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252. 적이 된 아군(2)
세한은 민아를 보며 마마잭과 싸웠던 때를 떠올렸다,
카멜레온 자리에 있던 마마잭은 상대에 맞춰서 변하는 걸로 유명했고, 그 특성은 그녀의 연인인 엘리제에게 계승되어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다.
무조건 상대보다 유리한 상성으로 변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진화하던 그녀를 우리는 당장 쓰러트릴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에 몽상의 신전에 던져 넣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그걸 따라 했구나.’
지금 민아는 그런 엘리제와 비슷했다.
마력을 무한정으로 생산하는 용의 심장을.
양팔은 베히모스의 근력을, 육신은 오리하르콘으로 변해 무엇보다도 단단했다.
아마 신체나 다리도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켰을 것이다.
민아의 신격은 확실히 많지 않았지만, 그녀의 능력이 그걸 초월하게 만들었다.
신화시대의 괴물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는 민아는 어지간한 중급 신이 아니라 상급 신 이상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당연히 세한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니다.
‘1회차 이민아보다도 훨씬 쌔잖아.’
하긴 그때의 이민아도 용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신체 일부에 적용하지 못했을 뿐.
지금의 민아는 그보다 강해질 가능성을 손에 넣고 보다 긴 시간을 살아왔다.
당연히 이런 힘을 지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얕보다간 큰일 날걸?”
민아의 눈이 깜박이며 세한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세한은 반사적으로 허수공간에 들어가 그녀의 시야 범위에서 벗어났다.
쩌저적!
세한이 사라진 장소의 바닥과 벽이 잿빛으로 변했다.
일정공간 내에 있던 모든 것이 석화되어 버린 것이다.
투드득.
민아의 등 뒤에서 빠져나온 세한은 옷자락 끝이 회색으로 변해 부스러지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석화의 마안?!’
바질리스크를 상대하며 한번 마주쳐본 적이 있었지만 그것과는 위력이 전혀 달랐다.
이건 바질리스크가 아닌, 그보다 상위.
적어도 메두사가 보유하고 있던 마안, 아니 그보다도 강력했다.
단순히 생명체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닌 그녀의 시야에 닿는 걸 모조리 석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 위력은 세한도 정통으로 맞으면 위험할 정도.
최상급 신격을 지닌 세한의 내성을 뚫고 옷자락을 석화시켰을 정도니, 어지간한 존재는 시야에 닿는 것만으로 죽을 것이다.
“이걸 피해?”
“피하지 않으면 죽잖아.”
“칫!”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민아는 혀를 차며 팔을 크게 휘두르며 몸을 돌렸다.
콰콰콰쾅!!
베히모스의 근력을 가진 민아의 오른팔은 시스템으로 강화시킨 길드건물을 종잇장처럼 찢어내며 파괴시켰다.
‘설마 민아에게 근접전을 밀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민아는 천재다.
단순히 변신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근접전도 센스가 남달랐다.
거기에 능력으로 신체를 강화시킬 수 있게 되니 세한도 쉽사리 덤비기가 힘들었다.
시야에 닿으면 석화되고, 베히모스의 근력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해진다.
어쩌면 주먹 한방에 지진을 일으키던 벨제부브급 근력까지 상승하게 될지도 모른다.
‘혈천수라공만 쓸 수 있었어도!’
스킬창에 있는 혈천수라공을 사용 못 하는 게 아쉬워졌다.
소실된 기억만 아니었어도 분명 사용할 수 있었을 기술.
그것만 있었다면 근접전에서 이렇게 밀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콰콰콰!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민아의 팔을 피하며 손가락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바닥에서 둥근 기둥이 치솟아 올라오며 민아의 턱을 노렸다.
민아는 그것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전신의 강도는 오리하르콘에 가까웠기에 굳이 피할 필요도 없었다.
콰콰쾅!!
아니나 다를까 민아의 턱에 부딪친 기둥은 산산히 부서졌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민아의 머리가 살짝 흔들렸고, 세한은 그 틈을 노려 민아의 다리를 걷어찼다.
까아앙!!
“윽!”
신격을 담아 후려친 세한의 발차기에 민아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균형이 무너졌다.
‘이제 1분, 계속 상대해 줄 수 없어.’
쉽게 민아를 제압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도 너무 강했다.
‘어쩔 수 없지.’
