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74화 (274/332)

# 274

274. 종말의 유토피아(1)

마계. 나태의 궁.

예로부터 나태의 영역은 악마들 사이에서도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궁에 존재하는 악마라고 해봐야 거의 없었지만, 최근 인간 몇 명이 궁에 들어온 상태였다.

“저기, 수아야. 지구 이대로 괜찮은 거야?”

“민아는 괜찮대?”

눈을 감고 몇 시간째 움직이지 않는 민수아를 지켜보던 두 여성.

아자젤이 거둬준 악마의 계약자 지선과 혜미였다.

전투 능력도 지극히 떨어지는 그녀들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구를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얘 혹시 무슨 문제 생긴 거 아냐?’

수아는 몇 시간 전에 한번 움직였던 걸 제외하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경건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만 보자면 마치 신을 모시는 사제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자운 오빠도 사라져서 무서운데.’

신자운이 분노의 악마가 된 이후, 아자젤은 지구에서 자신이 데리고 있던 이들을 모두 마계로 데리고 왔다.

다만 수아의 오빠인 민수호만 아가트람으로 옮겨 그곳에서 함께 활동하는 상태였다.

“저기 수아…… 힉!”

혜미는 돌처럼 굳어 있는 수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려다,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떠지자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이전에는 단순히 동공에서만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홍채까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평범한 악마의 계약자인 혜미가 느끼기에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힘을 담고 있었다. 단순히 무력적인 강함이 아닌, 이치를 넘어선 뭔가에서 오는 공포.

“……이제 한 걸음 남았어요.”

“하, 한 걸음?”

“네.”

민수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심장은 누군가가 강하게 움켜쥔 것처럼 답답했다.

“그렇다 해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없지만요.”

“그럼 여태 한 게 헛수고라는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솔직히 말해서 제가 보는 모든 미래는 배드엔딩으로 직결돼요.”

“그, 그럴 수가.”

배드엔딩이 무엇인지는 혜미나 지선도 알고 있었다.

지구의 멸망.

마계로 피신해 있는 둘이지만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소중한 사람은 모두 지구에 남아 있었으니까.

“단순한 소거법입니다. 제가 볼 수 있는 건 배드엔딩뿐. 반대로 볼 수 없는 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누군가’가 관여하여 비틀린 미래. 그러면 최대한 보이지 않는 미래로 유도하는 거죠.”

“그게 잘못된 거면 어쩌려고?!”

“이미 전부 잘못됐어요.”

이 게임이 시작된 순간부터 올바른 세계란 없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 결국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에요.”

“그…… 까마귀라는 사람?”

“네.”

민수아는 적당히 몸이 풀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에 조용히 기대어 서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하얀 옷을 입은 가련한 백합과도 같은 인상을 지닌 소녀.

이 작은 소녀가 나태의 악마라고 한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아자젤 님.”

조용한 민수아의 부름에 아자젤의 눈동자가 살며시 움직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 시선은 말해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아자젤 님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죠?”

그건 아자젤의 예상을 넘는 참으로 당돌한 질문이었다.

***

“곧 지구에 게이트가 열립니다!”

“정말 올 것이 왔구만.”

디어사이드의 내부.

플레이어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들로 구성된 사원들은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한 새빨간 경고창에 점차 안색이 창백하게 되기 시작했다.

이드라가 사라지고 그런 사원들을 통제하던 김경수 팀장의 가슴은 점점 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왔다.’

이 세계가 게임이 되고 전부 터무니없는 일뿐이었다.

언제 종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세계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날이 닥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부모님은 괜찮으실까?’

이미 일반인들은 플레이어들이 대피시켜 최대한 영향이 미치지 않는 장소, 바로 르뤼에로 피신해 있는 상태였다. 르뤼에는 지구에 있지만 외신의 땅.

퍼블리셔조차 손대기 어려운 장소였기 때문이다.

“방화벽을 깨고 강제로 들어오는 숫자는 족히 만이 넘습니다! 거기에 부서진 방화벽으로 다른 차원으로 연결되는 게이트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까 들려온 콜라보 퀘스트 관련이겠지. 연결된 차원이 총 몇 개지?”

“열다섯입니다!”

열다섯. 한 개도, 두 개도 아닌 무려 열다섯 개의 차원을 지구와 연결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지구의 종말.

