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278. 반전의 시작(1)
이미르가 열쇠의 힘을 이용하여 세한의 능력치를 바꿨을 때,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아픈 소녀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는가?
특성이라고 해도 시스템으로부터 얻은 것이라면 사라져야 정상이다.
그 예로 세한의 다른 특성인 ‘2회차 플레이어’는 사라져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특성은 오직 ‘아픈 소녀의 사랑’ 단 하나.
기본적으로 특성은 시스템이 부여하는 것이니 사라지지 않는 건 이상했다.
그렇다면 DLC를 통해 특성을 구매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세한은 이미르와의 싸움에 앞서 몇 번이나 DLC 상점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광기의 마왕이 최후의 DLC라고 준 도끼를 제외하면 특별한 건 없었다.
DLC를 통해 얻은 특성도 아니라면 답은 단 하나뿐.
‘이 특성 자체가 열쇠의 힘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거야.’
세한은 손에 쥔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숨은 목까지 차올랐고 팔을 부들부들 떨렸다.
잠깐 방심하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미르에게 받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온 힘을 쥐어짜 도끼를 휘두른 탓이다.
‘열쇠는 시스템에게서 통제되지 않은 물건.’
오히려 시스템을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열쇠다.
그중 반쪽은 이미르가 가졌으며, 남은 반쪽은 린이 지니고 있다.
당연히 둘 다 이 특성과 관련이 있을 리 없으니 단순히 생각해도 열쇠가 하나 더 필요하다.
또 하나의 열쇠.
마침 그거라면 하나 생각나는 게 있었다.
마계에 존재하는 온전한 하나의 열쇠는 마왕이 된 자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한다.
‘광기의 마왕’에서는 그것을 세한이 지니고 있었다.
‘마계의 열쇠는 현재 행방이 묘연해.’
열쇠에 대해 떠올리려고 하면 두통이 밀려왔다.
그 이야기는 즉, 열쇠가 ‘잊혀진 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
거기까지 알면 남은 건 손에 쥔 물건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콰콰콰쾅!!
폭음이 울리며 세한의 근처에 뿌연 흙먼지가 흩날렸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대지에 세한은 겨우겨우 자세를 잡으며 이미르를 보았다.
이미르는 현재 갑자기 나타난 제3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바로 엘리제.
마마잭이 자신을 희생하고 린의 유전자와 엘리제의 혼을 결합시켜 탄생시킨 괴물.
아직 완전히 자아를 찾지는 못했지만 엘리제는 이미르를 적이라 완벽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체 너는 누구인데 나를 막아서는 거냐!! 당장 비켜라!”
“캬아아아아!!”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엘리제는 칼날과도 같이 긴 손톱으로 이미를 향해 베어갔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공격만으론 이미르에게 닿지 않았고, 연달아 이미르의 마법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뭐 이런 성질을 가진 괴물이……!!”
이미르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확실히 엘리제의 공격은 이미르에게 닿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미르의 공격도 엘리제에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르의 특기는 마법.
엘리제는 자신의 몸을 언제나 최적의 상태로 유지시켰고, 이미르의 마법이 가해질 때마다 최적의 육체로 몸을 변이시켜 완벽하게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말하자면 상대에게 공격을 가할 수 없지만, 상대의 마법에도 완벽히 면역된 상태라는 것이다.
‘열쇠의 힘도 통하지 않다니, 대체 이런 게 왜 지구에 있는 거냐.’
이런 것이 지구에 있다는 보고는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강하긴 했지만 외신급도 아닌 괴물이 열쇠의 영향을 받지 않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르는 알지 못했지만 엘리제에게 열쇠의 힘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엘리제는 DLC 아이템인 팻 부화기를 통해서 탄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스템이 아닌 DLC를 통해 탄생한 이레귤러이니 열쇠 자체가 인식을 하지 못했다.
‘이 짐승은 게임이 탈취된 이후 탄생한 괴물이 아니다. 분명 우리가 게임을 운영할 때 탄생한 괴물이야.’
문득 이미르는 하나의 거인이 떠올랐다.
바로 이전에 한국 서버를 운영했던 아카터스.
녀석이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지구를 이드라에게 빼앗긴 이후, 이미르는 계속 지구의 상황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런 게 있었으면 모를 리 없다.
분명 아카터스가 한국 서버를 운영할 당시 탄생한 괴물이다.
