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280. 반전의 시작(3)
‘좋아, 우선 중앙 통제실은 완전히 제압했어.’
요루엠의 모습으로 변한 민아는 거신병에게 잡혀 있는 다른 거인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해 왔던 계획이지만 실제로 성공하니 긴장이 풀린 탓이다.
하지만 아직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야.”
“뭐, 뭐냐.”
“어쭈, 반항해?”
민아가 눈을 새치름하게 뜨자 부름을 받은 거인이 애써 시선을 피했다.
대부분의 거인들이 현재 제압당해 있었지만 세 명의 거인만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세 명이 방화벽을 담당하는 녀석들이었지.’
지난 한 달 간 중앙통제실에 잠복하며 민아는 거인들의 역할을 파악했다.
그중 이번 작전에 필요한 이들은 저 세 명.
다른 차원으로 연결하는 게이트를 열고 닫고, 보안을 담당하는 이들이었다.
민아도 옆에서 조작법을 슬쩍슬쩍 보며 조작법을 익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방화벽을 열기 위해선 인증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인증이란 당연히 거인의 이마에 박혀 있는 보석을 통해 진행됐다.
“현재 지구의 상황을 스크린으로 띄워봐. 거부하면…… 알지?”
“히, 히익!”
거신병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인들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는 이들로선 당연히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거인들은 저마다 장치를 조작해 지구의 상황을 화면으로 띄웠다.
“어.”
지구의 상황이 화면으로 뜨자 민아는 당황했다.
화면에서는 믿었던 세한이 이미르에게 제압당하는 광경이 나오고 있었으니까.
‘서, 설마 망한 거 아냐?’
이 계획을 위해서는 세한이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됐다.
적어도 신들에게 ‘자극’을 줄 만한 장면이 반드시 연출되어야만 했다.
저렇게 처참히 패배해서야 신들에겐 어떤 자극도 주지 못한다.
“너, 너는 요루엠이 아니지?”
흔들리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민아에게 거인 하나가 떠듬떠듬 말했다.
“……왜?”
“요, 요루엠은 분명 욕심이 많은 놈이었지만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어. 이런 짓을 해서 돌아올 이득도 없는데 할 리가…… 없잖아…….”
말을 할수록 거신병의 검이 거인의 목에 가까워지자 녀석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렇지만 그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탐욕스럽지만 잔머리가 뛰어난 요루엠이 이런 리스크만 있는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이런 일을 해서 요루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란 전혀 없었다.
배신을 할 리도 없다. 요루엠은 누구보다 퍼블리셔의 힘을 과신하는 거인 중 하나였다.
“후, 그러네. 이제 이 모습을 할 필요도 없겠어.”
민아는 그렇게 말하며 여태 몸에 두르고 있던 ‘변신’ 스킬을 해제했다.
그러자 교복을 입은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단발머리에 귀여운 인간 여성은 거인들에게도 익숙한 자였다.
이미르가 몇 번이나 주의를 줬기 때문이다.
“너, 너는!!”
“어릿광대의 아바타가 아닌가!”
“네, 어릿광대의 아바타 이민아입니다요.”
민아는 주변을 향해 손을 팔락팔락 흔들며 눈을 찡그렸다.
어차피 거신병이 있는 한 저들은 자신을 건드릴 수 없었다.
“설마, 요루엠으로 변신했을 줄이야…….”
거인들은 하나같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요루엠은 신입이었기에 그다지 권한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적었다.
거기다 탐욕스런 성격이라 일이 터지면 가장 의심받기 좋은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그 탓에 도리어 이미르의 의심을 피해갔다.
철저하게 탐욕스런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거신병을 움직일 권한마저 손에 넣고, 이때까지 기다렸다.
“네년이 이런다고 지구가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보나? 봐라! 이미 네가 믿는 까마귀는 끝났다.”
제압되어 있는 거인들의 외침처럼 지구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럼 어떡하라고. 포기해?”
“그래! 당장 이 어리석은 짓을 그만둔다면 적어도 네 목숨은 살려주마. 다른 차원으로 인간 하나를 빼내는 건 일도 아니다!”
이때가 기회라는 것처럼 말하는 그들의 모습에 민아는 입가를 삐뚜름하게 비틀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랄.”
고운 민아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린애도 그런 말에는 안 속아.”
“그, 그럼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생각이냐! 이럴 시간에 도망치는 편이……!”
“왜 도망쳐? 우리가 이길 건데.”
“……?”
민아의 말에는 자신이 가득 차 있었다.