만약 죽인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세한의 허수공간에는 아흐리만에게서 얻은 무한한 악의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신체를 변화시켜 대응한다고 해도 악의에 저항할 만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설령 죽지 않는다고 해도 한동안 완벽히 무력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몽상의 신전을 통해 오기는 했지만 지금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니까.
다른 분기의 민아라고 해도 그녀에게 큰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빨리 들키는 걸 감수할 수밖에 없나.”
“뭐? 들키다니…….”
소리야, 라고 외치려던 민아는 발아래가 허전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균형이 무너진 사이, 세한이 민아가 서 있던 바닥이 사라진 것이다.
“꺄아악!!”
갑자기 다리를 걷어차여 균형을 잃은 민아는 속절없이 그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용의 날개를 만들어 날아오르려 했지만 이미 사라졌던 바닥들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벽이 되어 민아의 앞을 막았다.
“이까짓 거!”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른 민아는 위를 꿰뚫고 올라가기 위해 주먹을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천장에서 네모난 기둥이 만들어 길게 늘어나며 민아의 몸을 아래로 짓눌렀다.
“대체 뭐야, 이런 게 어딨어?!”
마법도 이렇게 만능은 아니다.
어이가 없는 힘에 민아는 몇 개의 바닥을 부수며 계속해서 떨어졌다.
“1분 정도는 어떻게 버텨보는 수밖에.”
바닥 아래로 사라진 민아를 보며 세한은 한숨 돌렸다.
이 정도 소란이 일어났으니 린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래로 민아가 떨어져 내리기 무섭게 거대한 신격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으니까.
***
미래를 읽는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 민수아.
그녀는 린처럼 단순히 신의 아바타가 아닌 ‘합신’을 한 존재였다.
그뿐 아니라 이 세계에 유일무이하게 게임이 되기 전부터 여신과 커넥션을 가지고 있던 여성이기도 했다.
미래를 보는 힘이라면 설령 신조차 그녀를 따라올 수 없었다.
시스템의 힘조차 무시하고 엔딩의 분기를 볼 수 있는 게 그녀였으니까.
당연히 린은 그런 민수아가 디어사이드의 투신하게 되었을 때 의심했다.
뭔가 의도가 있는 건 아닌가.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누구보다도 그녀를 의지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닌 린이라고 하더라도 시스템의 분기를 볼 수는 없었다.
짧은 미래라면 시간을 비집고 읽을 수 있겠지만, 민수아 만큼은 어떻게 해도 도달할 수 없었다. 메리수의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린이 따라잡지 못한 능력이 있다면 바로 민수아의 것이었다.
“린, 너는 이 세계를 어떻게 하고 싶어?”
“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민수아는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너도 알 거야. 이 상황은 계속 유지되기 힘들어. 퍼블리셔도 곧 움직일 테고. 그렇게 되면 너 혼자서는 막을 수 없겠지.”
물론 린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그 사실을 린도 알고 있었다.
“너는 강해. 지구의 수준도 강해졌지만 너처럼 이치를 벗어난 수준의 강함은 지니지 못했어. 이미르가 가만히 있는 이유는 너도 알 거야.”
“굳이 저를 건드려서 이득 볼 게 없기 때문이겠죠.”
“맞아. 하지만 계속 놔둘 리가 없다는 것도 알지? 마왕의 움직임이 사라진 후, 이미르가 다시 지구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어.”
최근 린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이대로 먼저 선수쳐서 퍼블리셔로 쳐들어가 볼까 생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만에 하나 린이 이미르에게 패하면 지구는 끝장이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린이 지구를 떠난 순간 이미르는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누구보다도 강했지만 그건 개인의 강함일 뿐이다.
──린.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언제나 그렇게.
‘거짓말쟁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구를 벗어나는 것도,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것조차도.
마왕인 그가 잠적한 것만으로 평화는 무너지게 된다.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었지만 적이되어버린 그가 야속했다.
허나 그가 다시 아군이 될 일은 없겠지.
그는 분노하고 있었으니까.
어떤 기억을 잊어버린 지구의 사람들을.
린을, 그리고 모두를.
처음에는 어떻게 되돌릴 수 없을까 노력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그 마음은 지금도 같지만 마음속에 틔웠던 의심의 싹이 성장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지금, 다시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확실히, 지금의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수아는 그런 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만약, 뭐든지 할 수 있는 때가 돌아온다면 어떻게 할래?”
