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59화 (259/332)

# 259

259. 마지막 DLC(3)

‘내가 잊은 사람.’

대체 누구일까.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마왕인 나를 구했다.

그 정도로 그는, 혹은 그녀는 내게 중요한 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그 심정을 알 것 같군.’

지금 내가 멀쩡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오류가 남지 않았고, 이드라가 바로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마왕이 미친 것도 이미르와 한번 싸운 이후였으니까.

“OO는 단 한순간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 곁에서 나와 함께 있어줬어.”

광기에 미쳐 날뛸 때도, 고통을 함께 감내하며 마왕의 곁에 남았다.

잊어버린 무언가에 한탄하며 눈물을 흘릴 때도 안아주고 보듬어줬다.

다행히, 그런 누군가의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덕분에 나는 조금씩 의식을 찾을 수 있었다.”

정신을 지배하던 광기의 암막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광기에 잠식되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어.”

처음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의식을 되찾고, 광기의 마왕인 아닌 ‘김세한’으로서 있을 수 있는 그 짧은 시간만으로 마왕은 새로운 길을 찾아낼 방법을 고민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이 세계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서 나는 하나의 가설을 추론했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2회차를 겪은 그는 고민했다.

조금씩 일어난 오차. 엇갈림.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는 분기점.

그것을 만족시킬 방법을 찾았다.

“요컨대 시간이었다. 그리고 부족한 힘을 채울 필요도 있었지.”

“그래서 만든 게 DLC라는 건가?”

“그렇다. 게이머인 ‘나’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

싱글 게임을 즐겨 했던 게이머라면 결코 모를 일 없는 명칭.

DLC라는 명칭으로 마왕은 나를 도울 수 있는 것들을 여러 가지 마련했다.

내가 시간을 지체할 만한 일을 제거하고, 최적의 루트로 만들어줄 수 있는 물건들을 DLC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딱 필요한 물건이 DLC로 타이밍에 맞게 나타나곤 했었던 것이다.

“뭐, 혹시 몰라 여러 가지를 만들었지만 내가 사용할 만한 건 대략 꿰고 있었어. 대부분은 미끼 상품이다. 네가 의심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거지. 알다시피 ‘나’는 의심이 많거든.”

“확실히……. 하지만 어떻게 그런 걸 만들 수 있었던 거지?”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게는 너와 달리 ‘열쇠’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마계의 열쇠는 이미르나 린이 가진 반으로 쪼개진 것과는 다르다.

온전한 하나. 완벽한 열쇠의 힘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제정신으로 있는 시간 동안 틈틈이 만들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지.”

민수아는 말했다.

마계가 마지막으로 지구에 침략했던 건 20년 전.

마왕은 그동안 두문불출하면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이 세간의 인식이라고.

그 20년 간 나는,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순간을 위해서.

“내가 했던 것보다 빠르게, 메인 퀘스트를 돌파할 수 있게. OO과 재회하고 그녀를 이끌어줄 수 있게. 그리고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좀 더 발전시키고 내가 얻지 못했던 것들을 얻을 수 있도록.”

DLC 덕분에 확실히 나는 많은 걸 생략할 수 있었다.

그 생략된 것들은 녀석과 다른 2회차로 향하는 길을 조금씩 만들었고, 그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

“예상대로 ‘OO’은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얻었지. 그리고 잊혀졌다.”

“그게 네가 원한 건가? 너를 평생 돌봐줬던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이런 길로 가게 유도했다고?”

그래, 이 상황은 모두 녀석의 의도했던 대로다.

마왕은 나였기에 내가 어찌하려는 걸 훤히 알 수 있었다.

나라면 분명 이렇게 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녀석의 의도대로 나는 결국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것에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했어야 한다는 건 납득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가슴속이 부글거리는 게 느껴졌다.

말하자면 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희생이 아니다.”

녀석은 담담한 어조로 나의 분노를 받아쳤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너는 엔딩을 뭐라고 생각하지?”

