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279. 반전의 시작(2)
하늘에서 일어난 이변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바로 옵저버들이었다.
붉은 하늘 위에 맞닿아 있던 그들은 퍼블리셔가 만든 거대한 균열을 덮으며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검은 균열에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영상에서는 갑작스런 사태에 댓글이 폭주하고 있었다.
[저 게이트 뭐임???]
[뭔데 퍼블리셔 게이트를 덮어버리냐.]
[저게 가능함?]
퍼블리셔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었던 건 이미르가 열쇠의 반쪽을 다루며 시스템에게 인정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미르의 힘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현재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미르가 연 게이트를 덮으며 전혀 새로운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이미르가 연 것보다 훨씬 거대한 게이트가.
[혹시 어디로 연결된 건지 암?]
[아니 게이트를 애초에 누가 연 거야.]
[갑자기 튀어나온 저 인간인 듯?]
[인간 맞음?]
현재 지구의 상황을 지켜보던 신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다 중요한 건 그런 기상천외한 일을 벌인 존재였다.
갑자기 세한의 상태창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명의 여성.
[아, 알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네. 나만 그런가?]
[나도 그럼. 뭐지?]
저런 힘을 지닌 존재를 신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검은 머리칼을 지닌 붉은 눈동자의 여성.
거기에 머리 위에는 신들도 처음 보는 검은 왕관이 떠 있었다.
대체 저 여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본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마왕이라는데?]
[진짜??]
마계의 마왕이 사라진 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던가.
아주 오래 전 마계에 ‘열쇠’가 부여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마왕이 탄생된 적이 없었다.
사실상 마계 서열 1위인 오만의 악마가 그 역할을 대신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마왕이라니.
[에이, 그게 말이 되나.]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거인왕이 저런 얼굴을 할 리 없잖아.]
[…….]
옵저버에 비치는 이미르의 얼굴은 진심으로 당혹스런 모습이었다.
그 거인왕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이거, 정말로 일 나는 거 아냐?]
이미 이건 ‘게임’이라는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마계로 연결된 게이트에서 검은 빛줄기가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처음에는 세 개.
그 뒤를 이어 수백에 이르는 빛 무리가 지상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거인, 별자리. 그리고 신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학살하던 외신들조차 갑작스러운 이변에 행동을 멈췄다.
그들의 눈에는 보였다.
검은 날개를 펼치며 지상에 내려서는 타천사.
거인과도 같이 거대한, 근육질의 육체를 지닌 괴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꽃과도 같은 소녀.
이들이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마계의 정점이라 불리는 7대 악마 중에서도 최강의 지위에 있는 세 악마.
오만, 폭식, 그리고 나태.
그 세 악마가 갑자기 지구에 강림한 것이다.
그것도 모든 힘을 보유한 상태로.
‘악마는 다른 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텐데?’
그것이 이 상황을 지켜본 신들이 가진 공통적인 의문이었다.
악마, 그 중에서도 7대 악마들은 외신과 비슷한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저 세 명의 악마의 경우 외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지닌 괴물들.
그런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 살아가는 마계였지만 한 가지 단점이 존재했다.
바로 마계 밖에서는 본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우주의 법칙을 조율하려는 시스템이 열쇠를 이용해 마계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든 것이다.
외신과 같이 언제는 틀을 깰 수 있는 악마들은 우주의 조율에 크나큰 방해물이었으니까.
특히 강대한 악마들일수록 그 패널티는 강했으며, 악마들은 계약자를 통하지 않는 한 다른 별에서 포인트를 얻거나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지금 지상에 강림한 악마들은 본신의 힘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지상에 발을 내디딘 세 악마의 모습이 옵저버들을 통해 수많은 차원으로 퍼져나갔다.
“정말로, 마왕이라고?”
그 모든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이미르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스스로를 마왕이라 자칭한 여자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지금, 마계의 지배자라 알려졌던 세 악마가 무릎을 꿇었다.
바로, 검은 왕관을 쓴 여성을 향해서.
“우리의 위대한 왕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세 악마의 말과 함께, 이어 지상에 떨어진 수백의 악마 또한 무릎을 꿇었다.
