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249. 패러렐 월드(2)
“와, 겁나 크네.”
민수아의 저택은 디어사이드의 길드 건물이 있는 장소에서 상당히 먼 장소에 있었다.
저택의 크기가 압도적이라 한국에서 이렇게 큰 집을 지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저택 부지 내에 동물원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서 어떻게 들어갈 테냐?”
“지금 생각 중이야.”
저택의 입구를 지키는 플레이어의 수는 대략 열 명 정도.
아마 안에는 더욱 많을 것이다.
‘30년 후라 그런지 확실히 수준이…….’
본래 지구 플레이어들의 평균 수준은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30년이 흐른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발전해 있었다. 능력치가 A나 B에 도달한 플레이어들이 즐비할 정도다.
“이봐요, 거기.”
입구를 살피고 있으니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시선을 돌리자 차가운 인상의 여성이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인데?’
30년 후이니 내가 아는 사람은 거의 중년이나 노인이 되어 있어야 하건만, 눈앞의 여성은 뭔가 낯이 익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어깨쯤에 오는 단발이 인상적인 미인.
심지어 민수아의 집을 지키는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다.
“이 아이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든다.”
이드라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너도? 확실히 어디서 본 얼굴인 거 같긴 해.”
“아니, 얼굴이 아니라 풍겨오는 기운이…….”
“뭘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우리의 말을 끊으며 여성이 말했다.
여성의 눈은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대예언자님의 저택입니다. 신원이 확인된 자가 아니면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들 같이 호기심 삼아 오는 이들 때문에 얼마나 곤란한지 압니까?”
짜증이 잔뜩 배어 있는 얼굴이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멀지 않은 곳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끌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어딜 멋대로 들어갈 생각입니까?!”
“놔, 놔주십쇼! 딱 한 번! 딱 한 번이면 됩니다. 딱 한 번만 예언자님을 뵙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예언자님은 자신이 원할 때가 아니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내는 속절없이 끌려가 멀리 던져졌다.
데굴데굴 굴러간 그는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젠장, 빌어먹을! TV에서 나오는 양반이 뭘 그렇게 비싸게…… 굴 만하죠, 예.”
욕설을 내뱉던 그는 주변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플레이어들의 시선에 쭈그러들며 슬슬 도망쳤다.
제법 진상 같아 보였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플레이어들의 반응으로 보아 이런 일이 꽤 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아, 보셨죠? 허튼 짓을 할 생각이면 저렇게 끌어낼 겁니다. 당신은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는 플레이어이긴 하지만…….”
여성은 양복의 사내를 바라보던 시선을 떼고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괜히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여성의 차가운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노려보았다.
웬만한 플레이어라면 그 시선만으로 큰 압박감을 느꼈을 게 분명했다.
‘확실히 강하긴 하다만.’
내 입장에서 이 정도는 재롱을 부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되도록 원만하게 넘어가볼까.
“대예언자님이라면 제가 오실 걸 미리 알고 계실 겁니다.”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죠? 당신이 뭐라고 예언자님이 알고 계신다는 겁니까?”
“대예언자님께 ‘잊혀진 자’가 왔다고 전해주시면 아실 겁니다.”
여성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지만 내 태도가 워낙 당당하니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물어보는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대예언자님이 모른다고 하시면 순순히 물러가겠습니다.”
“억지는 적당히 부리세요.”
당황하던 여성은 이내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만약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며칠 전부터 예약이 된 손님일 터. 그럼 저희에게 전달이 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와 이드라는 이곳에 온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민수아가 아직 미래를 못 봤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잊혀진 자’라는 명칭을 전달하려고 했던 건데 그것도 안 되는 건가.
민수아라면 분명 그게 무슨 뜻인지 알 테니 설령 미래를 못 봤다고 해도 대화 정도는 나눠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계속 수상한 태도를 보이면 억지로 내쫓을 수밖에…….”
웅성웅성.
여성이 강경한 태도를 내보이려는 찰나, 저택의 문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헉!”
더불어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던 여성의 태도도 이상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 그게.”
