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271. 강림(2)
세한이 서울로 향했을 무렵, 서울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자궁의 레굴루스와 그를 막기 위한 검성의 싸움은 그야말로 재해와도 같았다.
레굴루스의 주먹이 한번 뻗어질 때마다 땅이 뒤집히고 대기가 갈라졌으며, 검성은 그런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며 디어사이드 건물로 향하는 피해를 막아내고 있었다.
‘저러다 지는 거 아냐?’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 있는 디어사이드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러다 한번만 못막으면 레굴루스의 공격에 건물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모두 정신 차려요! 우리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다른 적들이 레굴루스를 돕는 걸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합시다! 뒤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앞에서 소리치는 이들은 3대 길드의 간부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건 제네시스의 길드장인 박성혁이었다.
옆에는 시큰둥하게 서 있는 피안화 길드의 길드장인 이아영의 모습도 보였다.
아웃라이징의 경우에는 서울의 다른 지역을 맡고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3대 길드 중 둘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그가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못한 건가?’
박성혁은 이를 악물며 사람들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도 디어사이드가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다. 애초에 저 건물이 무너지면 지구는 패배하게 된다.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거인이나 별자리들이 레굴루스를 도울 수 없게 최대한 방어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레굴루스를 도와 공격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저쪽은 우리가 돕는다고 해서 도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위협적인 레굴루스의 모습에 몇몇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이 디어사이드의 방향으로 쏠렸다.
하지만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레굴루스의 무시무시한 힘에 도망치는 이들도 생길 정도였으니까.
“내가 할게.”
“……부탁드립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이아영이 나섰다.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방법이지만 사람들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이아영은 살며시 심호흡하며 자신의 목 근처를 검지로 쓸었다.
마치 그곳에 보이지 않는 목걸이가 있는 것처럼.
“「모두 뒤는 신경 끄고 방어선을 구축한다, 실시.」”
브리싱가멘.
남성에 한 해 발현되는 절대명령권.
그녀의 전승스킬에 저항 능력이 없는 평범한 남성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겁에 질려 있던 이들이 빠르게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서 남성 플레이어들로만 모아달라고 한 거였군요.”
“원래 사람이라는 게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럴 때 내 능력은 더 큰 힘을 발휘해.”
위험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사람인 이상 보통은 정신적으로 약해진다.
평상시라면 브리싱가멘에 약간은 저항할 수 있을지 모르는 플레이어들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아영의 한마디에 모두 그녀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봐야 저런 괴물 새끼한테는 통하지도 않는걸.’
레굴루스와 검성과의 싸움을 본 이아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둘에게 이아영의 능력은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아영이 신격을 다룰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신격을 지니지 못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곳의 플레이어들을 이용해 최대한 수비에 전념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건 박성형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브리싱가멘과도 같은 스킬이 없는 박성혁은 새삼 홍가은이 그리워졌다.
‘그래도 이곳에 오는 거인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으니.’
홍가은은 현재 창우와 함께 최전선에서 몰려오는 선발대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비록 그녀의 힘은 거인들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창우가 공격할 때 다른 공격들을 막아주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바르자이의 언월도를 사용하는 창우의 공격은 사실상 방어무시의 공격.
아무리 튼튼한 몸을 지닌 육신이라고 해도 제대로 한방만 맞으면 죽는다.
그 덕에 거인이나 별자리들이 쉽게 이곳에 몰려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는지.’
시선을 위로 올리면 붉어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거기다 새빨간 하늘의 중심에는 검은 구멍이 뚫려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종말.’
무엇보다 그것이 어울리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세한 씨, 당신은 정말 종말을 막을 수 있는 겁니까?’
과연 이 모든 상황이 세한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인가.
박성혁은 알 수 없었다.
***
성가시다.
빠드득.
레굴루스는 날카로운 사자의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눈앞에서 팔랑팔랑 움직이는 검성이 너무나 거슬리고 성가셨다.
“가일, 이 새끼 방어만 할 생각이냐!”
“그럼 공격할 틈을 주시던가.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빠릿빠릿 움직이기는 힘들어.”
레굴루스의 주먹은 만약 제대로 적중한다면 단 한 방에 서울을 붕괴시킬 힘을 지니고 있었다.
힘을 모아 대지를 후려친다면 서울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한 방에 사라질 수도 있다.