기나긴 시간이 지나 탄생한 자신들의 왕을 향한 경애와 존경을 바쳤다.
수백의 악마가 동시에 무릎을 꿇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루시퍼.”
그런 그들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다른 별에서 힘을 발휘하는데 문제는 없나요?”
“마왕이 계신 곳이 바로 마계입니다.”
즉,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맙소사!’
그 광경을 지켜보는 신들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다.’
‘진짜로 마왕이 탄생한 거야.’
상황이 이렇게 되니 퍼블리셔의 군세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성이 마왕이라면 악마들은 모두 그녀의 휘하에 있는 존재들이다.
즉, 이제 퍼블리셔는 저 악마들과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신격을 지닌 존재들이 수백. 걔 중에는 상급 이상의 악마도 수두룩했다.
단일 세력으로 이 우주에서 최강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을 적으로 돌린 것이다.
“저 잘했나요?”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은 악마들을 보며 지수는 세한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덕분에 세한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왕이 되었음에도 지수의 눈에는 세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래.”
“오빠라면 분명 저를 기억하리라 생각했어요.”
“그, 그렇지. 당연히 기억해야지 지수를 어떻게 잊겠냐.”
“네, 전 믿고 있었어요!”
무한한 신뢰가 담긴 지수의 말에 세한은 찔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완전히 잊었던 건 사라지지 않는 사실인데다 솔직히 아슬아슬했다.
막다른 길에 몰려서야 겨우 기억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때였다.
“당신, 들은. 아군, 인가?”
방금 전까지 이미르를 상대하던 엘리제가 세한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이성이 돌아온 모습이다.
갑작스런 사태에 상황을 지켜보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세한과 지수의 곁으로 온 것 같았다.
마마잭을 죽인 것이 세한인 것을 알 텐데도 어째서인지 엘리제는 세한에게 적의를 비치지 않았다.
그러니 세한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우린 아군이다. 엘리제.”
“알, 겠다.”
그녀는 그렇게 답하며 몸을 둥글게 말고 천천히 체력을 회복했다.
이러나저러나 그녀가 이미르를 막고 있었던 덕에 지수를 구할 수 있었다.
세한은 그런 엘리제에게 시선을 뗀 뒤, 이미르를 직시했다.
딱딱하게 굳은 이미르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제는 웃지 않는 건가, 이미르?”
“……건방진 놈.”
아직 세한의 힘은 회복되지 않았다.
낮춰진 능력치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게만 느껴졌다.
자신을 지키듯 서 있는 지수 때문인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세한에게 이미르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괜찮다. 아무리 악마라도 별을 멸망시키는 걸 막을 수는 없어.’
이미르는 자신이 불러온 외신들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아직 저들도 권속들을 모두 불러들인 건 아니었다.
아우터 갓과 그레이트 올드원들이 악마들을 상대하는 사이 자신은 지구를 멸망시키면 된다.
“다시 침착해진 걸보면, 악마는 외신으로 막으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네.”
“……흥, 그렇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정도 변수는 생각해 뒀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외신과 계약을 하면서까지 지구로 불러온 것이다.
마왕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는 문제없었다.
“근데 그거 알아? 이제 시작이야.”
“……?”
비릿한 세한의 미소에 이미르가 눈을 찡그렸다.
여기서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악마 이상의 것이 존재하나? 그럴 리 없었다.
그러나 세한의 표정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사실 승산은 반반이었지. 내가 기억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 분명 그걸로 승부가 나리라 생각했다.”
물론, 악마의 등장까지 생각해 둔 건 아니었다.
이건 세한의 생각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면 별의 플레이어들을 모두 다른 장소로 이주시킬 생각이었다. 우선 살고 봐야지 않겠어?”
그랬다면 이 세계는 ‘흩어진 세계’ 엔딩을 맞이했을 것이다.
시스템이 정했던 그대로.
“하지만 난 기억을 찾았지.”
상황은 달라졌다.
악마의 등장으로 전황의 불리함은 해소가 되었고 적과 아군의 사기는 반대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커뮤니티에 생중계 중이라는 거다.”
“……설마.”
그쯤 말하자 이미르는 세한이 의도한 게 뭔지 눈치챘다.
