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250. 패러렐 월드(3)
정의의 여신. 린 테일러.
지난 30년간 인류를 수호해온 최강의 존재.
이미 플레이어의 틀에서 벗어난 그녀는 인류에게 숭배의 대상에 가까웠다.
“…….”
린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높이 솟은 건물들, 아름다운 도시의 정경의 모습이었지만 먼 곳은 황폐한 대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악마들의 침입을 받았던 장소였다.
그곳은 완전히 황폐화되고 악마들의 힘이 남은 탓에 사람들이 살기 힘든 대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악마들은 요즘 잠잠해져서 다행이지만…….’
악마가 잠잠하니 이젠 퍼블리셔가 말썽이었다.
이미르는 지구의 운영권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호시탐탐 침략해왔고, 린과 자주 부딪쳤다.
물론 린의 지닌 힘을 알기에 섣불리 덤비지는 못했지만, 그녀로선 상당히 난감한 노릇이었다.
“여신님. 저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요?”
「네, 린은 잘 하고 있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스트라이아는 린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미 그녀가 지닌 힘은 여신의 그것을 한참 초월해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아직 인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모든 인류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지기엔 짐이 너무 무거운 것이다.
“알데바란과 미래의 제가 싸웠을 때가, 분명 10년쯤 후의 미래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럼 이미 제 시간은 그 길을 지나왔을 거예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린의 정보는 라플라스의 모래시계가 가져가 과거의 린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과거의 ‘나’에게 광기의 마왕 엔딩을 전달했을 것이다.
새로운 변수를 만들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현재는 변하지 않았다.
분명 마왕이 되기 전, 세한이 했던 말 그대로 했음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세계는 광기의 마왕의 엔딩에서 벗어나지 않고 쭉 이어져가고 있었다.
「린.」
“네.”
「세계가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모두 당신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분명 그럴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별들은 트루 엔딩을 맞이해도 세계는 멸망에 이른다.
퍼블리셔가 해당 별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선택한 별은 우주에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도 괜찮다고 판단한 별이기에, 이미르는 시스템을 대신하여 별을 심판한다.
하지만 지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린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마왕이 퍼블리셔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퍼블리셔는 이전처럼 다른 별들에게 횡포를 벌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퍼블리셔도, 마계도.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은 세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린은 불안한 가슴을 애써 외면하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오늘 오후에 민수아와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라면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좋은 조언을 해주겠지.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길드 타워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인증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게임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사원들.
그리고 업무가 있는 타 길드의 길드장이나 국가의 요인들은 디어사이드 간부에게 요청하여 들어오는 게 가능했다.
“물론 신분이 불확실한 이들은 대부분 입구에서 컷합니다만.”
우리는 길드 타워로 향하는 민수아의 차 안에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고급 리무진의 모습과 비슷한 차에는 나와 민수아, 그리고 이드라만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럼 우리도 들어갈 수 없는 거 아냐?”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제가 디어사이드의 간부인지라 입구를 통과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생각보다 허술하네.”
“입구니까요.”
민수아는 싱긋 웃었다.
“기밀지역으로 들어가려면 개조된 길드 타워의 보안을 뚫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간부들과 마주치게 될 가능성도 있죠.”
“린을 말하는 건가? 아까 싸울 각오를 하라며.”
“그런 미래도 있으니까요. 허나, 아무리 세한 님이라도 지금의 린은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라는 건가.”
현재의 나는 ‘무언가를 잊어’ 약해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린과 싸우는 건 무리일 것이다. 민수아가 린과 싸우게 될 시, 빠져나갈 방도를 마련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마왕이 된 나를 상대할 수 있는 린에게서 도망치는 게 가능한가?’
“대신 잊혀진 자가 곁에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어디 앉아계시죠?”
“내 옆.”
“아, 그렇군요. 사이가 좋으신 모양이네요.”
수아는 멀뚱멀뚱 앉아 있는 이드라에게 잘 부탁한다는 듯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린도 잊혀진 자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 그분의 힘이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근데 린은 시스템의 틀에서 벗어났으니 기억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린이 외신의 영역에 이른 건 옆에 계신 분이 잊혀진 이후인지라 그럴 확률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수아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미세하게 열린 눈꺼풀 사이로 푸른빛이 새어나왔다.
“다만 눈앞에서 마주치게 되면 몇 가지 정보를 떠올리기 시작하는 거 같네요. 그럼 더더욱 빠져나가기 힘들어지겠죠.”
“간단히 말해서 이드라를 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둬라?”
“네. 기억은 사라졌지만 린은 저와 달리 ‘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영향을 받는 건 분명합니다.”
“차라리 그럼 그걸 계기로 린을 설득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마왕의 얼굴로요?”
“혹시 모르잖아.”
린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모든 장애는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타깝지만 이미 마왕님과 린은 적대한 시간이 너무 깁니다. 만약 얼굴을 보이시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계략의 일종으로 생각할 겁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믿음이 없어?”
“마왕님은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
내 이야기가 아님에도 묘하게 찔리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마왕이 나라면 어떤 비열할 수를 써서라도 린을 공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럼 이야기를 돌려서,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사실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저는 세한 님이 타워 안으로 들어간 사이, 린과 회의를 가질 예정입니다.”
“나는 그사이, 정상에 있는 린의 방에 숨어 들어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훔치라는 거군.”
“맞습니다.”
수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위해 수십 년 간 디어사이드에 머물러있던 그녀인 만큼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럼 이제부터 타워에서 만나게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수아는 우리가 타워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대와 그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말했다.
미래를 아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 건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신자운이 제일 잘한 일은 얘를 살린 거라니까.’
나는 이곳에 없는 신자운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
“하암.”
