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72화 (272/332)

# 272

272. 강림(3)

루크는 레굴루스가 자신을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강해지길 갈망했기에 아래를 보지 않았다.

자신의 발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태생부터 신수였던 그는 늘 강자였고, 그의 위에 있는 건 신이나 거인과 같은 초월자뿐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늘 자신의 위에 있는 신과 거인을 쫓고자 했고, 그는 끝내 그들과 동등한 힘을 손에 넣었다.

루크는 그런 루크와 비슷한 이를 자주 보았다.

자신의 힘에 심취한 인간이란 대다수 비슷한 법이다.

신수인 그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는 점이 우스웠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반드시 빈틈이라는 게 존재했다.

흔히 말하는 초심자의 행운.

럭키히트라고 부르는 그것.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그것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많았다.

오만하기에, 상대를 얕보기에.

바로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레굴루스는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왼팔을 보며 아연해졌다.

저게 왜 잘렸지?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그 의문만이 맴돌았다.

“자네는 인간을 너무 얕봤어.”

루크는 말했다.

푸르던 그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하며, 리브라의 검신을 타고 황금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건 루크가 가진 힘이 아니다. 그는 한줌의 신격조차 존재하지 않는 평범하고 약해빠진 플레이어에 불과했다.

‘설마 저 힘은.’

바로, 아스트라이아의 신격이었다.

“어째서, 그 힘을 네가? 정의의 여신은 잠들어 있잖나!?”

“잠들어 있는 건 내 딸이다.”

한 몸이지만, 아스트라이아와 린은 별개의 존재다.

계속 잠들어 있던 린과 달리 아스트라이아는 얼마 전에 정신을 차렸다.

단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린이 일어나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기에 루크는 아스트라이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잠시라도 좋으니, 린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으로 합신을 부탁한다고.

루크는 평범한 플레이어이기에 린과 같이 아스트라이아가 흡수될 일은 없었다.

애초에 지금 아스트라이아는 린의 힘을 대신 운용할 뿐이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현 정의의 여신인 린 테일러는 루크의 딸이었기에 그 어떤 아바타보다 상성이 좋았고, 그것이 어떤 시너지를 발생시키는지 레굴루스는 지금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레굴루스가 신격을 두르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팔을 두부처럼 잘라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이, 이놈. 자신의 목숨을 불태워가며 이런 짓을!’

신을 자신의 몸에 강림시키는 건 양날의 검이다.

아무리 상성이 좋다고 한들, 목숨을 불태워 한다는 건 매한가지였다.

실제로 1회차에 루크는 아스트라이아를 강림시킨 후에 사망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그의 몸에 강림시킨 게 자신의 딸인 린의 힘이라는 점.

그리고 긴 시간을 강림시킬 필요 없이 마지막 일격을 가할 순간에만 잠시 강림시켰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현재 루크는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것을, 린은 전부 받아들였다는 건가?’

인간이 신이 내어준 힘을 몸에 받아들인다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세한처럼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가는 것이 아닌, 단번에 다른 이의 신격을 받아들인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부담이 가해졌다.

하지만 루크는 버텼다.

지금 자신의 등 뒤에는 딸이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로서 결코 쓰러져서는 안 됐다.

리브라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서며 검을 치켜들자 레굴루스의 눈이 화등잔마냥 커졌다.

“정의의 여신과 싸우고자 했으니, 소원은 이뤘네.”

피식 웃는 가일의 말에 레굴루스는 반박하고 싶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정의의 여신의 힘을 체험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뭣보다 눈앞의 남성은 자신이 싸우고자 했던 린 테일러가 아니었다.

“잠시 기다려라, 기다려라. 인간……!!”

왼팔이 잘렸기에 레굴루스에게는 더 이상 남은 방어수단이 없었다.

황금색 불길로 감싸인 심판의 검이 재차 휘둘러지며 금색의 궤적을 그렸다.

서걱.

황도 12궁 최강이라 불리던 레굴루스를 죽인 건, 신격조차 지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

서울에 도착한 순간, 세한은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디어사이드로 몰려드는 거인과 별들의 군세는 예측했지만 ‘최상급’ 신격의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설마 레굴루스가 최상급 신격을 얻었다고?’

1회차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1회차의 레굴루스는 강하긴 했지만 그래봐야 상급 언저리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던 존재였다.