거기에 이미르가 이끄는 본대가 지금 서울의 상공에 모습을 점차 드러내고 있었다.

‘하필 와도 이 코딱지만 한 땅에 오냐?’

넓은 중국이나, 미국도 있는데 왜 한국이란 말인가.

이유야 알지만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곧 육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앞으로 10초!”

한 사원의 외침에 부산하게 움직이던 사원들의 눈이 하나같이 창밖으로 향했다.

붉게 물든 서울 하늘의 중심에 뚫려있는 검은 구멍에서 조금씩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왔다.”

퍼블리셔의 본대가 드디어 지구에 도착했다.

인류의 종말이 눈앞에 있었다.

***

“쯔쯔, 지구도 이제 끝났구만. 섭종이네, 섭종.”

“하지만 이렇게 거창하게 섭종하는 별은 처음이지 않나?”

“확실히 그건 그렇지.”

초상계, 흔히 신들이 머무는 장소라 불리는 곳.

초상계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예를 들자면 북유럽 신들이 모이는 아스가르드나 그리스 신들의 올림포스와 같은 장소가 그런 곳이다.

당연히 신이란 존재는 지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성(異星)의 신들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 명의 신들도 그런 이성의 신들이었고, 적당히 술을 마시며 안주 삼아 지구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건 비단 그 세 명의 신만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신들이 실시간으로 지구를 시청했다.

현재 신들 사이에 최대 이슈가 바로 지구와 퍼블리셔의 정면대결이었으니까.

“내참 고작 별 하나가 퍼블리셔에 대항할 줄은 몰랐는데.”

“이미르가 정말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외신이 통제하는 별이니 우주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최근 반고도 죽였잖아?”

“아, 나도 봤어. 올림포스의 여신이던가?”

“태생은 인간이지만 말이야.”

신들은 퍼블리셔가 운영하는 게임에 포인트를 사용하는 고객이지만, 함부로 퍼블리셔와 대립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거인왕 이미르는 그 어떤 신보다 강했고, 퍼블리셔는 우주의 어떤 세력보다 컸다.

싸우게 되면 신이라고 해도 풍비박산 나는 게 확정이니 신들조차 이미르의 통치를 받아들인 지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시스템의 의지로 운영되는 우주.

모난 돌이 등장하면 퍼블리셔가 나서서 처분해 버린다.

그것이 줄곧 반복되어 저항하는 법을 잊었다.

굳이 저항하지만 않으면 해가 되는 일도 없었고, 초상계에 살아가는 신과 별의 생명체들은 생태가 달랐다.

그렇기에 신들이 할 수 있는 유희란 지극히 한정되었다.

퍼블리셔는 그런 신들을 무료함과 시스템을 이용해 ‘게임’이란 형태로 발현시켰고, 신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수많은 별들을 플레이하며 멸망으로 인도했다.

“이 모든 건 우주를 위해서다.”

이미르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처럼 우주에서 대규모 전쟁이나 다툼이 사라진지 긴 세월이 흘렀다.

만약 그런 가능성이 보이면 바로 ‘게임’으로 변해 징벌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툼이 없고, 평화만이 가득하며 노력이 보답받고 차별이 없는 낙원.

유토피아, 이미르는 이 우주를 그렇게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였을까.

신들이 투덜거리면서도 지구와 퍼블리셔의 싸움을 지켜봤다.

그들의 가슴속에 이미 잊은 지 오래된 감정이 싹트고 있는 것조차 모른 채, 자신의 옵저버를 지구로 보냈다.

퍼블리셔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존재가 어떻게 되는지 눈앞에서 똑똑히 보라고 오히려 종용하는 것 같았다.

“……이길 수 있을까?”

한 신이 그렇게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외신까지 왔는데 가능할 리가.’

옵저버로 보이는 영상에는 서울의 하늘에서 나타나는 퍼블리셔의 병력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외신의 것들도 있었다.

분명 저 구멍 내부에서 이미르에게 침략한 외신들도 함께 올 것이다.

거인왕 이미르와 퍼블리셔의 병력.

외신의 세력.

그리고 콜라보 퀘스트를 통해 오는 수많은 별들의 플레이어.

하나의 별이 감당하기에는 하나하나가 재해와도 같은 것들이다.

결코 이길 수 없다.

무슨 짓을 해도 압도적인 숫자와 질의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그러나 만약.

