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70화 (270/332)

# 270

270. 강림(1)

지구에 뚫린 구멍, 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은 광경이었다.

세한은 저것을 한번 본적이 있었다.

단순히 이드라가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때와 닮았다는 것만이 아니다.

세한은 정말로 저 ‘문’을 본 적이 있었다.

1회차의 마지막.

최후의 알림이 들려왔을 때.

‘드디어.’

다가온 종말.

멸망해가는 세계 속에서 세한은 보았다.

붉은 하늘에 뚫려 있던 검은 구멍.

그것을 눈으로 보았음에도 세한은 그곳에 손을 뻗는 게 전부였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장소.

퍼블리셔와 통하는 문이 열린 모습을 세한은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크크…….”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세한은 낮게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다시 여기에 도달했다.’

광기의 마왕 엔딩에 자신이 어째서 마지막에 웃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인데, 왜 웃었는가.

그 마음이 지금 절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1회차에 신격조차 얻지 못했던 쓰레기가.’

멸망해버린 약해빠진 지구가, 여기까지 왔다.

“……어째서 웃는 거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나?”

그런 세한을 보며 하말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제 퍼블리셔가 침략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지구는 이미 막다른 길에 몰려있었다.

아직 처음에 침략한 선발대도 대부분 건제했고, 황도 12궁은 이제 겨우 안타레스 하나만이 죽었다. 물론 황도 12궁 중 둘은 세한의 편에 붙어 있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처녀궁 아스트라이아는 인간에 우호적인 신이었으며 천칭자리는 그녀의 검이다.

설령 이미르가 황도 12궁에게 지구를 공격하라 명했어도 그 둘은 거부했을 것이다.

‘분명 대단한 자이긴 하지만.’

하말은 세한을 상당히 고평가했다.

고작 플레이어로서 외신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고 별을 퍼블리셔로부터 탈취한 최초의 인간.

경이로운 존재다.

심지어 외신의 힘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최상급 신격에 이르렀고, 이제 진정 외신이 되는 것까지 한 발자국만 남겨둔 초월자.

하말조차 세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해도 이미르 님에게는 미치지 못해.’

황도 12궁 중 최약으로 알려진 백양궁의 주인.

그러나 사실 하말은 태초부터 이미르를 섬겨온 황도 12궁의 수장이다.

누구보다 이미르의 강함을 알았기에 세한이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한눈에 파악했다.

개인의 힘만이 아니다.

아무리 지구가 강해졌다고 한들 퍼블리셔가 지닌 세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지구의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높으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나?”

만약 그렇다면 바보 같은 생각이다.

퍼블리셔가 지닌 힘은 선발대와 황도 12궁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 퍼블리셔가 운영하는 모든 게임에 퀘스트가 돌아갔을 것이다. 전대미문의 콜라보 퀘스트지.”

세한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하는 하말을 그제야 다시 응시했다.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다. 너는 어째서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정말 모르는 건가? 이제 지구는 멸망한다. 퍼블리셔가 도착해 모든 게임으로 통하는 문을 열게 되면 다른 별의 플레이어들이 침략해올 것이다.”

지구는 강해졌지만 최초의 별 페트로이아만큼은 아니다.

아니, 설령 페트로이아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별들의 침공을 버틸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침략 퀘스트를 내리는 별에는 페트로이아도 속해 있었다.

물론 그곳의 플레이어는 검성과 7영웅의 통제를 받아 거부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과반수의 별은 퍼블리셔의 말을 거부할 수 없다.

그정도로 많은 신과 초월자를 보유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어차피 네가 상대할 건 플레이어들이라며.”

“……그렇다.”

“그럼 그거나 신경 써. 난 서울로 갈 테니까.”

“내가 간다면 이곳의 플레이어들이 날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검은 날개를 펼치는 세한을 보며 하말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세한은 처음에 좀 당황했던 모습을 제외하면 지극히 태연했으니까.

마치 이곳의 플레이어들이 하말을 이길 수 있다는 것처럼.

