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277. 종말의 유토피아(4)
모든 능력치가 깎인 세한을 옵저버를 통해 보며 이드라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세한을 도우러 가고 싶었다.
‘좋지 않다, 좋지 않아.’
유일한 희망이던 세한마저 이미르에게 처참히 박살 나니 다른 플레이어들의 안색도 덩달아 나빠졌다. 맞서 싸우던 이들도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을 정도다.
그나마 이아영이 브리싱가멘을 이용해 그런 플레이어들을 제어하고 있었지만 그조차 한계가 있을 테지.
‘응?’
그때였다.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드라의 눈에 세한의 옅은 미소가 보였다.
모든 스킬을 제거당하고 평범한 인간과 같아진 능력치를 보며 웃은 것이다.
‘왜?’
띠리링~!
이드라가 의문을 표하는 순간, 그녀의 쪽지함에서 작은 알림이 울렸다.
덕분에 그녀는 세한을 지켜보던 것도 미루며 재빨리 쪽지를 확인했다. 지금 이드라가 몽상의 신전에 대기한 건 이 쪽지를 위해서였으니까.
쪽지의 내용은 단 한 줄의 내용만이 적혀 있었다.
[엘리제를 해방해 주세요.]
“엘리제를?”
설마 싶었지만 정말로 민수아의 목적은 엘리제였던 모양이다.
마마잭과 하나가 된 엘리제는 당시 세한으로선 죽일 방법이 없었기에 몽상의 신전에 가둬둔 상태였다.
‘한번 해방하게 되면 다시 이곳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지구의 적이었던 엘리제가 아군이 되어줄까?
아니, 당시 그녀는 이성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도리어 지금 상황에 휘발류를 뿌리는 격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
고민은 짧았다.
이드라는 천천히 몽상의 신전의 중앙, 거대한 문의 앞에 바로 섰다.
“한번 믿기로 했다면 끝까지 믿는 수밖에.”
신이 아닌 인간의 선택을.
무모하다 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을 돕는다.
키이잉!!
이드라의 손에서 새까만 검은 직육면체의 물건이 나타나며 회전했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에서 오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문을 향해 폭사됐다.
“윽!”
인간이 된 뒤로 크게 줄어든 신격이 뽑혀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1회차의 자신과 하나가 되며 신격이 늘어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끼, 끼기기기긱!!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며 신전의 내부를 하얗게 물들이는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드라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리며 엘리제의 기척을 느꼈다.
저벅, 저벅.
‘나온다.’
누군가가 나오고 있었다.
이드라는 그것이 엘리제임을 직감했다.
‘인간의 모습?’
분명 마지막에 보았던 광경은 괴물로 변해가던 엘리제였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 발소리는 분명 인간의 그것과 같았다.
“그르르르.”
혹시나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되찾은 건가 싶었던 이드라지만 이어진 짐승의 울음소리에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잖나!’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엘리제의 노을빛 눈동자가 이드라에게 고정됐다.
엘리제는 이전과 달리 머리카락이나 눈이 금색과 적색이 섞인 노을빛 머리색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이드라는 그녀의 눈동자에 담겨있는 적의를 선명하게 느꼈다.
세상 모든 걸 증오하는 적의를.
“……?”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았던 엘리제에게 대비하던 이드라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움직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뭔가를 찾고 있나?’
코를 킁킁거리며 이드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어딘가를 응시하며 조용히 굳었다.
짐승의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던 엘리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 미르.”
노을색 눈동자에 조금이지만 이성이 돌아왔다.
그녀는 느꼈다. 지금 지구에 있는 ‘적’의 기운을.
“이미르, 이미르, 이미르으으으으!!”
자신의 별을 멸망시켰던 거인왕의 모습.
자신을 죽이고 마마잭과 헤어지게 만들었던 그가 지구에 있었다.
“죽여, 죽여 버리겠어.”
짐승의 본능을 증오로 이루어진 본능이 억눌렀다.
이미 엘리제에게 눈앞에 있는 이드라는 관심 밖이었다.
콰콰쾅!!
