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254. 다시 마계로(1)
「기억하지? VIP실 문은 30분 후에 열릴 거야.」
이드라와 헤어지기 전, 세한은 그렇게 말했다.
민수아를 통해들었던 정보였고, 그것을 통해 세한은 여러 가지의 계획을 짜뒀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세한은 린을 뿌리치고 정상에 있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탈취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고 그때를 대비한 계획도 분명 있었다.
「내 생각에는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중요한 건 너다.」
세한은 일이 결코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린이다.
민수아나 다른 디어사이드 길드원들도 30년이 흘렀으니 세한이 수월하게 뿌리치기 힘들 확률이 컸다. 그러니 수가 틀어지면 세한은 옥상으로 향하는 척을 하며 철저하게 미끼의 역할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탈취하는가.
“으그그그.”
천장을 몇 개나 부수며 떨어진 여성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하필 떨어진 장소가 VIP실의 문이 있던 장소였던 터라 사방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문이 열린다기보다는 부서져 버렸구나.’
세한의 말처럼 VIP실의 문이 열리긴 했다.
민아가 천장을 부수며 떨어진 탓에 문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기 때문이다.
“흠. 그나저나 요 계집애는 왜 나이를 안 먹은 게지?”
이드라는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민아를 코앞에서 바라보았다.
상당히 눈에 띄는 행동이었지만 민아는 그런 이드라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드라는 이 세계의 인간들의 기억에서 완벽히 잊힌 상태였으니까.
마계의 열쇠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이드라가 무슨 짓을 해도 인식할 수 없었다.
그건 민아도 마찬가지다.
분명 강해진 그녀였지만 외신의 영역에 이르진 못했다.
민아의 힘이 바탕이 되는 로키가 최상급 신이니 그 이상의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합신한 경우라면 본인이 노력하여 신격을 높이는 게 가능했지만 민아는 그런 케이스가 아니었다.
고로 민아는 눈앞의 이드라를 보는 건 물론, 인식도 할 수 없었다.
“아으, 아파라. 아무튼 빨리 그 수상한 남자를 쫓아가야지.”
15층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비교적 멀쩡한 민아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건 안 되지. 잠시 실례하도록 하마.”
이드라는 일어나는 민아의 이마에 검지를 가볍게 댔다.
하얀 이마를 중심으로 파문이 일며 민아의 전신으로 이드라의 신격이 퍼졌다.
“응? 어라? 뭔가 이상한 기분이…….”
그렇게 중얼거린 민아의 몸이 발라당 뒤로 넘어졌다.
이드라는 그런 민아를 잠시 바라보며 그녀의 상태를 체크했다.
“쿨, 쿨.”
‘제대로 잠들었군.’
꿈의 마녀라는 이명을 가진 것처럼 다른 생명체를 잠재우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심지어 이드라를 인식도 못하니 민아는 저항조차 못했다.
“어디보자, 이건가? 오오, 그래 이게 맞구나.”
이드라는 민아의 품을 뒤적여 디어사이드 간부들이 가지고 다니는 신분증을 꺼냈다.
VIP패스증과 같은 것으로 이것만 있다면 길드타워에 있는 모든 시설이 이용 가능하다고 민수아가 말했다.
민수아의 것은 회의실을 이용할 때 필요했고, 린이 체크할 게 분명하기에 세한이나 이드라에게 줄 수 없었다. 그러니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선 패스증이 필요했고, 그것을 얻어낼 대상으로 민아를 선택했다.
세한이라면 정확하게 이드라가 있던 장소로 민아를 떨어트릴 수 있을 테니까.
“흠흠흠~!”
유유히 민아의 패스증을 얻은 이드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서진 VIP실을 빠져나왔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길드타워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다른 사원들이나 플레이어들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탔을 뿐이다.
누구도 이드라를 인식할 수 없으니 막을 자도 없었다.
‘잘 싸우고 있구나.’
린과 쫓고 쫓기는 싸움을 하는 세한이 있는 방향을 보며 이드라는 민아의 패스증을 이용해 타워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중간중간 세한이 이드라의 위치를 확인하며 최대한 린을 엘리베이터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리고 이드라가 정상에 도착했을 때, 의도적으로 린의 강한 공격을 얻어맞아 건물 밖으로 날아갔다.
이제부터 이드라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만지게 되면 상당한 힘이 방출될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 티가 나지 않도록 하겠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린이 알아차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세한은 자신을 미끼로 린은 타워 밖으로 유도한 것이다.
