가 신이다.
옵저버를 통해 지구의 상황을 지켜보던 신들.
그들은 무작위로 지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김경수 팀장이 알아서 잘 하겠지.’
지금쯤이면 지구에 강림하는 신들을 제각각 필요한 장소에 떨어트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사건의 중심지인 서울로 우수수 떨어지게 될 테니.
하지만 서울에는 그렇게 많은 신이 필요 없었다.
이미 이곳에는 마왕과 악마들이 있었으니까.
“야.”
나는 넋이 나간 얼굴로 비처럼 쏟아지는 빛줄기를 바라보는 이미르를 불렀다.
그다지 크게 부른 것도 아니었지만 이미르는 곧바로 나를 보았다.
“너무 신중하게 움직여서 이 꼴이 난 거야, 알고 있지?”
이미르는 지구를 확실하게 멸망시키려 했다.
본래라면 하나의 신도 강림할 수 없었을 지구에 ‘신격제한’을 해제했다.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거인, 별자리, 그리고 외신들이 아무리 강림해도 시스템이 터치하지 않도록.
그 탓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만에 이르는 신들이 지구에 강림하는 일이.
“너의 실수는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과대평가한 거다.”
인간과 같이 생각을 하며, 감정을 지닌 이들이 영원히 새장 속에 갇혀 있을 리 없다.
내가 한 건 그런 그들의 등을 아주 약간 떠민 것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터졌을 일을 앞당겼을 뿐이다.
“건방 떨지 마라. 김세한.”
이미르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분명 우리가 유리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 허나 우리에겐 외신이 있고 내가 있다.”
녀석의 이마에 박힌 자색의 보석이 빛나며 녀석의 전신으로 신격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거인왕 이미르의 전력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인간에 불과한 네놈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확실히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제부터 시작될 싸움에서 도망치기 급급할 것이다.
지수나 다른 악마들이 설령 나를 지켜주려고 한다고 해도 상대가 이미르인 이상 한계가 있을 테니까.
물론 그건 내가 평범한 인간일 때의 이야기다.
“너는 정말 스스로 발목을 잡은 게 너무 많아. 지금까지 저지른 일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나한테 한 짓도 그렇지.”
“너한테 한 짓……?”
이미르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마치 여기서 뭐가 더 있냐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전과 달리 자신감이 사라진 게 조금 우스웠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플레이어’라는 건 인간에게 있어 강해질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증표이며 족쇄다.”
손을 뻗어 천천히 가슴팍에 손바닥을 댔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건 그런 단순한 게 아니었다.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외신의 조각을 손에 넣었어. 그것을 흡수하여 외신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었지. 하지만 난 끝내 그 힘을 전부 사용할 수 없었다. 왜인지 아나?”
1회차의 이드라를 통해 얻은 전능의 편린.
나는 그것을 이용해 꿈의 마녀 이드라의 힘을 대부분 얻었다.
또한 그 힘을 이용해 스스로 외신이 될 가능성에 도달했다.
그러나 나는 외신이 되지 못했다.
이드라가 준 힘을 전부 흡수하지 못했고, 어떤 벽에 가로막힌 채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로서 얻은 힘이 많으면 많을수록 플레이어라는 족쇄를 벗기 힘들어져. 당연히 나는 이 족쇄를 벗을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네가 그걸 극복하게 만들어줬어.”
“그게 무슨 뜻이지?”
“나를 인간으로 돌려놨잖아.”
“……!!”
그제야 이미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녀석은 열쇠의 힘을 사용해 나를 플레이어로서 얻은 모든 걸 지워버렸다.
덕분에 나는 도끼를 사용해 ‘상태창’을 부수고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내게 남은 건 단 하나뿐.
나는 천천히 심장에 잠들어있던 1회차 이드라의 신격을 완전히 해방했다.
평소에 절반씩 야금야금 꺼내 쓰던 것과 달리 완전히.
“미, 친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몸이 터져버릴 거다!!”
열쇠를 가진 이미르는 내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채며 소리쳤다.
그런 이미르의 말에 내 손을 잡고 있던 지수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며 걱정스런 눈으로 보았다.
나는 그런 지수에게 괜찮다는 얼굴로 웃어보였다.
실제로 지금 나는 지극히 멀쩡했다.
“……무사하다고?”
심장에 가둬진 외신의 힘을 완벽히 해방했음에도 내게 이상이 보이질 않자, 이미르의 눈에 의문이 들어찼다. 지금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격은 대충봐도 범상치 않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미르의 말처럼 그대로 터져버렸을 것이다.
“너 아무래도 잊고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서 무리일 때의 이야기.
만약 이 가공할 신격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나는 아바타를 하나 가지고 있거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바로 몽상의 신전이 있는 곳에서 하얀 빛의 기둥이 치솟았다.
“그것도 아주 유능한 아바타를.”
파아아앗!!
하얀 빛은 단숨에 하늘을 꿰뚫으며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나는 그 빛 속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지금 내 심장 속에서 뻗어나간 힘이 ‘녀석’에게 전달되었을 테니까.
그 힘을 받은 이드라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겠지.
녀석은 내가 바라는 게 뭔지 언제나 한발 먼저 깨닫고는 했으니까.
“저건…….”
지수가 퍼블리셔가 만들어낸 붉은 하늘을 지워버리며 밝아진 세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지구 밖에서 태양빛을 가리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계속해서 지구에 접속해오는 신들의 빛 무리 덕에 우리는 태양을 가린 자가 누구인지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부드러워 보이는 손.
여린 손가락이 지구를 다정하게 감싸며 다정하게 보듬었다.
금색의 머리칼, 금색의 눈동자.
일찍이 한번 본 적이 있었던 모습이다.
현실이 아닌 몽상의 신전이 아직 던전이던 시절.
이드라는 저 모습으로 지상에 강림했다.
“꿈의 마녀, 이드라여.”
그때와 다른 점은.
“나의 대리자가 되겠나?”
역할이 정반대라는 것.
지구를 한손에 쥘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이드라가 싱긋 웃었다.
「기꺼이.」
신과 아바타는 워낙 격의 차이가 커서 잊을 때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신은 아바타에게 은총을 베풀고, 아바타는 그런 신에게 신앙과 제물을 바친다.
그러니 조건만 맞는다면 신과 아바타는 한 몸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이 린과 아스트리아가 했던 합신이다.
아바타의 육체에 신이 깃드는 것.
그리고, 나는 이드라의 신.
이드라가 지닌 외신의 육신을 기반으로 내 나약한 몸을 재구성시킨다.
나와 이드라의 힘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신체로.
콰아아아아!!
거대한 이드라의 손이 나를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세계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환상과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