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255. 다시 마계로(2)
“귀찮은 녀석들 또 이 도시에 오다니!”
색욕의 악마와 계약한 플레이어, 크리스 브라이트는 치밀어오른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벌써 이번 주에만 세 번의 습격이었다. 짜증이 나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했다.
‘저 또라이 새끼!’
크리스는 이를 바드득 갈며 무리의 맨 뒤에 있는 뱀 같은 인상의 사내를 보았다.
독사 마르갈.
악마의 계약자들이 마계로 생활의 터전을 옮기게 되며 잦은 싸움이 일어났는데, 그때 두각을 나타냈던 플레이어다.
“이제 그면 내 것이 되면 어때? 크리스. 튕기는 것도 정도건 해야지. 너무 심하면 재미없어.”
“까불지마, 잡것 주제에.”
“후후, 7대 악마의 계약자라고 해도 네가 가진 전승 스킬은 대단할 것 없지. 매혹에 면역만 된다면 네 힘은 무용지물.”
마르갈은 크리스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는 마계로 넘어오며 분노의 악마에게 붙은 동생을 위해 대부분의 힘을 넘겼다.
그녀의 동생은 분노와 색욕의 동맹 관계를 위한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비교적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크리스는 추종자가 많아 안전지대에 있었기에, 힘을 넘겨도 괜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리스는 7대 악마의 계약자 중 한명으로서 분노의 영역에 머물렀고, 두 대악마의 동맹관계를 상징하는 친선대사와 같은 위치가 되었다.
반면 크리스는 아니었다.
악마들은 마라 파피야스를 두려워하여 건드리지 않았지만 플레이어들은 아니었다.
마라 파피야스의 위치상 악마들이 해코지하는 게 아닌 이상 플레이어들간의 싸움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르갈은 대놓고 크리스에게 싸움을 걸었다.
이러나저러나 지닌 바 능력과 외모, 그리고 강력한 매혹능력을 지닌 전승스킬만으로 크리스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내로 삼기에 딱 좋아.’
무력은 강하지 않으며 세력은 크다.
이보다 좋은 먹이가 어디 있겠는가. 마르갈과 계약한 악마는 급이 높지 않은 악마였다.
그렇기에 마라 파피야스가 더더욱 나서기 힘들었다.
급이 떨어지는 상대로 진심을 낼 수는 없으니.
덕분에 매번 조금씩 귀찮게 시비를 걸어왔고 크리스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시리스에게 걱정을 끼치기는 싫은데.’
동생에게 연락을 한다면 저런 버러지 따위는 금방 치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혹여나 동생이 괜한 걱정을 할 것 같았으니까.
뭣보다 7대 악마의 계약자로서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저런 뱀 같은 놈에게 굴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제 슬슬 지쳤잖아. 그만 내게 오라고. 섭섭지 않게 대해줄 테니.”
“닥쳐. 키도 좆만 한 게.”
키라는 말에 마르갈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신장이 작은 그에게 신장과 관계된 말은 역린이었다.
“……네년이 아무래도 상황파악을 못하는 모양이야. 오늘은 한번 손을 봐줘야겠어.”
“칫.”
또 이렇게 되나. 크리스는 이를 악물며 주변에 눈짓했다.
계속된 싸움에 크리스를 따르는 계약자와 하수인들도 피로가 역력했다.
‘어차피 끝장을 봐야 하는 일이었어.’
기껏해야 죽는 거다. 죽어도 살아나는 특성을 놈도 알고 있으니 시체째로 납치당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건 둘째. 우선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비장한 얼굴을 한 크리스를 즐겁게 바라보며 서 있던 마르갈이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자, 크리스 브라이트를 당장 잡…… 꾸엑!!”
콰콰쾅!!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마르갈의 얼굴이 뭉개지며 폭음이 일었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며 마르갈의 얼굴을 짓밟은 것이다.
“커, 커어억! 어, 어떤 새끼야!”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마르갈은 눈이 어질어질했다.
덕분에 자신의 머리가 누군가에게 밟혀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다, 당장 그 발을 치워라. 네가 지금 누구에게……!”
“꽤 달라졌군, 크리스 브라이트. 마흔도 넘었으니 당연한가?”