최상급 신격에 이른 존재란 그런 것이다.
세계적재해. 만약 시간을 조금만 준다면 일격에 별도 반으로 쪼갤 수 있는 괴물들이다.
그런 강맹한 힘을 가일은 모조리 막아내고 그 충격마저 완벽히 상쇄시켰다.
지켜보는 이들은 단지 엄청난 싸움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일격에 나라를 붕괴시킬 수 있는 힘을 한순간에 흩어버리는 걸 이미 수없이 되풀이했다.
‘확실히 지치기는 하는군.’
검자루를 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영역 내에 들어오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한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가일이 레굴루스와 동급의 신격을 지닌 최강의 플레이어라고 한들, 그도 외신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했다.
카앙! 카아앙!
허공에 격돌할 때마다 막대한 신격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흩어졌다.
더불어 가일의 몸도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신격은 동급이라고 해도 육체적인 능력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 넌 확실히 대단한 놈이다. 허나 그래 봐야 인간. 태생부터 신수로 살아온 이 몸에 비하면 하찮지.”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어린 여자애랑 못 싸워서 안달인가?”
“어린 여자애?”
날카롭게 비꼬는 가일의 말에 레굴루스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것이 어린 여자아이라 할 수 있나? 아니, 애초에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너는 그 아이가 싸우는 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토해내듯 쏟아내는 그의 말을 가일은 반박할 수 없었다.
린 테일러,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가일에게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나름 인류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그조차 ‘따위’라고 부를 수 있는 재능을 지닌 경이적인 소녀.
그러나 가일은 단 한 번도 린과 진심으로 싸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 아이와 싸우게 되면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아이였으니까.
기껏해야 자신의 딸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 소녀.
그런 어린아이와 싸우길 갈망하는 레굴루스의 모습은 가일에게 조금씩 분노를 일깨웠다.
가볍게 웃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 것도 그때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어린아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카앙!
가일의 검이 재차 레굴루스의 주먹을 쳐냈다.
“나는 강자와 그렇지 않은 자만을 구분한다. 어린아이라는 건 전혀 상관없다!”
“그럼 너는 그 아이에게 강자라고 자칭할 수 있나? 반고조차 이긴 린 테일러에게, 너는 강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 아이에게 너는 그냥 귀여운 고양이일 뿐이야.”
그의 공격을 받아내고, 튕겨내고, 막아낸다.
수십, 수백, 수천의 검이 대기를 가르며 허공에서 휘둘러지는 레굴루스의 주먹과 격돌한다.
“이, 새끼가……!!”
사자의 포효가 울리며 그의 금색의 갈기가 확 퍼졌다.
금색의 빛이 부풀어 오르며 그의 발이 쿵, 대지를 짓밟는다.
드드드드!!
아스팔트 대지가 사방으로 갈라지며 주변의 건물들이 붕괴하고 무너졌지만, 둘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레굴루스의 행동은 공격이 아니다.
강하게 앞으로 달리기 전 내디딘 도움닫기에 불과했다.
“검성이라 불리니 자신의 주제를 잊은 모양이구나!”
“주제를 잊은 건 너다. 고양이 새끼가.”
“……!!”
모멸이 섞인 말을 내뱉은 가일은 자신의 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날카로워진 그의 눈이 레굴루스를 직시했다.
“이 아저씨가 말이야. 웬만해선 진심으로 싸우지 않거든. 근데 아무래도 넌 안 되겠다.”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는 그의 모습에 레굴루스는 앞으로 내디딘 발에 한층 힘을 불어넣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둘의 기세에 주변의 플레이어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을 정도다.
“그래, 마침 잘 됐어. 그동안 너도 제법 거슬렸지. 이 기회에 확실히 때려 죽여주마.”
검성 가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레굴루스보다 높은 신격을 지닌 인간.
그러나 레굴루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가일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도리어 싸운다면 백번 싸워도 백번 전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신격의 크기가 강함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다.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어도 결국 육신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소용없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의 싸움으로 재차 확인했다.
가일은 결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되도록 힘을 아껴둘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군.”
린 테일러와 싸울 때를 대비해 최대한 힘을 비축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콰과과광!!
포탄처럼 날아오는 레굴루스의 모습에 가일 역시 그가 전력으로 달려들고 있음을 알았다.
만약 피한다면 자신의 뒤에 있는 디어사이드가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리라.