마침 디어사이드 길드타워에는 민아가 설치한 공간마저도 왜곡시키는 강한 결계가 쳐져 있었다.
그 탓에 타워와 타워 밖은 완벽하게 괴리되어 있었고, 이드라의 힘은 세한을 쫓아 건물 밖으로 나간 린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다음은 간단했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어디에 있는지 이드라는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정상에 도착한 이드라는 수많은 물건이 보관되어 있는 디어사이드의 보물고에서 천천히 손을 올렸다.
탁!
그러자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던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손에 날아와 잡혔다.
막강한 힘이 느껴지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에 이드라는 옅게 웃으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자, 이제 그대도 슬슬 준비를 하도록 해라.”
네모난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공중에 떠오르며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새까만 둥근 띠가 서너 겹으로 정사각형의 물체를 감싸며 하늘을 향해 새까만 빛을 쏘았다.
바로, 마계로 가는 문을 열기 위해서.
‘만약 이드라가 아니라면 들켰을 거야.’
세한은 하늘을 바라보는 린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민수아는 말했다.
린이라면 이드라를 볼 수 있다고. 만약 본다면 세한이 가진 힘은 물론 이드라의 기척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반대로 말하면 이드라를 못 본다면 그녀의 기척도, 힘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한은 이드라와 별개로 움직였다. 이드라는 이드라대로 린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며 힘의 사용을 억제했다.
이드라가 힘을 사용한 건 민아를 재울 때뿐이었고, 그것조차 아주 미약한 힘을 사용했기에 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눈에 보이는 것만 쫓으면 안 되지.”
“다, 당신……!”
세한의 말에 린은 휙 세한을 향해 등을 돌렸다,
아무리 린이라고 해도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에 열린 문을 바로 닫는 건 무리였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다. 일이 바빠서 더 대화를 못해서 아쉽네.”
“누가 보내줄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응.”
세한의 등 뒤에 검은 공간이 열렸다.
린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문을 통해 세한은 저 하늘에 열린 검은 구멍이 있는 장소로 근처까지 이동하려는 것이라고.
문이 열린 장소가 길드타워 내부였다면 무리였겠지만, 그 상공이라면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큭!!”
등 뒤에 열린 허수공간에 들어가려는 세한을 향해 린은 황급히 검을 뻗었다.
그 속도는 가히 빛살과 같았지만,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한 세한의 말이 한발 빨랐다.
“백설아!”
“……!”
세한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공간이 열리며 꽤나 발랄한 복장을 입고 있는 백설이가 코앞에서 뚝 떨어졌다. 복장을 보면 마계에 있던 건 아니고 서울 어딘가에서 놀고 있었던 모양이다.
30년이 흐른 후의 백설이는 20대 초반 정도의 외모를 지닌 성숙한 여성으로 성장해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어쨌든 세한과 백설이는 팻과 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은 분기점으로 이동한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걸 이미 확인해 둔 상태였다.
마왕인 세한과, 그렇지 않은 세한을 모두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30년 후의 백설이로선 처음 보는 사람이 부른 것이었지만.
“??”
상황을 이해 못한 백설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한의 앞에 머리부터 떨어졌고, 그건 정확히 린이 세한을 노리던 검의 앞이었다.
“이게 무슨?!”
갑자기 나타난 백설이의 모습에 린의 검이 우뚝 멈췄다.
단순히 백설이가 검의 앞에 떨어진 것 때문이 아니다. 백설이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라는 걸 린은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대체 누구죠?!”
검을 거두며 외치는 린을 향해 세한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더불어 바닥에 철푸덕 쓰러져 있는 백설이에도 한번 시선을 줬다.
어리둥절하게 쓰러져 있던 백설이는 세한의 얼굴을 확인한 후,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주인과 팻의 관계로 연결된 백설이 이니 세한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리라.
“알고 싶으면 쫓아오든가.”
세한은 그 말을 끝으로 허수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망연한 얼굴로 서 있는 두 여성을 남겨둔 채로.
***
30년 후의 마계.
허수공간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잿빛 하늘의 모습에 나는 어쩐지 감개무량해졌다.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어쩐지 엄청 예전에 온 것 같네.”
“나는 처음이라 기대가 크구나.”