엘리제가 무릎을 굽혔다 피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새하얀 석조로 만들어진 몽상의 신전의 천장을 부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미르……에게 간 건가?”
방금 엘리제의 말을 떠올려보면 목적지는 확실했다.
저 짐승과도 같은 여자가 어떤 도움이 될지 이드라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이미르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라는 걸.
***
“웃어?”
이미르는 갑자기 웃기 시작한 세한을 보며 황당할 뿐이었다.
‘실성한 건 아니야.’
세한의 검은 눈동자에는 이성의 빛이 뚜렷했다.
공포에 못 이겨 실성하거나 절망한 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진심으로 기쁨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나? 인간인 네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세한은 여전히 상태창을 열어둔 채, 이미르를 보았다.
언제나 승리만을 해왔고 자신의 행동이 세상의 정의라고 확신하는 오만한 거인의 왕을.
“마치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뉘앙스로군.”
“그럼 할 수 있나? 신을 상대로 인간이 무얼 할 수 있지? 약해 빠진 인간이 전능을 손에 쥔 신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겁에 질리는 것과 고개를 조아리는 것뿐이다.”
신격도 없고,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별을 구성하는 지성체에 불과했다.
그것이 자신의 틀을 부수고 벗어나려고 하면 막는 것이 바로 이미르였다.
“봐라. 네 현재 능력을 보고도 모르겠는가? 그것으로 뭘 할 수 있지? 나에게 맞설 건가? 아니면 도망칠 수라도 있겠나? 불가능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제 다 끝났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김세한? 만약 그렇다면 정말 실망이로구나.”
이미르는 세한을 부질없는 희망을 꿈꾸며 발버둥치는 그런 어리석은 존재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막다른 길에 몰렸음에도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단 말인가.
모두 낭비일 뿐이다.
“이미르 넌 네가 하는 일이 세상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래,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니까.”
“그걸 왜 네가 결정하지?”
세한은 이미르의 말을 자르며 히죽 웃었다.
“신? 우습구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녔으면서 인간이 아니라 칭하는 건가? 인간보다 조금 강하고 오래 살 뿐인 존재가 신이라 자칭하나?”
“무슨 궤변을……. 그럼 누가 신이라는 거냐.”
이미르는 헛웃음을 지으며 멍청한 인간을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약해빠진 세한을.
“신은 어디까지나 기원의 대상일 뿐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할 뿐인 애새끼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희노애락을 느끼며, 단지 강하고 오래 사는 존재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적어도 나는 네놈을 신이라 인정하지 않아.”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 어쩔 텐가? 그럼 네가 신이라 부를 존재가 있나?”
“있지. 단 하나.”
세한은 웃으며 허공에 새까만 공간을 열었다.
바로 허수공간이었다.
‘허수공간? 저건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이미르는 눈을 찡그리며 세한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봤다.
허수공간은 이드라의 전승스킬. 시스템이라도 외신의 힘을 빼앗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단지 저 정도가 끝이겠지.
신격도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의 육체로 허수공간을 사용해 봐야 저렇게 열고 닫는 게 끝이다.
“이미르.”
세한의 손에는 한 자루의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새까만 도끼의 등장에 이미르는 물건을 감정하고자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열쇠를 통해 시스템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물건이 있다니.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냐?”
세한은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물건이 등장하자 적지 않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것이 너에게 전하는 내 마지막 DLC다.]
광기의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하나의 도끼를 건넸다.
지금 자신의 손에 쥐어진 도끼.
처음에는 이것을 어디에 사용해야 되나 고민했다.
이미르에게 사용하라는 건가?
하지만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이 도끼의 사용처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 김세한은 어째서 회귀를 했나.
단순히 이미르를 죽이기 위해서?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과정일 뿐.
김세한의 목적은 언제나 단 하나였다.
[아, 그리고 하나 힌트를 주마.]
세한은 눈앞에 여전히 열려 있는 상태창을 응시했다.
바닥으로 변해있는 처참한 능력치가 아닌, 그 상단.
[네가 잊어버린 녀석은 꽤 집착이 심해. 그러니 절대 걱정할 필요 없다.]