‘물론 피할 생각 따위는 없지만.’
──칭.
전력으로 승부를 걸어오는 레굴루스의 행동은 가일의 의도대로였다.
오직 자신을 죽이기 위한 행동, 아마 마주 공격을 한다면 지는 건 분명 자신이다.
레굴루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마 계속 싸운다면 백이면 백, 가일이 패배한다.
그럼에도 가일은 마치 전력으로 맞상대하려는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레굴루스가 지금처럼 덤벼드는 순간을 노리기 위해.
촤아악!!
가일의 검이 뽑히며 반원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마치 동귀어진을 모습처럼 레굴루스에게 덤벼들었고, 레굴루스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런 가일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정면에서 부딪친다면 이보다 편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그런 레굴루스의 생각이 바뀐 건 금방이었다.
그의 심장을 노리며 휘둘러지던 가일의 검이 뱀처럼 뒤틀리며 경로를 바꿨기 때문이다.
“설마!”
가일의 검은 수평으로 꺾이며 그대로 대각선 아래로 떨어졌다.
검이 노린 건 레굴루스의 심장이 아니었다.
바로 뻗어진 레굴루스의 오른 주먹.
‘멍청한 놈!’
자신의 팔을 베려 한 건가? 소용없는 짓이다. 그의 가죽은 신들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튼튼했다.
거기다 신격까지 두른 그의 팔을 고작 검으로 벤다고?
카가가가강!!
가일의 검과 레굴루스의 주먹이 격돌하며 불꽃이 튀었다. 순식간에 이빨이 나가고,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검의 모습에 레굴루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콰창!
“커어억!!”
결국 레굴루스의 주먹은 가일의 검을 부러트리며 그의 가슴에 적중했다.
새빨간 피를 뿌리는 가일의 모습은 확실히 치명상이었다.
그러나 레굴루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대로 공격이 명중했지만 자신이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가슴을 꿰뚫지 못했다고?’
심지어 주변에 부서진 것 하나 없었다.
가일이 남은 충격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면서까지 레굴루스의 공격을 완벽히 상쇄시킨 덕이다.
“네놈, 대체 왜 그런 짓을…… 음?”
이해할 수 없는 가일의 행동에 레굴루스는 천천히 오른손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새빨간 피를 토하며 가일이 그의 팔은 양손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 뭘 하자는 거지?’
갑자기 팔을 봉쇄시켜 당황하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다.
비어 있는 왼손을 이용해 후려치기만 해도 가일은 죽으리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레굴루스의 눈에 비친 가일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
레굴루스는 가일의 눈에 자신이 비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레굴루스가 아닌 그의 등 뒤에 있는 누군가.
“넌……!!”
리브라를 손에 쥔, 금발의 남성.
루크 테일러가 검을 높이 치켜든 채 레굴루스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대체 언제 다가온 거지?!’
레굴루스는 황급히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가일의 최후의 힘을 쥐어짜 레굴루스의 팔을 잡은 탓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검성은 이걸 노렸던 건가?’
거기다 전력을 퍼부어 공격을 가한 탓에 신격이 상당히 소모가 된 상태였다.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지만, 단지 방어만 했을 뿐인 가일의 손을 뿌리칠 정도는 아니었다.
“너는 너무 높은 곳만 보더라고.”
피를 흘리며 가일은 말했다.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루크는 레굴루스에 비하면 너무나 약하다.
마치 먼지와도 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렇기에 레굴루스는 루크를 애초에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검을 휘두르기 직전까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래도 왼팔은 남아 있다.’
오른팔을 잡혀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왼팔은 자유로웠다.
저런 평범한 플레이어 따위는 특별한 기술을 사용할 것도 없이 왼팔을 휘젓는 것만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다.
잠시 당황했던 레굴루스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리브라를 휘두른다고 해도 평범한 플레이어가 자신의 가죽을 가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신격을 두르지 않는다고 해도 신수의 가죽.
신격도 두르지 않은 검에 베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레굴루스는 루크를 향해 왼손을 매섭게 휘둘렀다.
자신의 뒤를 노린 멍청한 인간을 반토막내기 위해서.
“제법 머리를 썼다만 하찮은 몸부림에 불과…….”
서걱.
레굴루스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반토막으로 잘린 건 인간이 아닌, 바로 자신의 왼팔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