정말로 만약 지구가 이 상황을 뒤집고 퍼블리셔에게 반격을 가한다면.

‘가슴이 뛰는군.’

정말 오랜만에 그들의 가슴속에서 작은 불씨가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세한이 노리던 비장의 한 수였다.

***

“이미르 님이 오셨다!”

“오오오! 거인왕이시여!”

그것은 비와 같았다.

검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 병력들은 마치 소나기처럼 우수수 지상을 향해 쏟아졌다.

그것은 서울만이 아닌 전 세계를 향해서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가장 많은 숫자가 서울을 향해 떨어졌다.

“모두 물러서십시오! 뒤로 물러서서 방어대형을 구축해야 합니다!”

“당장 피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괴물의 모습에 박성혁과 이아영이 외쳤고, 플레이어들은 서둘러 몸을 빼며 움직였다. 그런 플레이어들을 노리고 별의 군세나 거인들이 공격했지만 그 모든 건 세한이 막아냈다.

콰콰콰콰!!

문제는 그런 별자리나 거인들의 공격뿐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병력들에 서울의 건물들은 속절없이 붕괴했다.

특별히 그들이 지상에 공격을 가한 건 아니다.

비처럼 쏟아진 병력들은 그저 지상으로 ‘내려섰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서울의 절반이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나 세한은 내심 안도했다.

‘강자는 대부분 이곳에 떨어졌다.’

다수의 외신의 기척이 포착되고 있었다.

아자토스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자토스는 보이지 않았고, 다른 아우터갓 몇몇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2미터가 넘는 덩치를 지닌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칼을 지닌 남성이 있었다.

“이미르.”

이미 페트로이아에서 한번 마주쳤던 거인왕.

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세한을 향해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이미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세한의 바로 앞에 내려섰다.

적진의 한가운데나 마찬가지였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이미를 해코지할 생각을 못했다.

그가 지면에 발을 내딛는 순간,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경외감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굽혀질 것만 같았으니까.

‘저것과 싸운다고?’

여태 신격을 가진 자들을 꽤 보았던 플레이어들이었지만 이미르에게는 ‘감히’ 싸우고자 하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이미르는 그런 플레이어들을 참으로 자애로운 얼굴로 훑어보았다.

“참으로 용맹한 전사들을 육성했구나, 까마귀. 아니, 김세한.”

“거 칭찬 고맙네. 비꼬는 걸로 밖에 안 들리지만 말이야.”

“아니,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다.”

이미르를 둘러싼 수많은 플레이어들.

여태 수많은 별들을 지켜보았던 이미르지만 이런 단시간에 이정도 수준의 플레이어들이 등장한 별은 본 적 없었다.

“내 판단이 후회되지 않는 광경이야.”

“빨리 조지러 온 거?”

“그래.”

이미르는 씩 웃으며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수많은 별들과 싸워온 우리 퍼블리셔의 맹자들과, 별자리. 그리고 외신의 세력까지 이곳에 왔다.”

하나의 별에 과잉전력이라고 해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현재 이미르의 명만을 기다리며 하늘과 대지에서 조용히 이쪽을 지켜봤다.

외신들도 세한을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넌 대단한 놈이야, 김세한. 나를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만들었다.”

이미르는 진심이었다.

이 정도로 신중하게 움직인 건 수천, 아니 수만 년만이었다.

“이 모든 걸 준비하기 위해, 나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니 이제 슬슬 이득을 얻어야 할 테지.”

열쇠의 힘을 사용하여야 했고, 시스템에게 요청하여 한 별에 강림할 수 있는 신격의 제한을 해제했다. 외신과 거래하여 그들의 군세를 이끌고 왔으며, 수많은 별에 콜라보 퀘스트를 발생시켰다.

당연히 그것에는 퍼블리셔에도 상당한 손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르는 거기서 발생한 손해를 톡톡히 지구에서 받아낼 생각이었다.

“이제 다시는 평화로운 세계를 어지럽히는 ‘악’이 나오지 않도록 본보기가 되어줘야겠다.”

철저히 지구라는 별을 이 우주에서 소멸시켜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발버둥 쳐봐라. 무얼 하든 모두 뭉개주마.”

그는 거인이며 신으로서 이 세계를 어지럽히는 악을 징벌해야만 했다.

그것이 우주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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