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
262. 퍼블리셔(2)
“다른 플레이어들이 잘해주길 바라야지.”
“가능할까요?”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해온 건데.”
퍼블리셔가 하는 기본적인 침략방식에 대해서는 1회차에서도 언뜻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나나 동료만이 아닌 지구 플레이어들의 전체적인 수준을 계속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던전을 개방시키고, 질 높은 장비를 만들며 포인트를 다량으로 모아 1회차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게.
이미 1회차에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플레이어들보다 지금 길가에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들이 더 강할 정도다.
개개인의 역량 차이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훨씬 상향평준화되었다.
오히려 문제는 주요전력이다.
“린은 깨어났어?”
“아뇨.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두 가지.
반고와의 싸움에서 정신을 잃은 린이 여태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
마계의 열쇠를 얻는 과정에서 내 머릿속에서 소실되어 버린 기억.
‘전자는 시간이 답이지만, 후자는 어떻게 하지 않으면 그대로 배드엔딩 직행이야.’
마왕인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생각하면 분명 엔딩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
배드엔딩 당시 발생하는 일은 그대로 일어나게 된다는 거니까.
‘지구는 멸망하며, 지구에 존재하던 모든 플레이어들은 전 우주로 흩어진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명피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전멸하지 않는 것에서 의의를 둘 수도 있지만, 그런 건 내가 바라는 미래가 아니다.
“……아무튼 아키넨 뒤는 맡길게.”
“예, 계속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직스런 말이었다.
퍼블리셔도 분명 대응을 하려 할 테니, 그것에 대해 잘 아는 아키넨이 나서주면 든든했다.
“세한.”
천천히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던 나를 이드라가 불렀다.
고요하게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작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시선에 피식 웃었다.
광기의 마왕 세계에 다녀온 이후, 이드라는 나를 더더욱 신경 썼다.
이전이라면 툭툭 가벼운 말을 던졌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볼수록 녀석이 점점 더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걱정 마. 그보다 너도 선발대가 오는 거 잘 감시하고 있어.”
“물론이다.”
이미 이드라는 지구 전역에 수십만 대의 옵저버를 뿌려둔 상태였다.
단순히 감시뿐이 아니라, 후에 이용할 일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거도 잘 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 그것뿐이니 말이다.”
내 손에는 한 장의 쪽지가 들려 있었다.
오늘 이드라가 내게 준 쪽지다.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 적혀 있는 쪽지였다.
몇 가지 장소가 적혀있는 쪽지.
여태까지 내가 ‘잊혀진 자’와 함께 다녔던 장소를 정리해 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에 이건 오직 이드라의 기억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었다.
‘그럼 가볼까.’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다.
그렇기에 나는 남은 시간 동안 기억을 찾는 것에 주력할 생각이었다.
“그럼.”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디어사이드 건물을 빠져나왔다.
검은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아오르자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래로 보이는 서울의 모습은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번 반파됐던 서울은 이미 예전의 빌딩 숲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1회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상의 풍경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지나쳐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정말 많이 바뀌었어.’
단순히 서울만이 아니다.
세계 전체가 완벽히 1회차와는 달라졌다.
1회차 때는 이 정도 시간에 차근차근 멸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수준도 보다 낮았으며 희망 따위를 품지도 않았다.
그저 언젠가 멸망하리라,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퍼블리셔와 정면대결을 할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플레이어들은 절망 따위 하지 않았다.
시간은 짧았을지라도 그들은 전부 1회차보다 강해졌다.
‘약해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단 한 명…….’
나는 지금 린을 간호하고 있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루크 테일러.
전투기술은 뛰어나지만 다른 디어사이드 길드원에 비하면 부족하기에 일선에 물러난 상태였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
1회차에서 내게 싸우는 법을 알려줬던 선생님.
한때 인류 최강의 플레이어가 되었던 루크.