“엔딩? 그건…….”

“단순한 결말,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것도 아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스크린에서는 여태까지 마왕인 내가 했던 일들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영상은 한 바퀴를 회전하더니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마치 막대 그래프처럼 선이 쭉쭉 그어진 그림으로.

“너라면 알 거다 간혹 게임 중에는 선택지에 갈라지는 ‘루트’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우리는 분기점을 통해 루트가 갈라졌다고 보면 된다.”

“그게 뭐가 어쨌다고? 그건 당연한 거잖아.”

“맞다. 당연한 거지. 이게 게임이라면 말이야.”

“……!!”

그제야 나는 녀석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야.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 거지. 너는 거기에 등장인물로서 아직 남아있다. 벗어나지 못했어. 이 루트라는 건 시간이 만들어진 진정한 평행우주 같은 게 아니다. 단지 시스템이 그렇게 구분했을 뿐인 전혀 다른 세계. 시스템으로 인해 일그러진 세계일 뿐이야.”

“그건…….”

“현실에 루트 같은 건 없다. 이 세상에 엔딩은 존재하지 않아!”

마왕의 말에 나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까지 엔딩에 집착했다.

이 세계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돌리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애초에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마왕은 천천히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너도, 그리고 나도. 시스템이 정한 엔딩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내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은 천천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그 무언가를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개발자 메시지와 함께 들어있던 손도끼.

“역시 나군. 이해가 빨라.”

“이 도끼는 내가 잊은 자가 지닌 물건이냐?”

“정답이다. 본래는 완성시켜 보내고 싶었지만 무리였지.”

녀석은 내가 내민 손도끼를 받아들며 천천히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건넸다.

물론 나는 볼 수 없었지만 공중에 떠오르는 도끼의 모습에 내가 볼 수 없는 누군가가 도끼를 건네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완성시키기엔 내 힘이 부족했으니까. 열쇠의 힘만이 아닌, 법칙을 깰 수 있는 힘. 이 우주에 속하지 않은 존재가 지닌 권능이 필요했다.”

“……외신의 힘.”

“그래.”

마왕은 씩 웃었다.

그리곤 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녀석은 눈을 뜰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린 테일러가 마계로 진입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드라가 내 옷깃을 당기며 말했다.

녀석의 눈에 담겨 있는 걱정이 훤히 보였다.

지금 마왕인 내가 한 말에 충격을 받은 건 아닌지 걱정하는 모습이다.

혹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르지.

이 일은 이드라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들이었으니까.

“딱 맞게 왔군.”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반경 수 미터 내에 둥근 막이 생겨나며 우리를 감쌌다.

콰콰콰콰콰콰!!!

황금색 빛이 마왕성을 부수며 떨어졌다.

무너져내리는 파편들 속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정의의 여신, 린 테일러.

“지금 당신,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죠!”

“멋대로 온 것치고는 꽤나 당돌한 질문이로구나, 린.”

“먼저 당신이 우리의 것을……!”

마왕이 만들어낸 결계를 부수지 못한 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 착지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나와 그리고 곁에 있는 이드라를 발견하고는 점차 작아졌다.

“아저씨가 둘? 아니, 그보다 옆에 있는 건…….”

“잊혀진 자다. 너도 볼 수 있겠지, 나는 아직 보지 않았다만.”

“그게, 아니.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흥.”

딱!

마왕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하늘에 새까만 구멍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며 무수한 악마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큭!”

린은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하는 악마들의 모습에 주춤거리며 물러섰고,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무수한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하긴 했지만 그녀 역시 혼자서 이곳에 떨어진 건 아니었다.

마왕성 상공에 문을 열고 플레이어들과 함께 습격한 것이리라.

‘수천? 아니, 최소 수만 명은 있어.’

마치 마왕이 이런 수를 쓸 거라는 걸 예상한 것처럼 오만의 영역 전역에서 플레이어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왕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하늘에 문을 열고 마계 전역의 악마들을 불러들였다.