이드라는 마치 해외에 놀러 온 관광객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시간만 여유롭다면 마계의 명소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린이 쫓아올 확률이 높으니 서둘러 움직이자.”
“그러길래 왜 그런 도발을 했느냐.”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할 것 같다?”
“어쩐지 ‘나’가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거든.”
어차피 도발을 하지 않았어도 린은 쫓아올 거다.
민수아가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했다.
‘내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어도, 문이 열린 장소가 마계라는 건 눈치챘을 테니까.’
다른 물건도 아니라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 도난당한 것이다.
거기다 지난 30년간 누구도 다루지 못했던 물건을 이용해서 마계의 문을 열었다.
게임을 탈취하고 ‘누군가’가 사용했던 외계의 열쇠.
린이라면 이드라를 기억하지 못해도 대략적인 인과를 파악했으리라.
민수아를 추궁할 테고, 그 최종 도착지는 마계다.
“아무튼 여긴 어디냐?”
“모른다.”
“뭐?”
서둘러 마왕의 성이 있는 장소로 이동하려 하자, 이드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30년이 지났지만 마계잖아?”
초월자인 악마들이 사는 곳이다.
마족들도 살지만, 그들도 수명은 상당히 길어서 30년이란 시간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사이 영역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대가 마계에서 지구로 귀환하기 전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게냐?”
“어흠.”
벨제부브의 영역은 개박살. 마몬은 사망. 오만의 영역은 내가 잊은 누군가가 완파했다고 이드라가 말했었지. 분노는 신자운이 차지했으며 질투는 실종된 지 30년이 넘었다.
“……개판이네.”
“아무리 마계라도 그쯤 되면 지역 변동이 일어나는 법이다. 애초에 지금 내가 이동한 장소는 탐욕의 영역이었어야 할 장소다.”
마몬이 있던 탐욕의 영역은 마계의 중심부근이다.
당연히 상당한 크기의 도시가 있어야 하건만 허허벌판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근처에 도시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까마귀를 날려 주변의 지역을 순찰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장소에 상당한 크기의 도시가 있었다.
이곳에 있던 도시가 부서지며 그쪽으로 이동한 건가.
“그럼 이동하자꾸나. 자.”
이드라는 양팔을 벌리며 나를 보았다.
“뭐야? 무슨 의미지? 위협하는 자센가?”
“안고 날아가라는 게다. 설마 나보고 걸어가라는 건 아니라 믿는다.”
“끄으응.”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 전만 해도 그런 행동 안 한다고 하지 않았냐?”
“후후후, 그건 희망이 없을 때지 않느냐. 지금은 다르다. 그 계집애가 돌아올 때까지는 좀 여유를 부려도 괜찮겠지.”
계집애라.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나랑 상당히 깊은 관계였던 여성인 건 분명했다.
“쯧, 어쩔 수 없지.”
“오오, 좋다. 가거라!”
이드라의 말처럼 신체능력이 취약한 이드라를 걷게 했다간 이동하는데 한 세월이 걸릴 거다.
더불어 허수공간을 이용한 단거리 이동을 제외하고 이드라는 하늘을 날거나 빠르게 이동하는 기술이 전무했으니 이렇게 안고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좀 흐른 덕에 회복된 궁기의 날개를 넓게 펼치며 날아올랐다.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라 속도는 전보다는 느렸지만 이동하는 데는 전혀 문제없었다.
“저긴가?”
“음, 상당히 강한 악마의…… 아니 악마의 계약자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구나.”
“아, 지구에 있던 계약자들이 마계로 이주했다고 했던가?”
그럼 저 아래로 보이는 도시는 악마나 마족이 아닌 계약자나 하수인들이 머무는 도시인 건가?
‘도착해 보면 알겠지.’
가까이 접근하니 보다 도시의 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확실히 건축양식이 악마나 마족이 아닌 인간의 것과 닮아있었다.
“분쟁이 일어난 모양이구나.”
“그러네. 자주 있는 일인가.”
착지할 장소를 찾고 있으니 아래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전부 계약자와 하수인들이다. 마치 조폭영화처럼 거친 욕설이 들리며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응? 뭔가 익숙한 얼굴인데.”
싸움은 대충 두 파벌이 부딪친 것 같았다.
하늘 위에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세한은 한쪽 파벌에서 꽤나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저거 크리스 브라이트 아니야?”
미국에서 어영부영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던 색욕의 계약자.
그녀가 이 아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