모든 플레이어 중, 1회차보다 약해진 플레이어는 아마 루크가 유일할 것이다.
순수한 능력치는 비슷하거나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1회차의 루크는 아스트라이아와 하나가 되었던 플레이어였으니까.
하지만 난 그 점이 오히려 좋았다.
덕분에 그가 죽지 않았으니까.
‘강함이라는 건 결국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거니까.’
설령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살아남으면 된 거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죽으면 쓸모없는 일이다.
“이곳도 오랜만이군.”
탁.
내가 도착한 장소는 굉장히 낯익은 곳이었다.
세계가 게임으로 바뀌기 전, 내가 공부를 하던 대학이었으니까.
“여기가 처음인가.”
이드라가 건네준 쪽지를 살피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녀석이 준 쪽지에는 여러 가지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고, 가장 윗줄에는 이 대학이 있었다.
‘그럼 「잊혀진 자」는 나와 처음부터 함께였군.’
이곳에서 나는 처음 플레이어가 되었으며 게임을 시작했다.
나름 한국에서 캠퍼스가 좋기로 이름난 대학이었지만 이젠 황폐화되어 본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상당히 서울이 복구되었다지만 대학과 같은 교육시설은 재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저기, 당신. 혹시 김세한?”
그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시선을 돌리자 어째서인지 그곳에는 박동권이 서 있었다.
녀석은 내가 돌아보자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며 괜히 말 걸었다는 얼굴이 되었다.
“너 왜 여기 있냐?”
“아, 그게 길드장님이 한동안 여기로 길드를 옮기자고 하셔서요. 괜찮은 건물이 있는지 한번 살펴볼 겸 왔습니다.”
“청주에서?”
“네. 아무래도 곧 결전이 일어나게 될 테니 서울로 플레이어들을 집중시킬 생각인 모양입니다. 흩어져있으면 각개격파를 당할 게 뻔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이 녀석이 말하는 길드장이라면 블루에일의 윤현균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군.’
눈앞의 쓰레기는 둘째치고 윤현균은 이 학교의 학생회장이었다.
그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 학교에서 시작한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지.
결국 그때 내가 예측했던 것처럼 윤현균은 크게 성장해 한국을 대표하는 길드 중 하나의 리더가 되었다.
“근데, 당신은 여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수상쩍은 걸 보는 눈으로 박동권이 나를 보았다.
“찾을 게 있어서.”
“네? 이런 곳에서 찾을 게 있을 리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녀석을 외면하며 나는 캠퍼스를 걸었다.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지만 의외로 건물들은 멀쩡했다.
하긴 당시 습격했던 몬스터들은 기껏해야 고블린들이었으니 멀쩡한 게 당연한가.
‘고블린, 고블린이라.’
1회차에서는 고블린에게도 죽을 뻔했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말 죽을 뻔한 게 맞던가?
애매모호해진 기억에 이것이 내가 잊은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을 억지로 떠올리지 않으며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내가 자주 다니던 길을 지나, 익숙한 건물의 안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컴퓨터가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하고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의외로 컴퓨터들은 부서진 것 하나 없이 멀쩡했다.
거미줄과 먼지만 수북하게 쌓여있을 뿐.
내가 자주 사용하던 컴퓨터 역시 먼지로 덮여 뿌옇게 변해 있었다.
묘한 그리움에 나는 차가운 모니터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정말 오랜만이네.”
학교 다닐 때는 자주 이곳에 와서 게임을 하곤 했었다.
원래 그러라고 있는 컴퓨터는 아니었지만 교수님도 신경 쓰지 않았고, 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보통 이런 컴퓨터들은 전원을 끄는 순간 저장된 정보가 다 날아가곤 했지만, 의외로 그런 것에는 느슨한 건지 이 컴퓨터들은 그런 조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딸칵. 딸칵.
“역시 컴퓨터는 켜지지 않나.”