“……다시 전쟁을 벌일 셈입니까.”

“먼저 온 건 그쪽이다만.”

“저희의 물건을 먼저 가져간 건 당신이잖아요! 거기다 그 물건을 다룰 수 있는…… 윽!”

린은 이드라를 바라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강렬한 두통을 느끼는 것처럼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리곤 애써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네요. 광기가 전혀 보이지 않아요.”

“조금 나아지긴 했지.”

마왕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쩐지 역시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여전히 미쳐 있지 않다면 이런 일을 벌이시지 않았겠죠. 마치 저희에게 쫓아와달라는 것처럼 선전포고하고. 이렇게 미리 병력을 준비시켜둔 것을 보면 말이에요.”

“선전포고라면 너희가 아니라 다른 녀석들에게 했는데.”

“……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아연하게 묻는 린의 모습에 마왕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천천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을 전하려는 것처럼.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게 무엇인지 지금의 너라면 알 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이기도 하지. 허나 너는 너무 빨리 달려온 탓에 준비가 다 되지 않았어.”

알고 있다.

지금의 나는 한 걸음이 부족했다.

“그 부족한 걸음을 지금부터 내가 채워주마.”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눈동자는 내가 아닌,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향했다.

걱정스런 얼굴로 나와 마왕을 바라보는 이드라에게.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크크.”

마왕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둡게 잠겨 있던 눈동자에서 빛이 돌아오며 습기가 맺혔다.

“크크크, 그래. 너를 잊고 있었구나.”

그 얼굴은 린과 달리 조금도 찌푸려지지 않았다.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드라를 보자마자 웃었다.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텐데도.

“……이드라.”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이드라, 이드라. 그래, 이드라였어. 크흐흐흐, 이걸 잊었다니. 김세한, 이 멍청한 새끼.”

마왕은 손을 뻗었다.

그건 내 곁에 있는 이드라를 향한 게 아니었다.

하늘, 악마들이 쏟아지는 구멍이 뚫려 있는 하늘을 향해.

잿빛의 하늘을 손에 쥐는 것처럼 손바닥을 펼치며 천천히 그러쥐었다.

‘부서진다.’

나는 느꼈다.

세계가 부서진다는 걸.

시스템이 구축한, 이 세계가.

콰직, 콰지지직!

단순히 공간이 열리는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게 갈라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칫!!”

그때, 이변을 눈치챈 린이 덤벼드는 게 느꼈다.

하늘을 향해 무방비하게 손을 뻗고 있는 마왕을 향해서.

‘막아야 해!’

나는 황급히 그런 린을 막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보다 빠르게 누군가가 그 사이를 끼어들었다.

백색의 악마.

나태의 아자젤이.

카아아앙!!

“아자젤!”

“안녕, 여신님.”

비명처럼 외치는 린의 말에 아자젤은 싱긋 웃으며 공격을 받아냈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가요!”

“그건 마왕님만이 아시겠지.”

“크윽!”

린은 자신을 막아선 아자젤을 노려본 후,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내게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려 달라는 것처럼,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제대로 답변해 주기 어렵다.

이걸 뭐라고 할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그런 린을 바라보다 차분히 입술을 뗐다.

“너라면 분명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제가? 아니, 잠깐. 설마…….”

내 말에 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린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갈라진 하늘에서 점차 작은 빛의 조각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몽환적으로 변한 세계 속에서 작은 희열이 담겨 있는 마왕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나의 신. 나의 아바타.”

마왕은 부서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으로 세상을 그러쥐며.

그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갈라진 세계의 틈이 점점 커졌다.

이윽고 그것이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한 순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콰차아앙!!

무수한 세계의 파편이 부서져 떨어졌다.

마치 별빛처럼. 시스템이 만들어낸 법칙의 파편들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여성이 손을 뻗는 게 보였다.

그것은 밝은 금발에, 검고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

꿈의 마녀.

이 세계의 이드라가 마왕인 ‘나’의 품에 안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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