“못하지.”

“그런데 왜?”

“솔직히 나도 쫄았다. 문이 열린 건 좋은데, 이곳을 버리고 가기는 어려웠거든.”

이곳에는 성녀도 있고 블루에일을 비롯한 주요 전력이 많았다.

그러니 세한도 차마 혼자 몸을 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이 왔더라고.”

“지원군?”

그런 자가 이곳에 있나?

하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런 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다수는 평범한 플레이어들 뿐이었으니까.

“찾아도 이곳엔 없어. 아직 온 건 쪽지뿐이니까.”

“쪽지?”

“그래,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이래서 사람은 미래를 볼 줄 알아야해.”

하늘이 붉어지며 검은 구멍이 생기는 순간, 당혹스러워하는 세한에게 하나의 쪽지가 도착했다.

그건 아마 이드라에게 쪽지가 도착했던 것과 동시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너는 모르겠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여자애가 하나 있어. 걔가 이런 상황에 딱 맞춰서 지원군을 보낼 준비를 해뒀더라고.”

“설마, 민수아를 말하는 건가?”

“뭐야, 알고 있네? 역시 퍼블리셔구만, 정보에 빠삭해.”

세한은 씩 웃으며 오른손을 천천히 올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될지도 알겠군.”

딱!

늘 그랬던 것처럼 세한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새까만 공간이 세한의 옆에 열렸다.

평소와 달리 사람이 나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크기로.

“그 기술, 장거리 도약은 불가능한 것 아니었나?”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근처에 오긴 했더라고.”

말하자면 세한은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는 이를 불러올 뿐이었다.

“우리 새로운 분노의 악마님이 말이야.”

검은 공간, 그곳에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얼굴의 반쪽은 새하얀 가면으로 감싸인, 냉철한 인상의 남자.

이미르의 주요 심복인 하말은 퍼블리셔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

거기다 커뮤니티에도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하말이 눈앞의 남자를 모를 리 없었다.

“신자운……!!”

비명과 같은 하말의 외침이 들리는 동시에 새까만 선이 쭉 늘어지며 하말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이 주먹이라는 걸 알아차린 자는 당사자인 하말과 세한 외에는 없었다.

콰과과광!!

‘이, 이건!’

갑작스런 기습이었지만 하말은 왼팔을 들어 공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격까지 가하지는 못했다.

공격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분노의 악마가 된 지는 이제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7대 악마의 자리를 계승하게 되면, 좌에 걸맞은 힘을 얻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격이 뻥튀기 되며 전승스킬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인간 출신의 악마 신자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신격을 지니지 못했던 그는 신격을 얻었고, 분노의 악마의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건 기껏해야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이다.

“이건 겨우 그런 시간에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드드드득!!

대지를 부수며 뒤로 밀려난 하말은 신자운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하말의 외침에 대답해 준 이는 없었다.

신자운은 천천히 주먹을 거두며 세한을 보았고, 세한 역시 신자운을 보며 피식 웃었으니까.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을 적당히 걸친 그의 모습은 언제와 같았다.

악마가 되었음에도 인간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고수하는 그가 세한은 조금 웃겼다.

“아직도 그 건달복장은 못 버린 거냐?”

“이게 제일 편하니까.”

“개소리도 네가 하니 좀 그럴싸해 보이네.”

이래서 사람은 얼굴이 괜찮아야 된다.

조금 헛소리를 해도 유머로 넘어갈 수 있잖은가.

“뭘 해야 하는지는 민수아에게 들었겠지?”

“저놈을 막으면 된다더군.”

“아주 잘 아네. 할 수 있지?”

솔직히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말이 외쳤던 것처럼 신자운은 분노의 악마가 된지 이제 겨우 한 달이 될락말락할 정도니까.

그가 린과 같은 희대의 천재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신자운의 재능은 세한과 비슷한 정도였다.

“후.”

그런 세한의 말에 신자운은 옅게 웃었다.

“내가 누구의 계약자인지 잊었나?”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뒤를 부탁하마.”