날카로운 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순박한 눈으로 입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예언자님이 나오십니다!”
“예언자님이? 왜?”
“오늘 특별한 스케줄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쿠쿠쿵.
웅성거리는 인파 속에서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양쪽으로 열린 거대한 문 사이에서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긴 연보라색 머리칼에 눈을 지그시 감은 차분한 인상의 여성.
신장은 상당히 작았지만 무척 신비로운 분위기라 쉽게 범접하기 힘들었다.
‘저게 민수아야?’
30년이라는 세월이 길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어린아이 같은 인상을 가진 그녀가 이런 성숙한 여성이 될 줄이야.
얼굴은 여전히 동안이었지만 분위기가 차원이 달랐다.
겉모습만 보자면 살아있는 여신 그 자체.
생각해 보면 신과 하나가 된 시점에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타박, 타박.
웅성거리던 주변은 민수아가 걷기 시작하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느릿하게 걷는 민수아의 발걸음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민수아는 눈을 감은 채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세가 바다를 가른 것처럼 양쪽으로 쫙 갈라지며 길을 트고 있었다.
‘근데 왜 눈을 감고 있는 거야?’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로는 시력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없었는데.
“어서 오십시오.”
“헉!!”
민수아는 내 옆까지 다소곳하게 다가와 마치 무릎이라도 꿇는 것처럼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였다.
대예언자라 불리는 그녀가 갑자기 극도의 저자세로 나오자 사람들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나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방금 전까지 나를 질책하던 여성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도 설마 민수아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상당히 뻘쭘했다.
“커흠.”
작게 헛기침을 한 뒤,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 이라고 해야 되나?”
“편하신 대로 말하셔도 좋습니다.”
“근데 보, 보는 눈이 많은데 너무 그렇게 나오면 부담스러운데.”
그런 내 말에 민수아는 살며시 고개를 들며 빙긋 웃었다.
그제야 나는 이 모든 상황이 민수아의 의도였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놀릴 생각이었구나!’
장난기 어린 그녀의 얼굴은 이전과 달리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언제나 나만 보면 덜덜 떨던 그녀와는 다른 모습이다.
“연화야, 저분을 안으로 모시렴.”
“네, 넵.”
방금 전까지 우리를 막던 여성의 이름이 연화였던 모양이다.
민수아는 주변사람들과 가볍게 사진을 찍거나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있었고, 그사이 우리는 거대한 저택 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말로, 예언자님과 아는 사이였군요.”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그렇긴 했지만…….”
날카로운 눈이 순박한 눈망울이 된 탓에 조금 우스웠다.
순진한 애를 놀리는 기분이라고 할까.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손님용 별채로 보이는 장소에 안내한 연화라는 여성은 우리가 들어가는 걸 확인한 후, 긴장한 얼굴로 입구를 지키고 섰다.
그렇게 1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긴 연보라색 머리칼은 지닌 여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수아는 안에 앉아있는 나와 이드라에게 다시 인사를 한 후,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화야, 제대로 인사는 드렸니? 이 분은 너와도 인연이 깊은 분이야.”
“네, 네? 저와요?”
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누군지 느낌이 오지 않으시나요?”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민수아는 입을 가리고 옅게 웃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송연화입니다.”
“……송연화?”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인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송 씨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헉?! 서, 설마?”
“네, 송창우 아저씨의 딸입니다.”
“아, 아내는 누군데?”
“홍가은 씨지요.”
맙소사.
둘이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결혼했어?
30년이 흘렀으니 자식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래에 왔다는 느낌이 갑자기 확 드네.’
바뀐 도시의 모습보다도 훨씬 충격적이었다.
그건 그냥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는 사람의 자식은 갑자기 현실로 끌려온 기분이었다.
“아버지를 아신다면 누구신지……?”
내가 창우를 아는 눈치이자 연화의 태도가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답하려고 해도 마땅한 설명을 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난 이곳에서 마왕이라서 이름을 말할 수도 없잖아.
“연화야, 그건 나중에 언니가 말해줄 테니 이제 나가 있도록 해.”
“하지만 호위가.”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아, 알겠어요.”