“뭐든지 할 수 있는……?”
“네가 린 테일러로 돌아올 방법이 있어.”
인류를 지키는 정의의 여신이 아닌.
인간 린 테일러.
“그, 그게 무슨 뜻인지 저는 잘…….”
당혹감에 말을 더듬던 순간, 린의 머리가 돌아갔다.
‘어떤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방금 뭔가가 5층쯤에 떨어졌어요.”
“그렇게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거야?”
“늦게 안 거예요, 15층에서 어떤 충격이 일어나며 5층까지 떨어지게 돼서 알아차렸죠.”
15층에 있는 사람이라면 민아다. 그녀는 그곳에 자신의 공방을 만들고 생활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방금 떨어진 사람도 민아. 기척이 움직이는 걸보면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지만 15층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분명했다.
‘모르는, 아니 익숙한 기척? 뭐지?’
린은 정신을 집중하여 15층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민수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언니.”
“왜?”
“저희 길드타워에 침입자가 들어올 거 알고 있었죠.”
“모를 리가.”
대예언자라 불리는 민수아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건 이유가 있다는 거다.
“왜죠?”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네가 알아보는 게 빠를 거야.”
“저는 지금 침입자를 잡으러 갈 거예요. 그를 잡으면 알 수 있는 건가요?”
“잡을 수 있다면, 이겠지.”
수아의 말에 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정의의 여신이다. 인류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축복을 지닌 존재.
신이나 악마조차도 경외심을 품는 불합리함의 끝.
그런 자신이 잡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만약, 이게 저를 인간으로 돌릴 수 있는 기회인가요”
“모르겠어.”
“제가 침입자를 막는 게 옳은 건가요?”
“글쎄.”
분명 지금 수아의 행동은 린을 배신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린은 수아에게 묻고 있었다.
그건 수아가 적어도 인류를 배신할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가만히 있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그럼 잡아야 한다는 거군요.”
“몰라.”
“모른다고요?”
“보이지 않으니까.”
침입자를 잡으러 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린의 생기가 없던 린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알겠어요.”
린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침입자가 있는 방향으로 뛰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다는 건.’
침입자를 쫓게 되면 발생하게 될 일이 엔딩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고정되고 정체된 이 ‘광기의 마왕’이라는 엔딩에.
***
“이런!”
세한은 날개를 펼치고 벽을 마구잡이로 부수며 꼭대기인 30층을 향해 날아갔다.
보안시스템이 세한을 적으로 인식한 탓에 올라갈 때마다 다양한 공격을 가해왔지만 허수공간과 현실조작 능력을 지닌 세한에게는 약간의 딜레이를 주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약간의 딜레이가 문제였다.
1층 회의실에 있던 린이 코앞까지 접근해 왔으니까.
‘이제 5층.’
코앞이나 마찬가지지만 과연 린을 뿌리치고 5층을 넘어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윽?!”
그때, 세한의 몸이 무거워지며 몸이 뒤로 당겨지기 시작했다.
“이 힘은, 설마.”
세한의 날개의 방향이 꺾인다.
억지로 부수며 날아왔던 땅이 시간을 되감아 지는 것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을 되감아지는 것처럼이 아니야.’
정말로 되감아지는 것이다.
이 힘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바로 반고의 능력인 한정회귀.
린과 싸우던 반고가 사용하던 능력. 일정공간 내의 시간을 역행시켜 인과를 뒤트는 힘!
“젠장!”
이대로면 날아왔던 거리를 되짚으며 아래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세한은 뒤로 당겨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신격을 움직였다.
세한의 두 눈이 금색으로 물들며, 심장에서 뭉쳐있던 외신의 힘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으윽!!”
한정적으로 사용하던 이드라의 힘을 완전히 개방되자 육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힘을 빠져나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인과를 벗어난 외신의 힘만이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웠으니까.
뒤로 당겨지던 세한의 몸이 다시 앞으로 움직이며 한 층을 더 올라갔다.
그리고 위로 올라왔을 때, 자신을 내려다보는 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당신은.”
역행하는 시간에 잡혀있던 짧은 시간.
찰나에 가까운 순간에 이미 그녀는 세한을 앞질렀던 것이다.
“누구죠?”
별빛처럼 빛나는 금발,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금색의 왕관.
인류를 수호하는 정의의 여신이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적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