즉, 이미르가 엘리제의 존재를 모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카터스가 자신에게 돌아올 징벌이 무서워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카터스, 이 새끼!! 똑바로 일하지 않고 뭘 한 거냐!!’
만약 눈앞에 있었다면 아카터스의 목을 수십 번은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터스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이니 이미르의 분노는 갈피를 잃었다.
“멈춰라, 김세한!”
이미르는 몇 번이나 세한을 향해 마법을 사용하고 각종 공격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엘리제가 방해하거나 몸으로 공격을 받아낸 탓에 조금도 세한에게 닿지 못했다.
심지어 엘리제의 신체능력은 상당했다.
애초에 무투파가 아닌 이미르로선 엘리제를 떨쳐내기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
이미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답은 하나였다.
모든 힘을 개방하고 별과 함께 날려 버린다.
허용 받은 권한을 넘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니 자신에게도 타격이 있겠지만 지금 다른 수는 없었다.
“스스로 종말을 자초하다니, 어리석은 놈!!”
이미르의 본체는 결코 이런 작은 인간의 몸이 아니다.
단순한 거인이 빌딩만한 크기라면 거인왕이라 불리는 이미르의 본체는 별과도 같다.
단지 그 정도 크기로 변하려면 막대한 신격과 시간이 필요했으니 적당히 본체의 힘을 빌려올 생각이었다.
으지직.
“……어?”
그 순간.
이미르의 귀에 또렷한 파열음이 들렸다.
수많은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고 외신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지는 전장에서 이미르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결코 부서져서는 안 되는 것이 부서지는 소리를.
***
나는 도끼를 내리쳤다.
조금씩 금이 가 부서지기 시작하는 상태창을 향해 몇 번이고 내리쳤다.
부서진 틈에서는 새까만 어둠만이 보였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분명 이 안에 자신이 찾는 게 있었다.
‘내가 잊어버린, 누군가가.’
대학 컴퓨터실에서 보았던 게임 세이브 파일과 메모장을 통해 잊혀진 자가 여성임을 깨달았다. 또한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던 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드라가 신경을 쓸 정도로.’
그런 아주 특별한 관계.
나는 그런 소중한 이를 잊었다.
멍청하고, 어리석게도.
무책임하게.
그 죄책감을 연료로 나는 도끼를 내리찍었다.
한 번.
[또 밤 세서 게임하고 피곤한 거죠? 그러다가 이번 학기 학점도 위험할 거예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짓궂지만 걱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다.
그리고 두 번.
[혹시 특성이라 적혀있는 부분에 따로 뭐라고 적혀 있지 않아?]
[네, 적혀 있긴…… 해요.]
[혹시 뭐라 적혀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
[으음, 아뇨…….]
이번엔 대화였다. 나와 그녀가 나눴던 대화인건가.
나는 도끼를 계속해서 휘둘렀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때마다 수많은 대화가 귓가에 울리며 나를 스쳐지나갔다.
귀로, 머리로, 가슴으로.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부모님을 만날 생각이었거든요.]
[제가 할게요. 이번 일은 제가 오빠보다 맞을 거 같거든요]
[으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그걸로 좋아요.]
목소리가 들려올수록 ‘그녀’가 누구인지 조금씩 떠올랐다.
집착이 심하고 질투가 많은.
하지만 내게 미움 받기 싫어 순종적이었던 아이.
자신을 숨기고 숨겨, 인간을 연기했던 여성.
[미안, 해요. 오빠. 이제 저는 오빠를 지켜드리지 못할 거 같아요…….]
수십 번이 넘었을 때 한계에 도달한 도끼의 날이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분명, 분명 이 게임도 클리어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믿어요.]
도끼의 날이 부서져 나가며 반절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남은 부분으로 후려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요.]
남은 날도 대부분이 부서졌다.
이제 남은 건 단 한번이라는 걸 깨달았다.
[절대, 절대로……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손에 쥔 도끼가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내 손에 남은 건 부서진 도끼의 잔해가 박혀 찢어진 손아귀뿐이었다.
하지만 상태창은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크게 균열이 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더 이상 내게 남은 도구는 없었다.
하지만.
“병신 새끼.”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양손을 뻗어 상태창에 부서진 균열을 붙잡는다.
그리곤 각각 양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도끼는 사라졌지만 이 손에는 부서진 도끼의 파편이 박혀있었다.
이렇게 균열 속으로 손가락이 들어갔음에도 무사하다는 게 그 증거다.