살근살근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수아의 말에 연화는 식은땀을 흘리며 문을 닫고 나갔다.
“……성격이 많이 달라졌네.”
“후후, 나이가 나이이니까요.”
수아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옅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내민 찻잔을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알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할 리가 없겠죠.”
“그건 그렇군.”
“애초에 제가 디어사이드에 투신한 것도 이날을 위해서입니다.”
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수아의 말에 이드라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역시 그랬던 게구나. 아자젤과 있어야 할 네가 왜 이곳에 있나 싶었다.”
“…….”
“왜 대답이 없느냐?”
이드라의 말에 수아는 입을 굳게 닫고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세한님 곁에 잊혀진 자가 계신 모양이군요.”
“뭐?”
“미리 말씀드리자면 현재 제 눈에 비치는 건 세한님 한 분입니다.”
순간 무슨 뜻인지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이드라는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아아, 그렇군. 그래서 아까 연화라는 아이도 너에게 ‘혼잣말’이라고 했던 것이로구나.”
“아, 그랬었지.”
잠깐 스쳐지나가듯 말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이 세계의 인간들은 이드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인가?
‘이드라와 대화를 나누는 나를 이상하게 보던 이유가 있었군.’
어쩐지 돌아다닐 때 이상하게 보는 녀석들이 있더라.
나는 단순히 이드라의 아름다운 외모가 눈에 띄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스템에게서 벗어났다면 가능할 거다. 다만, 그런 존재는 플레이어 중에 단둘뿐일 것이다. 열쇠를 지닌 둘.”
“마왕인 나와 린 테일러, 이렇게 둘이라는 거군.”
“그래. 외신급 존재라고 한다면 그 둘이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마왕인 나는 이드라를 기억했어야 하지 않나?
“볼 수 있는 것과 기억을 되찾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
그런 내 의문에 답한 건 잠자코 나를 바라보던 민수아였다.
“우선 이름이 같으니 이쪽의 세한 을 ‘마왕님’이라고 지칭하겠습니다. 마왕님은 확실히 외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시스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허나 자의지로 열쇠의 시험을 통과한 건 아니기에 기억을 되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계기가 없었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악마들의 시스템에 속하지 않지만, ‘마왕의 시험’이기에 영향을 받아 기억이 조정된 거겠죠. 그 탓에 이 세계에 그분을 아는 자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르라면 알고 있겠지만, 적인 녀석이 마왕인 내게 정답을 말할 리 없었다.
“그럼 네가 이곳에 있는 건…….”
“비록 전 잊혀진 자가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사리진 걸 알고 있지요. 마왕님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의 과거를 먼 과거에 보자마자 디어사이드에 투신한 겁니다. 당신이 오늘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를 돕기 위해서?”
“정확히는 이 정체된 세계를 위해서.”
그때, 닫혀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살며시 벌어지는 눈꺼풀 사이로 푸른빛이 영험하게 흘러나왔다.
미래를 볼 때면 동공이 파란색으로 변하던 민수아였지만, 이건 격이 달랐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새파란 동공에 ‘현재’는 비치지 않았다.
보는 건 오직 미래뿐.
내가 아는 민수아보다 훨씬 먼 미래를 보는 눈동자다.
“제 미래시는 너무 힘이 강해져 함부로 눈을 뜰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우 아저씨를 통해 심안을 익혔죠.”
그래서 눈을 감고 다닌 건가.
“근데 어차피 엔딩이 난 상태에서 엔딩이 바뀔 수 있나?”
“엔딩은 바뀌지 않습니다. 허나, 엔딩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죠.”
그 말은 개발자 메시지에서도 적혀 있던 것이다.
엔딩에 집착하지 말라고, 엔딩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던 ‘나’의 말.
“목적은 알고 있습니다.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의 회수를 하려는 거겠죠?”
“맞아.”
“그 물건은 디어사이드 길드 정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푸른 눈동자가 한층 빛나며,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러니, 인류의 정점과 싸울 각오를 해주세요.”
세계를 수호하는 정의의 여신이, 바로 우리의 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