버튼을 눌러도 컴퓨터는 켜지지 않았다.
전기 자체가 들어오지 않는 게 원인 것 같았다.
“…….”
나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다른 곳을 둘러봐야 할 텐데도 컴퓨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인가.
그것이 아니면…….
딱!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컴퓨터실 내부가 밝아지며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등은 고장 났는지 켜지지 않았지만,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는 의외로 제대로 불이 들어왔다.
기이이잉!
전원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소리가 들리며 컴퓨터가 부팅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는 운영체제가 표시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겉만 보면 게임 같은 건 보이지 않는 깔끔한 바탕화면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찾지 못하게 숨겨뒀기 때문이다.
‘내문서로 들어가 이 폴더를 열면.’
내가 숨겨뒀던 게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 말하기 힘든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래, 잘들 있구나. 세이브 파일도 아주 멀쩡하네.
“응?”
나는 하나하나 게임과 세이브 파일을 살펴보다 이상한 걸 깨달았다.
“나 말고 누가 했었나?”
분명 이곳에서 나는 혼자서 게임을 했었다.
다른 사람과 한 기억은 아무리 뒤져도 없었다. 그런데 세이브 파일 중에서는 분명 내가 하지 않았던 파일들이 남아있었다.
“분명해. 내가 했던 세이브 파일이 아니야.”
내 기억 속에 사라진 건가?
아니다. 그럴 때는 미세한 두통이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이건 정말 나도 모르던 것이다.
세이브 파일이 숨겨져 있던 위치도 평상시 내가 저장하던 장소가 아니었다.
내가 모르게 다른 장소에 폴더를 만들어 숨겨둔 것이었다.
분명 다른 누군가가 내가 했던 게임을 플레이했다.
‘누구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다른 사람은 생각나지 않았다.
잠깐 스쳐 지나간 이들은 있었지만 내 컴퓨터에 깔려 있던 게임을 했을 정도면 나와 잘 아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메모장?’
거기다 세이브 파일이 있던 폴더에는 메모장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열었다.
메모장에는 마치 누군가를 읽는 것을 전제로 한 글이 작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당연히 나였다.
「오빠가 재밌게 해서 한번 해봤어요. 근데 솔직히 전 재밌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게임을 했던 사람은 여성인 모양이었다.
대학 때 나와 알던 여성이 있었나?
「같은 주제로 말해보고 싶었어요. 근데 역시 전 게임은 안 맞나 봐요. 혼자서 열심히 해봤는데 못하겠어요.」
게임을 실행하며 살펴보니 기본적으로 레벨링이 부족했다.
그 외에 장비를 봐도 게임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는 게 느껴졌다.
RPG게임을 많이 해본 적 없는 초보자인 게 확실했다.
「근데 알려달라고 먼저 말하기는 좀 부끄러워서, 이렇게 글만 남겨둘게요.」
메모장은 마치 내가 읽어주기를 바란 것 같은 내용이었다.
물론, 너무 늦게 읽은 것 같지만.
내용은 크게 특별한 점은 없었다.
대부분은 그냥 한탄과도 같은 주저리였다.
매일 게임만 하지 말고 운동도 하라는, 그런 잔소리도 적혀 있었다.
「혹시 오빠가 이 글을 읽으면 내일 이렇게 말해주세요.」
「같이 하자고.」
「함께하면 조금 재밌을지도 모르니까요.」
마지막 말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급하게 작성하다가 멈춘 건지, 아니면 정말 그게 전부였는지는 나는 모른다.
“메모장의 글이 작성된 날짜는…… ‘게임’이 시작되기 이틀 전인가.”
분명 나는 이 메모장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이하자고 말할 수도 없었겠지.
‘이 글을 남긴 사람이 내게 ‘잊혀진 자’라는 것도 분명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사라졌음에도 어째서 이것만 남아 있는 걸까.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눈가가 조금 뜨거워졌다.
물론, 이유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