세한은 신자운의 어깨를 한번 두드린 후, 검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세한을 응시하던 신자운은 천천히 하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만한 녀석이군. 악마의 힘을 계승하여 주제파악을 할 수 없어졌나?”

“…….”

“너는 꽤 신중한 녀석이라고 정보에 적혀 있었다만, 아무래도 잘못된 정보였던 모양이구나.”

선량한 인상의 하말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야 당연하다. 신참 악마에게 기습을 당한 것도 굴욕적인데 무시를 당한 거나 진배없었으니까.

‘나를 막는다?’

방금 세한이 했던 말을 곱씹던 하말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말은 그래도 제법 온순한 성격이었다. 태생이 양이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개무시를 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을 무시한다는 건 주인인 이미르를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확실히 혼자였다면 좀 힘들지도 모르겠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나 혼자라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플레이어가 나 하나인가?”

그제야 하말은 자신이 있는 장소가 고위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부산이라는 걸 자각했다.

이미 하말과 신자운의 주변에는 플레이어들이 빽빽이 둘러싸고 있었다.

“오호호호! 양 대가리라 그런가, 눈앞에 있는 것밖에 못 보나보내요!”

당황한 기색이 엿보이는 하말을 향해 신유화가 큰소리로 비웃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곁에 있던 윤현균이 급히 말렸다.

“저…… 유화 씨 그렇다고 도발은 좀.”

“흥, 그럼 약하다고 벌벌 기고 있어요?”

신유화는 눈치가 빨랐다.

분명 자신들은 하말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말의 바로 앞에는 신자운이 있었다. 신자운을 뿌리치고 자신들을 공격하는 건 허점을 노출하는 일이나 마찬가지.

그런 행동을 했다간 하말은 신자운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받을 확률이 높았다.

‘이쪽이 당하더라도 저자를 빨리 쓰러트리는 게 이득이야.’

거기다 신유화는 성녀다.

그녀는 전투에 끼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았다.

신유화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아주 강한 버프 부탁합니다!”

[……내가 널 아바타로 삼은 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익숙한 자신의 신,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 내키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신유화는 그가 자신의 말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파아아아!!

그런 그녀의 생각처럼 붉은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떨어지며 신자운의 몸을 감쌌다.

처음에는 공격인가 싶어 당황했던 신자운이었지만 갑자기 연속해서 떠오르는 알림창에 마음을 놓았다.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물리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마법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물리 공격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

대략 열 줄은 되는 알림창이 주르륵 떠오르는 모습에 신자운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기가 질렸다.

‘……성녀가 대단하다고 듣기는 했다만.’

신격도 얻지 못한 플레이어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마 이 정도 버프를 뿌릴 수 있는 존재일 줄이야.

하기야 이 정도가 되니 안타레스를 상대로 플레이어들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거리라.

“아무튼.”

자운은 갑자기 상승한 능력치를 가늠하기 위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하말을 보았다.

그는 신유화의 도발에 잠시 움찔했었지만, 침착하게 자신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자운에게 막대한 버프가 쏟아지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이젠 우리가 버티는 게 아니라,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봐야겠군.”

천천히 자세를 잡는 신자운은 언제라도 하말을 향해 덤벼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말도 이제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첫 기습을 생각하면…… 정말로 위험한 건 나일지도 모르겠군.’

자운의 첫 공격을 받아내며 그래도 이 정도는 이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운은 거기에 성녀의 버프를 받은 상태.

하말은 버프를 받은 신자운을 상대하며 주변 플레이어들의 공격도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아마 저 플레이어들도 신자운과 비슷한 버프를 받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신자운의 말처럼 위험한 건 이제 자신이다.

“그래, 인정하마. 너희들이 내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플레이어들이라는 걸 말이다.”

“어머, 이제 와서 있는 척하는 것 봐. 진짜 별꼴이야.”

“…….”

하말은 다른 건 몰라도 저 성녀라는 여자만은 반드시 쳐죽이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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