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260. 마지막 DLC(4)
「───!」
이 세계의 이드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게는 닿지 않았다.
하지만 마왕인 나의 품에 안겨든 그녀의 모습은 나조차 애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득 내 옆에 있는 이드라는 그런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해졌다.
“이드라. 너…….”
지직.
그때,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내 곁에 있는 이드라가 마치 망가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상처럼 흐려졌기 때문이다.
“이드라!”
“소리치지마라. 당연한 일이다. 이 세계의 내가 등장하며 더 이상 우리가 이 세계에 있기 힘들어졌을 뿐이니.”
그러고보니 마왕이 그런 말을 했었다.
여태 눈을 뜨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라고.
“흠.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로구나. 외신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만. 내가 그만큼 인간에 가까워진 건지도 모르겠군.”
이드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심장의 고동을 느끼듯 입을 닫았던 녀석은 천천히 손을 가슴에서 떼며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손바닥의 움직임에 따라 새까만 직사각형의 물체가 나타났다.
바로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
우리의 것이 아닌 이 세계의 것.
“그럼 이제 이것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테지.”
빙글빙글 회전하며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은 마왕의 품에 안겨 있는 ‘이드라’를 향해 날아갔다.
두 명의 나와 이드라. 그 모습은 조금 달랐지만 둘의 관계는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가본 적 없는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마왕은 품에 안았던 ‘이드라’를 떨어트리며 그런 말을 했다.
품에서 멀어진 ‘이드라’는 날아온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받아들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부서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부서진 마계의 하늘이 왜곡되기 시작하며 전혀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 시작했다.
“저건 대체…….”
초조한 얼굴로 사태를 지켜보던 린도 아연해진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금 세계는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길로, 전혀 알 수 없는 무질서한 현실로.
변화하는 하늘의 아래에서 마왕은 린과 대치하고 있는 아자젤을 향해 외쳤다.
“아자젤!”
“네, 마왕님.”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는 그녀를 향해 ‘나’는 씩 웃었다.
지금까지 그를 둘러싼 어둠 따위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모든 번뇌를 떨친 것처럼. 가벼워진 얼굴로.
“신자운에게 전한 것처럼 모두 모였을 테지?”
“물론입니다. 저를 비롯한 7대 악마 전원…….”
“이곳에 모였습니다.”
아자젤의 말이 끝나기 전에 검은 날개의 악마가 답했다.
모든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루시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루시퍼만이 아니다. 마왕의 앞에 7대 악마 모두가 속속히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퍼, 아자젤, 벨제부브. 그리고 신자운과 마라파피야스. 새로운 탐욕의 악마까지.
나타나지 못한 건, 올림포스에 갇혀 있을 질투의 악마뿐이었다.
“좋다.”
‘마왕’은 만족한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드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이제 그는 모든 걸 갖추었다.
“린. 내가 아까 말했었지. 난 이미 너희가 아닌 이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고.”
갑작스런 마왕의 말에 린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워낙 순식간에 넘어가서 물어볼 틈이 없었지만.
“내가 누구에게 했을 것 같나?”
모른다.
그렇게 물어도 린은 마땅히 생각나는 장소가 없었다.
그동안 계속 마계와 싸움을 벌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정면대결까지 온 건 처음이었다.
“이제부터 보여주지.”
마왕은 그렇게 말한 후,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왕관의 힘을 움직였다.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드라’를 바라보며.
“이드라!”
그동안 만나지 못한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시선에는 믿음이 가득했다.
그녀라면 분명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으리라고.
「──.」
그리고 이드라는 그 의도에 답했다.
웃으며 하늘을 향해 뻗은 두 손을 좌우로 벌렸다.
동시에 마왕의 왕관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이드라의 손에 뭉쳤고, 그것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에 닿았다.
이 세계와 외계의 열쇠의 힘이 하나로 뭉쳐지며 이제까지 이룰 수 없었던 기적에 도달했다.
린이 열쇠의 힘을 이용해 마계로 넘어온 것처럼, ‘이드라’는 똑같이 문을 열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거대한 통로.
문의 저편은 지금까지 누구도 도달하지 못하는 장소로 연결되어 있었다.
“퍼, 블리셔.”
린은 알 수 있었다. 문의 저편에 있는 거인왕이 기척을.
수많은 거인들이 존재하는 초상계.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장소에 문을 열었다.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
그것을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해냈다.
“하, 하하하하하!!”
‘나’는 그것을 보며 허리를 젖히며 웃었다.
통로의 저편에서 느껴지는 이미르의 당혹을 느꼈다.
마왕을 거부하는 시스템의 적의를 느꼈다.
그것이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마왕을 린은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린 테일러!”
린뿐이 아니다.
문의 저편에서도, 그리고 마계의 모든 악마도. 그리고 이곳에 모여든 지구의 플레이어들도.
모두가 마왕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중심에서 마왕은, ‘나’는 양팔을 벌렸다.
“지금까지 우리는 적대해 왔지. 마왕으로서, 정의의 여신으로서.”
마왕은 이드라를 잊은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었고.
정의의 여신은 그런 마왕의 손에서 지구를 수호해야만 했다.
30년. 무려 30년 동안 둘은 그렇게 적대하며 살아왔다.
“허나 돌이킬 수 없는 건 아니다.”
마왕의 손이 하늘을 가리켰다.
열려 있는 문의 저편, 퍼블리셔가 있는 장소로.