계약자들의 경우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평생 종속된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경우에 따라선 나이를 먹지 않는다.
말하자면 평생 노예의 신분.
그렇다 해도 악마마다 대우는 달랐지만, 마라 파피야스의 경우 아름다운 크리스나 시리스를 아꼈기에 나이를 먹게 둘 리가 없었다.
반면 세한의 발에 밟혀 있는 마르갈은 상당히 나이가 있었다.
족히 30대는 넘는 걸 보면 그다지 급이 높은 악마의 계약자는 아닌 것 같았다.
“누, 누구?”
“거참 기껏 30년 후로 왔는데 아는 얼굴들이 다들 젊으니 좀 김이 새네.”
“그러니까 누군데…….”
크리스는 마르갈의 머리를 밟은 채 태연히 입을 여는 사내를 보았다.
익숙한 분위기였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 우선 이놈들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이이, 이 새끼가 그만 떠들고 당장 머리에 발을 떼지 못해?”
“얘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세한은 발에 밟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악을 쓰며 욕설을 내뱉는 마르갈이 황당할 뿐이었다.
“난 악마는 안 봐준다.”
“뭣……!”
콰지직!!
마르갈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세한이 머리를 밟은 다리에 힘을 줘 간단히 파괴시켰기 때문이다.
“다, 당장 저놈을 죽여라!”
“잔챙이는 꺼져라.”
딱!
마르갈의 머리가 파괴되자 그 부하들은 재빨리 세한을 둘러싸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작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세한의 손가락이 튕기며 평평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이 원뿔모양의 창으로 변하며 수십 명의 계약자와 하수인의 심장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아, 아아.”
수십 명에 이르는 마르갈의 부하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최소상위 악마급 힘이야.’
크리스는 상대의 힘을 가늠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든 힘을 시리스에게 넘긴 그녀로선 결코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인 게 분명했다.
“자, 크리스.”
사내는 상황이 정리되자 크리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
그가 걸어올수록 크리스의 몸은 덜덜 떨렸다.
“나를 기억하나?”
지척까지 다가온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번 쓸었다.
그러자 조금 날카로운 인상을 한 남자의 얼굴이 단번에 변화했다.
크리스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로.
“마, 마왕.”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는 하얀 거품을 물며 뒤로 쓰러졌다.
***
나와 이드라는 쓰러진 녀석을 대충 끌고 크리스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다른 악마의 계약자들은 우두머리인 크리스가 내 손에 잡혀 있음에도 눈치만 살필 뿐 덤벼들지 않았고 얌전히 저택까지 안내했다.
마치 산 재물을 넘기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허억!!”
대략 한 시간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크리스의 눈이 떠졌다.
녀석은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휙휙 살폈고, 나를 발견하자마자 흐리멍텅한 눈이되었다.
“마, 마왕님, 저는 아무 잘못도 안 한 모범 납세자인데요.”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떠는 크리스의 모습은 이곳의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얘가 이렇게 덜덜 떨까.
“나 마왕 아닌데.”
“……네?”
“뭐, 말하자면 좀 복잡하다만 난 마왕이 아니야. 김세한인 건 맞다만.”
“그, 그게 무슨 소리인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크리스에게 나는 대충 어깨를 으쓱였다.
“됐고. 요즘 마계상황이 어떤지 말해봐.”
“네? 그건 마왕님이 저보다 더 잘…….”
“씁!”
“네, 넵.”
기가 죽은 크리스는 현재 마계의 정세에 대해 주절주절 털어놨다.
새로운 7대 악마들이 뽑혔으며, 상위의 3대 악마는 그대로라는 것.
신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노의 악마가 색욕의 악마를 재치고 4위까지 올라갔다는 이야기에 나는 내심 감탄했다.
‘햐, 30년 만에 7대 악마 서열 4위? 신자운도 보통 놈은 아니네.’
기존부터 7대 악마에 있었던 마라 파피야스는 5위인 모양이다. 그 아래는 실종된 질투의 악마와 새로운 탐욕의 악마가 차지했다.
“마왕성은 어디지?”
“당연히 오만의 영역에 있는데요.”
그런 걸 왜 묻지? 라는 얼굴에 내가 팍 인상을 찡그리자 크리스는 다시 기가 죽었다.