“김세한, 병신. 이 병신 새끼야.”
파편이 상처를 헤집었지만 나는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서 멈췄다간 영영 그 아이를 잃어버릴 테니까.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는데.”
상태창을 부수며 스쳐지나간 기억.
특성 아픈 소녀의 사랑을 통해서 전해진 그녀의 기억.
나는 여태 그걸 잊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냐고.”
그토록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런 그녀의 부탁마저 나는 전부 잊었다.
우두둑!
손가락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힘으로 상태창을 찢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불가능하다.
누구나 그렇게 말할 것이다.
으지직.
하지만 조금씩.
으지지직!!
조금씩 손에 힘을 줄수록 균열이 점차 커졌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상태창이 점차 부스러지기 시작하며 좌우로 찢겨지기 시작했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양팔을 좌우로 잡아당겼다.
“으아아아아!!”
콰지지직!!!
빙판의 얼음이 부서지는 것 같은 파열음이 울리며 상태창이 부서졌다.
그 틈은 겨우 사람하나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정도였지만 난 그걸로 충분했다.
“큭!!”
그 틈을 향해 내 오른팔을 집어넣었다.
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잡기 위해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수.”
처음에는 어물거림.
뿌연 기억처럼 말이 제대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지……수.”
퇴색된 기억 속에서 하나의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칼을 지닌 여성이.
마지막에 짓던 서글픈 미소를 짓던 한 소녀가.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한지수……!!”
꽉.
무언가가 내 손을 잡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확인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잡아당겼다.
콰창!!
유리창이 깨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리며 무수한 빛의 조각이 흩어졌다.
나는 이걸 한번 본적이 있었다.
광기의 마왕이던 내가 이드라를 기억하고 이 세계로 불러들였을 때였다.
부서지는 별빛처럼 무수한 빛의 조각이 사방으로 퍼졌다.
법칙과 이치를 넘어, 세계의 의지를 부수는.
그런 비현실적인 광경.
그래, 그때와 같았다.
그때와 다른 점은 오직 단 하나.
“세한 오빠!!”
부서지는 빛 속에서 내 이름을 부른 게 이드라가 아닌 지수였다는 점뿐이다.
기억과 같은 검은 머리칼과 하얀 피부.
지수는 내 손을 잡은 채 빛의 틈에서 튀어나왔다.
“이제──.”
지수는 잘 웃지 않는다.
그녀에게 감정이란 익숙지 않은 것이며,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낸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지수가 진심으로 웃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내 앞에서 조차.
그러나 지금.
“──제가 지켜드릴게요!!”
지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만개하는 꽃처럼, 그건 내가 처음 보는 지수의 미소였다.
마치 겨우 따라잡았다는 듯.
목적지에 도달한 달리기 선수와 같이 상쾌한 표정으로.
탁.
지수는 천천히 바닥에 내려서며 내 피투성이 손을 꽉 잡은 그대로 남은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지수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하며 검은색 신격이 퍼져나갔다.
키이이잉!!
검은 신격은 지수의 머리 위에 뭉치며 검은 왕관의 형태를 취했다.
이미르가 가진 것보다, 린이 지닌 것보다 커다란 왕관.
완벽한 하나의 열쇠.
마계의 지배자만이 지닐 수 있다는 징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단순히 플레이어만이 아니었다.
별자리나 거인들도 갑작스런 이상현상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는 하늘을 보며 아연하게 중얼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퍼블리셔가 연 구멍이…… 사라졌어?”
방금 전까지 병력이 쏟아져 나오던 다른 별로 연결되는 게이트가 사라졌다.
더불어 퍼블리셔와 연결되어 있던 거대한 붉은 구멍도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야.’
더욱 거대한 구멍으로 집어삼켰을 뿐이다.
지수는 지금 문을 열었다.
“어떻게 마계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거냐. 아니, 그보다 지금 그걸로 무슨 짓을……!!”
엘리제를 제압하며 이미르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답해주고 싶었지만 온 힘을 쓴 탓에 제대로 혀가 굴러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수와 다시 연결되며 천살성이 제 기능을 시작하여 조금씩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고로 이미르의 말에 답한 건 멀쩡한 지수였다.
“마계.”
“……뭐?”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어요.”
지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네가, 누군데.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이미르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여기까지 보였다.
마치 현실을 부정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녀석이 모를 리가 없다. 마계의 열쇠를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니까.
그런 이미르의 얼굴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지수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