바로 특성 ‘아픈 소녀의 사랑’을.
[언제나 너의 가장 가까운 곁에 있을 테니까.]
광기의 마왕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세한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힌트를 줄 거면 좀 더 제대로 달라고.’
그렇게만 말하니 한참 찾았잖아.
언제나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
게임이 시작된 이후, 줄곧 보아왔던 상태창을 향해 작게 심호흡했다.
“인간을 우습게보지 마라.”
천천히, 도끼를 쥔 양팔을 공중으로 들어 올린다.
그의 양팔에 하얀 기운이 머물며 세한의 양팔의 근력을 강화시킨다.
바로 아서로부터 공유받은 스킬, 신념의 일격이다.
‘뭘 하는 거지?’
이미르는 그런 세한의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굳이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저 도끼를 상태창으로 휘두르려는 건가?’
이미르는 자신도 모르게 픽 웃었다.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가. 상태창은 그런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다.
저런 물리력을 행하려 하면 그저 통과되어 허공을 가를 뿐이다.
카앙!!
어?
검은 도끼가 수직으로 떨어지며 상태창에 격돌했다.
붉은 불꽃을 튀긴 도끼의 날은 그 반탄력으로 세한의 몸과 함께 쭉 밀려났다.
“내가 얕보지 말라고 했잖아.”
세한의 손아귀는 방금 충격으로 찢어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무리 신념의 일격으로 위력을 강화시켰다고 해도 평범한 인간의 신체이기에 간단히 상처를 입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한은 멈추지 않았다.
“잘 봐라.”
아주 작은 흠집이 난 자신의 상태창을 보며 세한은 재차 도끼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인간이 뭘 할 수 있는지!!”
카아앙!!
내리치고, 또 내리치고.
도끼는 쉴 새 없이 튕겨 나갔다.
세한의 손도 점점 더 찢어져 도끼를 쥐고 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세한은 멈추지 않았다.
강하게, 더욱 강하게 도끼를 휘둘러 상태창을 내리찍었다.
쩌적.
조금씩.
쩌저적!
아주 조금씩.
쩌저저적!!!
확실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절대로 부서질 리 없는 ‘상태창’이.
시스템이 인류에게 부여한 플레이어의 족쇄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콱!!
“……후우, 후우.”
숨을 헐떡이며 상태창을 응시하자 검은 도끼가 틀어박힌 상태창의 모습이 보였다.
‘아픈 소녀의 사랑’이라는 특성이 적혀 있는 부분에 계속해서 도끼가 격돌하자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도끼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날도 빠지고 금이 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도끼를 쥔 손도 덜덜 떨리고 팔은 이제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도끼를 쥔 손은, 그것을 휘두르는 팔은 멈추지 않았다.
“그만.”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이미르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상태창을 부순다고?
대체 저 도끼는 무엇이기에 상태창을 부술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은 둘째다. 지금은 어서 세한의 행동을 막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그만하란 말이다──!! 김세하아아안!!”
이미르의 전신에 새하얀 백광이 일어나며 세한을 향해 폭사됐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빛에 닿는 것만으로 먼지로 변할 순수한 힘의 결정체.
그런 빛의 앞에서도 세한은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
하얀 빛의 격류는 세한에게 닿기 전,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의 몸에 닿자 부스러지며 흩어졌다.
마치 힘 자체를 흡수한 것처럼 단숨에 ‘무언가’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정체 모를 무언가의 등장에 이미르의 눈이 커졌다.
“너는, 또 뭐냐.”
노을빛 머리칼에 눈동자.
인간의 모습을 한 ‘알 수 없는 것’.
그것은 이미르를 향해 증오를 내뿜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다지 크지 않았던 신격의 크기가 방금 이미르의 공격을 받으며 조금 성장했다.
이미르로서도 난생 처음 보는 생물이었다.
대체 무엇이 원류가 되어 탄생한 건지 모를 존재.
“나는. 네가. 멸망시킨…….”
엘리제는 그런 이미르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별의. 망령이다.”
그녀는 정말로 단지 그뿐인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