디어사이드 길드 타워의 입구를 지키는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하품을 하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구에서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들이었고, 악마와 같이 신격을 지닌 존재와 싸워본 적도 있는 배태랑들이었다.
물론, 디어사이드의 길드원은 아니다.
디어사이드는 초기 멤버와 민수아를 제외하고는 추가적으로 플레이어를 길드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그들을 비롯해, 길드 타워 내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디어사이드를 수호하기 위해 협력하는 용병들에 가까웠다.
하지만 디어사이드 길드에 침입할 생각을 하는 간 큰 생각을 하는 자는 거의 없었고, 보통 그들이 하는 일이란 하늘에 날아다니는 참새를 살피는 게 전부였다.
“더럽게 심심하네.”
“자세 잡아, 오늘 민수아 님이 온다고 했으니까.”
“아, 그랬지. 오늘은 운이 좋네. 드디어 TV에서나 보던 대예언자님을 볼 수 있는 건가?”
“길드에 거의 오지 않는 분이니 오늘 근무는 행운이지. 예언자님을 보면 복이 들어온다는 말도 있잖아.”
민수아는 TV에 얼굴을 자주 비치는 탓에 팬이 상당히 많았다.
어쨌거나 전 세계의 플레이어 중에서 단 세 명밖에 없는 합신(合神)한 플레이어였으니까.
나이도 먹지 않을뿐더러 그 고아한 분위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다.
“온다, 준비해.”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얼굴을 굳히고 커다란 리무진을 맞이했다
문을 열고 나오는 민수아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이들은 이어서 나오는 한 남자를 보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저, 수아 님. 이분은 누구…….”
“오늘 길드에 일이 있어서 오신 손님입니다. VIP룸으로 안내 부탁드려요.”
“아, 예.”
대체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어사이드 간부의 말이니 묻기가 애매했다.
거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민수아가 아닌가.
그녀가 길드에 적이 될 존재를 들여보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것도 잠시, 경비를 서던 플레이어 중 하나가 민수아의 곁에 있는 사내, 세한을 안내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민수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배웅했고, 세한 역시 짧게 인사했다.
주변 사람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현재 세한의 뒤에는 이드라가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와, 진짜 대박 큰 건물이지 않느냐. 성공했구나, 성공했어.”
‘지금도 이 정도 건물을 지을 수 있거든?’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하지 않을 뿐이지.
세한은 이드라가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종알거리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계속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그럼 민수아 님이 오실 때까지 대기해 주십시오. 혹시 요청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버튼을 눌러 불러주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VIP시설에 안내해 준 플레이어는 그렇게 말한 후, 꾸벅 인사를 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근데 민수아가 말한 것처럼 쉽게쉽게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네.”
“동감이다. 이전에 그대가 개조했던 건물보다 배는 포인트를 들였구나.”
세한도 마마잭을 상대할 때 길드건물의 보안시스템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이 길드타원는 건물 전체가 그런 보안시스템으로 떡칠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안 시스템에는 허점이 있지.”
세한은 천천히 일어나 꽤나 튼튼해 보이는 천장을 응시했다.
“문제가 발생하지만 않으면 되거든.”
딱!
손가락을 튕기자 세한의 몸이 반투명해졌다.
세한이 지닌 힘은 환상의 현실화, 일시적으로 자신의 몸을 환상으로 만들면 물리적인 벽은 가볍게 투과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되면 벽이나 보안 시스템을 자극하지 않으니 문제가 일어날 턱이 없었다.
“분명 VIP실 위층은 빈방이라고 했지.”
세한은 천장을 바라보며, 이드라에게 눈짓했다.
“기억하지? VIP실 문은 30분 후에 열릴 거야.”
“물론이다. 그대야말로 조심하거라.”
가볍게 손을 흔드는 이드라에게 무운을 빌어준 후, 세한은 가볍게 점프해 위층 방으로 이동했다.
한 번에 여러 층을 건너뛰고 싶었지만 구조상 무리였다.
이 바로 위층은 사무실이었으니까.
‘건물 내부를 살펴보실까…….’
방 밖의 기척을 느끼며 바닥에 손바닥을 댔다.
그러자 세한의 그림자에서 까마귀들이 몽글몽글 뭉쳐서 만들어지며 천천히 날아올랐다.
그 숫자는 족히 수십 마리.
세한은 그것들을 환상을 이용해 투명하게 만들었다.
“가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까마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본래의 까마귀들과 달리 새로운 까마귀들은 벽과 같은 장애물을 가볍게 투과하며 움직일 수 있었다. 까마귀 자체가 환상으로 만들어진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력이 상당히 소모됐지만.’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아무리 미래를 알고, 수아가 건물 내부 구조를 알려줬다고 해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것에 비하면 부족했다.
‘좋아, 가자.’
우선 15층까지는 별문제 없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15층이다.
15층 이상은 단순한 시스템이 아닌 플레이어가 설치한 결계가 존재했다.
「15층에는 민아 언니가 있을 거예요. 무슨 방법을 쓰셔도 민아 언니에게 들키지 않고 갈 수는 없어요.」
수아의 말에 따르면 민아도 로키와 합신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상태인 모양이다.
분명 로키가 무슨 수를 쓴 거겠지.
‘녀석은 하나에 구속되는 성격이 아니니.’
그래도 뭔가 조치를 취한 걸보면 예상보다 더 민아를 아낀 모양이다.
세한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5분 안에 쓰러트리면 돼요. 5분이 지나면 린이 알아차려요.」
‘말은 쉽지.’
거의 반신급 존재가 된 민아를 5분컷 해야 되는 거다.
과연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을까.
세한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