“나는 지금부터 퍼블리셔에 갈 것이다. 이 문이 유지될 수 있는 건 고작 두 시간. 나의 모든 힘을 쏟은 것이기에 두 번은 열 수 없다. 너도 알 테지. 퍼블리셔로 통하는 문을 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해냈다.
기나긴 인내의 시간 속에서, 광기라는 이름의 고통을 씹으며.
“이건 거래다.”
그의 말이 린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그런 강을 통째로 지워버린 수준이었다.
잠시 손을 잡고, 함께 퍼블리셔를 쓰러트리자는 거래.
마왕은 여신의 적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거인왕은 반드시 쓰러트려야만 적이었다.
“나와 함께하겠는가? 린.”
마왕은 린 테일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분명 정의의 여신이라면 거절했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길 수 있나요?”
“그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씩 웃는 마왕의 말에 린은 어설프게 웃었다.
그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건 없었다. 퍼블리셔로 쳐들어가는 짓은 그만큼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의의 여신이 아닌, 인간 린 테일러는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어쩌면 기다려온 건지도 모른다.
이 세계가 게임이 되어버린 순간부터, 다시 본래의 삶은 되찾을 기회를.
광기의 마왕, 그런 엔딩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맡길게요.”
린은 그렇게 말하며 마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것은 거절이 아니다. 오히려 무언의 승낙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플레이어들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돌아섰을 뿐이다.
‘이런 말을 한 게 얼마 만이지?’
린은 돌아서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맡긴다. 정의의 여신이 된 이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자신이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
어린아이였던 린 테일러가 했을 법한 말이다.
“귀염성 없는 녀석.”
마왕은 그런 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곤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다.
“나의 준비는 이걸로 끝났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냐?”
“그건 모르지.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내 말에 마왕은 가볍게 웃었다.
“본래 미래란 알 수 없는 거지. 그걸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
이제부터 마왕은 퍼블리셔와 마지막 승부를 벌이게 될 것이다.
모든 건 이 단 한 번의 승부수를 띄우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으니까.
최후가 될지 모를 분기점.
나와 그는 지금 같은 곳에 서 있었다.
“김세한.”
그는 아까 내가 ‘누군가’에게 건넸던 도끼를 내밀었다.
왕관과, 이 세계의 이드라의 힘이 도끼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기억을 되찾으며 그가 말한 것처럼 모든 걸 이 도끼에 모든 걸 쑤셔 박은 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전하는 내 마지막 DLC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누군가가 사용하던 무기. 마왕인 내가 지녔던 열쇠의 힘과 외신의 힘이 담겨 있는 도끼.
분명 시스템이 이 물건을 분류한다면 ‘버그’가 될 만한 그런 것이었다.
“이제부터 너와 나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겠지. 이렇게 대화를 할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뭐? 아, 이건…….”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몸이 흐릿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다. 내 옆에 있던 이드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도다.”
“그런 것 같군.”
이드라의 말에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마. 이드라, 이 녀석은 말하지 않겠지만 나는 언제나 네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어?”
갑작스런 그의 말에 이드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더불어 나는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괜한 말은 하지 말고.”
“나는 이런 성격이라 잘 표현을 하지 않는다만. 마음속으로는 꽤 담아두지. 어느 정도인지는 이곳에서 봐도 알 거다. 네가 사라지면 멘탈 관리도 안 되거든.”
“…….”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나는 그저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슬그머니 나를 올려보는 이드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마왕은 그런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크크크. 그래도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군. 고작 내가 만든 DLC만으로 이곳까지 도달한 녀석이니까.”
그가 말할수록, 우리의 몸은 점점 흐릿해졌다.
우리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녀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 그리고 하나 힌트를 주마.”
마치 등 뒤에서 강한 중력이 잡아당기는 것처럼 등 뒤에서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애써 버티며 마왕을,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잊어버린 녀석은 꽤 집착이 심해. 그러니 절대 걱정할 필요 없다.”
그의 시선은 내가 쥔 도끼로 향했다.
녀석이 전해준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최후의 DLC에.
“언제나 너의 가장 가까운 곁에 있을 테니까.”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부서진 세계도, 퍼블리셔로 향하는 문이 열린 장소도.
순식간에 멀어지며 나의 몸은 정반대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단지 거리상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을, 공간을.
그리고 차원을 건너뛰며 이곳이 아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다.
트루엔딩, 광기의 마왕이 아닌.
배드엔딩, 흩어진 세계로.
그렇게 나는 돌아왔다.
***
“크으윽!!”
마치 빠르게 회전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되찾고 눈을 뜨자 보인 건 익숙한 신전의 모습이었다.
처음 우리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들어왔던 몽상의 신전이 눈앞에 있었다.
광기의 마왕 세계와는 달리 멀쩡한 신전의 모습에 나는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돌아왔다…….”
그곳에 있던 일이 마치 꿈결과 같았다.
녀석이 전해준 모든 말. 그리고 최후의 싸움을 벌이러 가는 마왕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가장 가까운 곁이라.”
나는 녀석이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손에 쥔 도끼로 시선이 향했다.
녀석이 내게 전한 마지막 DLC이자 내가 잊어버린 누가 사용하던 무기.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어.’
떠오르는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전처럼 초조하지는 않았다.
“이제 어쩔 생각인 게냐?”
흐트러진 옷을 정돈한 이드라가 차분히 말했다.
녀석은 녀석대로 상기된 얼굴이었다. 마지막에 마왕인 내가 했던 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면 괜히 부끄러워졌다.
“하던 그대로 해야지. 이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건 그렇구나.”
하지만 이젠 전처럼 막연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나’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