미국에서 일 때문에 봐주고는 있지만 크리스도 엄연히 내게 한번 덤볐던 녀석인지라 상냥하게 대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아자젤 님과 신자운 님은 결혼을 했는데요…….”
“뭐? 누가? 아자젤이?”
“그게 결혼을…….”
나는 할말을 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자젤이 결혼을? 그것도 신자운과?
‘허, 신자운 이거 미친놈인가.’
진작 알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됐을 줄은 몰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자젤이!
일반적인 감성과는 동떨어진 나태의 악마가 결혼을?
새삼 세한은 신자운이라는 남자를 자신이 과소평가 했음을 깨달았다.
그 쾌락주의자 또라이 여자와 정말로 결혼을 할 줄이야.
아니 결혼 같은 인간의 풍습에 어울려준 아자젤을 놀랍다고 해야 되나.
“뭐, 좋아. 그래. 그런 건 나중에 듣고. 마왕성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데? 아, 물론 마왕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그건 불가능합니다.”
크리스는 단번에 대답했다.
“그곳은 마계에서도 위험지대라 오만의 악마, 루시퍼가 감시하고 있어요. 거기다 나태와 분노의 영역이 그 주변에 퍼져 함부로 다른 악마들이나 마족들이 다가오는 걸 막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은 못 들어간다?”
“최소 분노와 나태의 악마의 동의가 필요해요.”
즉, 먼저 둘을 만나야 한다는 건가.
“분노의 영역은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되지?”
만만한 건 당연히 신자운이다.
먼저 녀석을 만난다면 아자젤과도 수월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을 한 사이라면 말이다.
‘그래도 서로의 영역이 있으니 따로 살지 않을까.’
내 말에 크리스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설마 두 분을 만나실 생각인가요?”
“뭐가 잘못됐나?”
“아, 아뇨! 마왕님이 하시는 일에 잘못된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 그저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해서.”
“타이밍?”
내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크리스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마침 두 분이 지금 분노의 영역에 함께 계시거든요.”
“평소엔 따로 있나 보지?”
“아무래도 서로의 영역을 관리해야 해서…….”
역시 내 예상대로군.
“그래서 지금은 왜 같이 있는데?”
“그건…….”
크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두 분의 아이가 100일이라 축제가 열리거든요.”
한마디로 돌잔치가 열린다는 이야기다.
***
나는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다 이드라에게 조용히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악마들도 돌잔치를 하냐?”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아마 신자운이 주도한 게 아닌가 싶구나.”
진짜 또라이인가.
나는 신자운의 감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도, 아니 애초에 지구도 아닌 마계에서 돌잔치라니.
“그래도 덕분에 쉽게 일이 진행돼서 좋긴 하다만.”
달라진 마계를 무작정 탐색해서 이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함부로 분노의 영역이나 나태의 영역에 침범할 수도 없었다.
만약 아자젤이 적대해 오기라도 하면 약해진 내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신자운까지는 어떻게 될 것 같기는 한데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되도록 합법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역시 썩어도 7대 악마의 계약자.’
나는 크리스를 만난 행운에 감사했다.
크리스는 그 뱀같이 생긴 찐따 때문에 신자운의 초대를 받았음에도 자신의 영토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크리스는 내가 마르갈을 처치해 준 보답으로 돌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힘을 써줬다.
동생인 시리스가 분노의 영역에서 상당한 직책을 가져서 일은 아주 수월하게 진행됐다.
“그나저나 마계의 마차는 드럽게 빠르네.”
“일반적인 말이 아니라 마수니까.”
돌잔치 초대장을 받는데 성공한 우리는 크리스의 일행에 껴서 분노의 영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수가 이끄는 마차인 탓에 속도는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애초에 지면도 아니라 하늘을 날아가는 마차라 조금 재밌었다.
그건 이드라도 마찬가지인지, 계속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근데 나는 초대장을 받지 않았는데 괜찮겠느냐?”
“그렇다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네 초대장을 받을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구나.”
이드라는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자신을 인지 못 하는 주변의 상황이 신경 쓰이는 건지도 모른다.
“앞으로 10분 후 도착합니다!”
그때, 마차 밖에서 마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이드라는 점차 가까워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악마 서열 4위.
분노의 악마 신자운이 지배하는 도시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