어디로 봐도 지기 싫어 내뱉는 치기어린 말은 아니었다.
“네 눈에는 저게 보이지 않는 거냐? 플레이어는 이미르 님의 힘을 거역할 수 없다. 플레이어라면…….”
“나도 눈이 있으니 알아.”
민아의 눈에는 세한의 모습이 비쳤다.
여태까지 이룬 모든 걸 빼앗기고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한 세한의 모습이.
비틀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태창을 확인하는 그의 얼굴이.
“나도 처음에는 뭐 저런 사람이 있나 했어. 치졸하고, 생각이 많은 것 같지만 의외로 실수도 많아.”
재능이 없지는 않지만 세한 정도 되는 사람은 많았다.
그는 어디로 봐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비겁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고, 유리하다 싶으면 잘난 척도 해. 하지만 결코 허언은 하지 않아.”
그는 말했다.
이번 싸움은 우리가 이길 거라고.
‘만약 진다면 게이트를 열어 모두 도망치게 하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수였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최악이 아니었다.
민아가 그걸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화면에 비친 세한은 웃고 있었으니까.
“너희는 인간이 우습겠지.”
그리고, 세한은 도끼를 쥐었다.
“약한 주제에 발버둥 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는 자신의 상태창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계속.
그런 세한의 모습에 거인들을 할 말을 잃었다.
“헛된 저항을 할 뿐이라 생각하며 비웃었을 거야.”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부여한 족쇄.
상태창이 부서지며 검은 머리칼의 여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붉은 하늘에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마계의 마족들이 지상에 강림했고, 그 모든 광경은 둥근 옵저버에 담겼다.
수많은 차원의 신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별에 불과한 지구가 시스템의 대리자인 퍼블리셔를 향해 칼을 빼어드는 장면을.
그래.
“너희들이 진 거야.”
바로 지금이다.
민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특별한 신호 따위는 없었지만, 민아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았다.
“열어.”
“……무, 뭘 열라는…….”
“모든 차원의 이동을 막는 방화벽을 해제해.”
거신병들의 칼이 거인들의 목에 닿았다.
“아니면 내가 너희를 죽이고 직접 해야겠니?”
“히, 히익!!”
서늘한 민아의 시선에 세 명의 거인들은 덜덜 떨며 장치를 조작했다.
이미 요루엠으로 위장하고 중앙 통제실까지 잠입한 여자다.
거인의 핵을 다루는 방법쯤은 분명 알고 있을 터.
여기서 반항해 봐야 민아의 말처럼 헛되이 목숨만 잃을 뿐이다.
‘바, 방화벽을 해제한 정도로 무슨 일이 생길 리가.’
그건 단지 다른 차원들이 오가는 걸 막는 장벽을 해제할 뿐이다.
세 거인은 고작 방화벽을 해제하는 것으로 큰 일이 생기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철컥.
장치가 조작되며 퍼블리셔가 여태 관리하던 모든 차원의 방화벽이 해제됐다.
모든 별, 그리고 초상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화세력을 통제하던 방화벽이 사라졌다.
“그거 알아? 너희는 너무 억눌렀어.”
조용히 중얼거리는 민아의 말에 거인들이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대체 뭘 억눌렀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한 오빠는 말했지. 신이라 불리지만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니고 조금 힘이 강할 뿐이라고.”
조금 더 정신력이 강하며, 오래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인간.
그런 이들이 수천 년간 게임이라는 가짜 유희를 몇 천 번이나 반복했다.
자유를 억압받으며, 시스템의 의지에 휘둘려왔다.
그런데 지금, 잠깐의 틈이 생겼다.
“그럼 어떻게 될지는 간단하잖아?”
지금 그들의 눈에는 ‘진짜’가 있었으니까.
***
“젠장, 벌써 2선까지 당했어!”
“이대로 끝인가…….”
그리스.
그다지 강한 길드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플레이어들의 질이 높은 나라였다.
하지만 역시 대형 길드나 핵심 플레이어가 없는 터라 방어진이 손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몇 시간 안에 그리스의 플레이어들은 모조리 죽을 게 분명했다.
“저런 괴물들에게, 젠장!!”
별자리니 거인이니.
신과 같은 존재들의 맹공에 평범한 플레이어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별들의 군세에 사방이 포위된 터라 그들의 눈에 절망의 기색이 어렸다.
“흥, 그러니 헛된 저항을 하여 시간을 낭비하게 하다니.”
황도 12궁 중 하나.