그는 머리가 좋았으니까.
‘설마,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세한이 무얼 노리는 지는 깨달았다.
하지만 녀석의 계획대로 돌아가려면 시스템의 차단을 풀어야만 했다.
그것이 현재 가능한 건 바로 퍼블리셔의 중앙통제실뿐이었다.
“너.”
세한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난 후였다.
“요루엠이라는 거인을 아냐?”
“……!!”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 거신병을 움직일 권한을 준 탐욕스런 거인이었으니까.
그 거인의 이름을 세한이 지금 언급한 이유는 명백했다.
“설마, 그놈이……!!”
“딩동댕~!”
세한은 짝짝, 박수를 쳤다.
처음 이미르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넌 좆됐어, 새끼야.”
***
퍼블리셔의 중앙 통제실.
수많은 별과 차원을 연결하는 방화벽을 관리하는 역할을 맞는 퍼블리셔의 중추.
시스템으로 부여받은 권한의 응집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기나긴 시간동안 일해 온 거인들은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요, 요루엠! 너 지금 뭐하는 게냐!”
“당장 우리를 풀어라!”
“예예, 미안합니다. 근데 간자일 가능성도 있어요.”
이미르가 한창 지구를 침략하고 있을 무렵, 요루엠은 갑작스럽게 거신병을 이끌며 나타났다.
지구가 이미르에게 유린되는 광경을 통쾌하게 바라보고 있던 거인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속절없이 제압당했다.
워낙 갑작스런 사태에 제대로 반항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었다면 엘리트인 중앙 통제실의 거인들이 이렇게 쉽게 제압당할 리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수천 년간 몸 바쳐 일했다! 어떻게 내가 간자일 수 있단 말이냐!! 알다시피 변신 능력을 지닌 계집은 이제 겨우 20년 안팎으로 산 인간이다!!”
“네, 변명은 나중에 하시고요. 시끄러우니 끌어내야겠네.”
요루엠이 손짓하자 거신병들이 나이든 거인을 포박해 중앙 통제실 밖으로 내던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거인들은 당연히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네 이놈, 요루엠!! 네가 이런 짓을 벌이고도 이미르님에게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이 사실이 밝혀지면 넌 죽은 목숨이다!!”
“잡힌 주제에 말은 많네.”
“내가, 내가 방심만 안했어도!!”
한 젊은 거인이 이를 부득부들 갈며 요루엠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목에 겨눠진 거신병의 칼에 잠잠해졌다.
“법은 멀고 폭력은 가까운 법.”
요루엠은 콧노래를 부르며 제압당한 거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딱 봐도 특별히 반항할 구석은 없어보였다.
‘거신병 만만세네, 정말.’
이지를 상실한 채 오직 명령만 듣는 정예병은 요루엠의 입에서 절로 휘파람을 불게 만들었다.
“분, 분명 거신병은 이렇게 다룰 수 있는 이들이 아닌데…….”
“아, 내가 좀 손보긴 했지. 목 뒤에 있는 마법진을 말이야.”
“그걸…… 손봤다고?”
“내가 좀 일가견이 있어서.”
거인들은 요루엠의 말투가 달라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지가 상실된 거신병들은 목 뒤에 세긴 마법진을 통해 통제를 받았다.
그 마법진은 지금과 같은 사태를 대비해 안전장치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미르는 요루엠에게 흔쾌히 거신병을 움직일 권한을 준 것이었다.
본래라면 요루엠에게 적의를 보이거나, 퍼블리셔에 적의를 보인 이들에게만 칼을 빼들 수 있는 거신병이었지만 지금의 거신병은 오직 요루엠의 말을 듣는 개에 불과했다.
‘복잡하긴 했지. 진짜 며칠 간 꼬박 수선했으니.’
하지만 요루엠, 아니 요루엠의 모습으로 변한 민아가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어릿광대의 아바타였다.
이런 기상천외한 마법진의 일인자에게 배운 민아는 이미 이런 마법진이나 연금술에 대해서 어느 정도 통달한 상태였다.
그러니 완전히 마법진을 지우거나 바꿀 수는 없어도 살짝 ‘개조’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퍼블리셔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아도 공격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