그런데 어떻게 최상급에 도달했단 말인가.

‘이유는 상관없어. 서둘러야 해.’

레굴루스가 최상급 신격을 얻었다면 검성 가일이라고 해도 이길 수 없었다.

육체 스펙부터가 상대가 안 되는데다 레굴루스는 무예에도 해박했다.

‘저건……?!’

전력을 다해 레굴루스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던 세한의 시야에 레굴루스의 뒤를 잡은 루크의 모습이 보였다.

‘합신을, 사용했다.’

루크의 전신에서 강렬한 신격이 타고 흘렀다.

아스트라이아의, 아니 린의 신격.

그 일부를 몸에 받아들여 합신한 루크는 마치 1회차의 그를 보는 것 같았다.

알데바란을 죽일 당시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그의 검이 빛나며 레굴루스의 목을 잘랐다.

객관적으로 루크의 힘은 레굴루스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레굴루스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 건 검성이 그의 오른팔을 잡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신격이 부족한 상태라 제대로 신격을 방어에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격으로 감싼 리브라에 공격당했으니 목이 베이는 것도 당연했다.

“루크 씨!!”

세한은 그의 이름을 외치며 그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루크는 합신을 해제하며 비틀거렸고, 그런 그를 세한은 급히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아, 아아. 그렇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야. 다시 하고 싶지는 않네만.”

창백한 안색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세한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위험한 상태는 아니야.’

혹시나 1회차와 마찬가지로 합신의 영향으로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지만 루크는 피로감이 보일 뿐 목숨이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위험한 건 방금 전까지 레굴루스의 팔을 봉했던 가일이었다.

레굴루스의 공격을 자신에게 유도하며 받은 탓에 큰 타격을 받은데다 온 힘을 다해 그의 팔을 붙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 다시는 이런 노동은 사양하겠어.”

“아마 앞으로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쿨럭. 치료도 부탁하네만.”

입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말하는 가일의 말에 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치명상이라 어지간한 치유마법으로는 치료하기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세한은 아주 뛰어난 회복 실력을 지닌 팻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백…….”

“저 왔으니까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처 이름을 다 말하기도 전에 언제 왔는지 백설이가 세한의 뒤에 서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한의 시선을 느꼈는지 백설이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저는 줄곧 디어사이드에 있었으니까요. 싸움이 끝난 것 같아 바로 나온 참이었습니다.”

성녀를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회복능력을 가진 백설이다.

거기다 치유마법뿐이 아니라 모든 마법에 능하니 유사시에 최후의 수단으로 남아 있었지만 레굴루스가 쓰러졌으니 곧바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말하지만 부르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을 텐데요.”

세한이 매번 아무런 전조도 없이 부르는 탓에 늘 바닥에 나뒹굴어야 했던 백설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빤히 응시하는 백설이의 시선에 세한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흠, 흠흠. 그보다 어서 치료를 해줬으면 해.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까.”

“알겠습니다.”

백설이도 더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가일의 등에 손을 올리고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후, 살겠군.”

그제야 가일은 한시름 논 듯 편안한 얼굴이 되어 작은 신음을 흘렸다.

“다시는 그런 괴물과 싸우고 싶지 않다만, 그러긴 힘들겠지?”

“기왕 도와주기로 하셨으니 이번만 끝까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페트로이아에도 나쁠 것 없을 테니까요.”

“그거야 이쪽이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만……. 어쨌든 난 빚이 있는 몸이니 어쩔 수 없지.”

“감사합니다.”

창백해졌던 안색도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왔다.

가일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건 단순한 투정에 불과했다.

퍼블리셔가 침략해 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워주리라.

“루크 씨도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좋은 걸 배웠군요.”

“이번에도 배우다니. 나는 자네에게 딱히 뭔가를 가르쳐준 적이 없네만.”

루크 역시 백설이의 치유를 받아 많이 회복된 모습이었다.

그는 방금 세한의 말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한에게 루크는 딱히 뭔가를 알려준 적이 없었으니까.

“아뇨,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로 많이.”

이전이라면 되도록 하지 않았을 말이었지만, 이제 이것도 마지막이다.

1회차의 이야기도 언젠간 그에게 해야 되겠지.

지금의 세한이 있을 수 있는 건 1회차의 ‘선생님’이 있었던 덕이었으니.