거해궁의 지배자 ‘알타르프’는 그런 인간들을 보며 비웃었다.
두툼한 그의 갑주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공격받았음에도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
“알타르프 님이 이곳에 오실 필요도 없던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그리스의 인간들은 죽이는 건 제법 재밌으니 됐다.”
알타르프는 그리스인들에게 반감이 컸다.
헤라클레스라는 놈을 죽이려다 발에 밟혀 비명횡사했던 기억이 때문이다.
‘올림포스가 관리하던 지역의 인간들을 죽이는 건 꽤 즐겁군.’
자신들의 신도가 살았던 장소를 멸망시키면 그 오만방자한 신들이 어떤 방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컸다.
“좋아, 다시 일을 해보실…….”
“그, 근데 알타르프 님.”
“뭐야? 지금 한창 흥이 났는데.”
한 거인이 거대한 집개를 흔드는 알타르프를 불렀다.
갑작스런 부름에 알타르프는 짜증이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그 거인은 알타르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저기, 하늘이 좀 이상하지 않슴까?”
“하늘은 원래 이상했잖아. 퍼블리셔가 게이트를 열었으……니?”
붉은 하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먹구름이 그리스의 하늘에 잔뜩 끼어 빛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쿠릉, 쿠르릉!!
당장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 같은 구름에선 시끄러운 뇌명이 몰아쳤다.
“에, 에헤이. 설마.”
저 구름이 뭔지 알고 있었다.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닌 구름.
알타르프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그 구름을 보며 빌었다.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게 아니길 바라며.
콰콰콰쾅!!
“우와와아아악!!”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다.
알타르프의 옆에 서 있던 거인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결코 자연적인 번개에서 발생할 수 없는 위력이었기 때문이다.
“아, 알타르프 님 괜찮으심까…… 헉?!”
이미 알타르프는 거인의 말에 대답할 수 없는 상태였다.
플레이어들이 흠집도 내지 못했던 두터운 게의 등딱지에 뇌전이 흘러내리는 금색의 창이 박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창을 쥔, 황금색 머리칼의 남자의 몸에선 감히 숨을 내쉬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난 신격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존재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단 말인가.
“다, 당신은 누구신, 지?”
저건 플레이어가 아니다.
분명 신이다. 왜 신이 이곳에 있는 건지 거인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나 말이냐?”
전신에 번쩍이는 뇌광을 휘감은 남자는 알타르프를 단번에 구워버린 뇌창을 뽑으며 말했다.
“그리스대장이다.”
***
“저 미친놈 빠르게도 갔네!”
“그야 번개지 않습니까.”
“슬레이프니르가 빠졌어. 번개도 못 따라잡고!”
제우스가 다른 올림포스의 신들과 함께 그리스에 강림했을 무렵, 이어서 따라온 아스가르드의 신들도 올림포스에게 질 수 없다는 것처럼 북유럽 대지에 강림했다.
‘한쪽눈미아’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던 오딘의 경우, 제우스보다 뒤쳐진 것에 분노했는지 그의 창 궁그닐에 시퍼런 신격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흥분하시긴.’
그 광경을 본 법의 신, 티르는 피식 웃었다.
저토록 흥분한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신화시대가 끝나, 퍼블리셔가 관리하는 초상계에 머물게 된 이후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좀 늦었나 보네?”
“……음?”
티르는 자신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찰랑이는 연보라색 머리칼을 넘기는 여성이 하나 서 있었다.
성별은 기억과 달랐지만, 저 여자가 누구인지 티르가 모를 리 없었다.
“로키 네년은 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내 맘이지 내 맘.”
로키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입을 가리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로키의 모습이 티르의 입장에선 참으로 가증스러웠지만 이제 와 뭐라 말하기엔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다.
“……그래서 이곳에 뭐 하러 온 거냐. 넌 인간을 딱히 돕는 성격도 아닐 텐데.”
“아니 도우러왔는데? 지금 내 아바타가 이런 거창한 일을 벌여줬는데 신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뭐, 뭐라고?”
로키의 입에서 남을 돕는다는 말이 나오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법의 신이라 불리는 티르가 말을 더듬었다.
“뭣보다, 이런 대형사건에 끼지 않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 못해.”
“……그래, 차라리 그게 네 성격에 맞겠군.”
의욕적으로 앞으로 나서는 로키의 뒷모습을 보던 티르는 거인왕을 떠올렸다.
‘넌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신중했지만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가 어떤지 티르는 알고 있었다.
신화시대의 종결과 같이.
퍼블리셔가 구축한 유토피아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