그리고 방금 한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레굴루스를 잡던 루크의 모습에 세한은 많은 걸 느꼈다.

“백설아 그래도 두 분을 부탁할게.”

“또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저기 고생하는 두 사람에게 전할 것이 있거든.”

“알겠습니다.”

세한은 회복에 전념해야 되는 둘을 백설이에게 맡긴 후, 박성혁과 이아영이 있는 장소로 한걸음에 뛰었다.

족히 수백 미터는 되는 거리였지만, 세한은 단 한 걸음만에 이아영의 곁에 도착했다.

“까, 깜짝이야.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 거예요?!”

“방금 전에 하늘로 날아왔는데 못 봤나?”

“지금 앞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하늘 볼 시간이 있겠어요?”

확실히 그 말이 맞긴 했다.

지금 제네시스와 피안화가 최선을 다해 막고 있는 별자리들의 군세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이전에 알데바란의 군세 하나로 서울이 초토화되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황도 12궁과 선발대는 몇 명이지?”

“이곳에는 없어요. 그들은 지금 홍가은 그 여자와 송창우가 막고 있으니까요.”

“단둘이?”

“아뇨, 아웃라이징 길드도 그곳에 있긴 한데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이아영이 비꼬듯 말하긴 했지만 아웃라이징 길드라면 믿을 만했다.

‘마지막에 봤을 때 길드랭킹이 7위였던가?’

서울 3대 길드 중에서는 순위가 가장 높았다.

아마 길드장인 강태성이 그만큼 열심히 사냥을 한 거겠지.

전투력만큼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끄는 군세는 다 이리로 몰려온 탓에 좀 벅차긴 하네요.”

황도 12궁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별자리들도 저 사이에 끼어 있었다.

작은 별자리라도 신격을 가진 존재이니 플레이어가 한둘이 붙는다고 상대할 순 없었다.

족히 수십은 붙어야 하나를 상대할 수 있었고, 거기에 별자리들이 데려온 잡졸들까지 상대하려니 벅찬 것도 당연했다.

“그럼 좀 도와줘야겠군. 곧 퍼블리셔의 전력이 올 텐데 이놈들로 체력을 낭비할 수는 없지.”

“……네? 이게 전력이 아니었어요?”

“이게 전력이 아니었습니까?!”

세한의 말을 듣고 경악한 건 이아영뿐이 아니었다.

이아영의 옆에 온 세한을 보고 황급히 달려온 박성혁도 경악에 물든 얼굴이었다.

“너라면 알면서 왜 그래? 저 뻥 뚫린 구멍에서 그럼 이미르 혼자 올 거라 생각했나?”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막상 들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 군요.”

박성혁의 신 티르도 퍼블리셔는 이길 수 없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지금 그 말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붉어진 하늘과 점점 커지는 검은 구멍.

대체 저 안에서는 뭐가 튀어나올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그럼 서둘러 이걸 정리해야 될 텐데…….”

“그건 걱정 마라.”

세한은 느릿하게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지금 정리해 줄 테니까.”

황도 12궁도 아닌 일반 별자리들이나, 그들이 이끄는 잡졸들은 이미 세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세한의 능력은 자신보다 ‘약자’를 상대할 때 절대적이었으니까.

‘뭘 하려는 거지?’

박성혁은 갑자기 지면에 손을 댄 세한을 보며 의아해졌다.

세한의 능력은 허수공간이 아니었나? 평소처럼 무기 같은 걸 휙휙 날리나 싶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쿠구구궁!

“헉?!”

그때였다.

세한의 몸에서 신격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신격이.’

박성혁은 이미 상당한 숫자의 별자리들과 마주쳤다.

개중에는 황도 12궁도 있었지만 누구도 이런 힘을 보유하지는 못했다.

‘김세한, 당신 대체 이런 힘을 어떻게 손에 넣은 겁니까?!’

콰콰콰쾅!!

흔들리던 대지에서 얇은 원뿔형의 기둥이 치솟으며 별들의 군세를 마구잡이로 꿰뚫었다.

놀라운 점은 그 기둥이 플레이어에게는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환상처럼 인간의 몸은 단순히 통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적들의 몸에는 사정없이 틀어박히며 몸을 찢어발겼다.

아무리 튼튼한 가죽을 지녔어도, 단단한 육신을 지녔어도 소용없었다.

단 5분.

그것이 별들의 군세의 절반이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