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246. 개발자 메시지(2)
초상계 퍼블리셔.
세한이 아직 마계에서 돌아오기 일주일 전.
“으으.”
그곳에 한 명의 거인과 두 명의 여성이 걸어가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두 여성은 거인이 아닌지라 눈에 띄었지만 묘하게도 주변 거인들은 그녀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두 여성을 인식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들키면 죽겠지?”
“응.”
“넘 쉽게 단언하지 말라구!”
두 여성 중 한 명, 민아는 울상인 얼굴로 옆에 있는 여성을 올려보았다.
옆의 여성은 민아보다도 한층 머리가 짧아 중성적으로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가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정말 나까지 부려먹다니. 까마귀는 정말 대단해.”
그녀의 이름은 로키. 어릿광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민아의 신이었다.
연한 보라색 머리칼을 지닌 그녀는 옅은 한숨을 쉬며 주변을 향해 경계했다.
현재 세 명의 주위에는 특별한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건 물론,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로키만의 마법이었다.
이런 계통에 특히나 능한 로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어릿광대는 아바타를 지켜보는 옵저버가 아닌 본체로 이곳에 와 있었다.
민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을 영접한 기념비적인 날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반갑게 맞이할 수 없었다.
지금 민아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거인들을 따돌리고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을 뿐이다.
‘여태 숨어드는 일은 많았지만 이번 건 역시 너무 무서워~!’
여태는 그래도 숨어들어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에 몰려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들키면 그냥 죽는다.
거인들은 못해도 하급 신 정도는 되는 존재들.
신격을 지니지 못한 민아로선 도망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세한이 민아를 이곳에 보낸 건, 그녀를 도와줄 신이 바로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정말 안 들키는 거 맞지? 이거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아키넨의 말에 로키는 입가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혹시 뒤통수치려는 건 아니겠지?”
“이제 와서 배신을 해봐야 저도 죽을 뿐이죠.”
“근데 솔직히 이해를 못하겠네. 거인족인 네가 왜 까마귀를 돕는지 모르겠어.”
뒤통수라면 로키도 일가견이 있다.
한창 남신의 모습으로 활동했을 시절에는 북유럽에서 이름을 날리던 장난의 신이었으니까.
“으음, 사장님에게도 한번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전 사장님의 팬입니다.”
“사장님? 너도 까마귀를 그렇게 불러?”
“적응되니 이게 편하더군요.”
지구를 운영하는 것에 관련된 사람들은 보통 세한을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아키넨은 엄연히 거인족이었지만 GM에 속해 있으니 사장님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팬이라서가 끝이야?”
“물론 아니죠. 간단히 설명하자면 저는 퍼블리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오.”
“아실 겁니다. 퍼블리셔가 운영하는 게임은 이제 재미가 없어요. 매번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죠. 말하자면 너무 고여 버렸습니다.”
로키도 절로 머리가 끄덕여졌다.
확실히 현재 퍼블리셔가 운영하는 게임은 다 비슷하다.
시스템의 시나리오에 맞춰서 계속 신들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하드한 퀘스트. 강해지려면 아바타의 목숨을 불살라야 가능한 것들.
그리고 게임은 오래가지 못하고 단명하고 만다.
처음에는 그런 신들간의 경쟁 컨텐츠가 먹혔지만 신들도 이제는 지쳤다.
신들을 잊은 존재들에 대한 복수심도 옅어진 마당에 굳이 계속 무의미한 살육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 게임 ‘지구’가 이슈가 된 것도 그런 이유다.
특별히 경쟁요소 없이 아바타와의 커뮤니티가 발전된 게임.
마치 과거 신화시대의 재현처럼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치유받을 수 있는 게임에 신들은 점차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르가 점차 세한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가 크다.
‘뭐, 니알라토텝을 죽인 게 가장 큰 이유긴 하겠지만.’
아무튼 퍼블리셔의 우두머리로서 세한과 이드라는 미리 밟아야 할 새싹인 것이다.
“그리고 전 전능한 무언가에게 지배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전능한 무언가? 시스템을 말하는 거야?”
“예.”
“하, 설마 너는 까마귀가 시스템을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돕는 거 아닙니까? 당신은 옛날부터 반골 기질이 강했으니까요.”
“…….”
아키넨의 말에 로키는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마치 나를 옛날부터 본 것처럼 말하네.”
“당신이 막 태어났을 때도 전 사회인이었습니다만.”
“내가 이래서 거인놈들이 싫어.”
“하하. 아무튼 이제 서두르죠. 곧 약속 장소입니다.”
아키넨은 자신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을 지닌 한 거인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녀석이라면 분명 먼저 도착해서 자신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아, 역시나.”
약속 장소에 가까이 가자 역시나 한 거인이 번듯하게 차려입고 아키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번에 중앙 통제실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된 거인.
요루엠이라 불리는 거인이 말이다.
***
퍼블리셔의 심처.
이미르만이 들어갈 수 있는 퍼블리셔의 가장 밑바닥에 새까만 공간이 뚫려 있었다.
검은 공간 내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신격에 이미르는 씩 웃었다.
“오랜만이다.”
검은 공간을 응시하며 이미르는 말했다.
그의 머리 위에는 금색의 왕관이 번쩍이고 있었다. 린이 가지고 있는 열쇠의 나머지 반쪽을 이용해 이미르는 지금 차원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대도 들었을 테지. 니알라토텝의 죽음을.”
니알라토텝이라는 이름에 검은 공간 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거대한 무언가가 이미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수십, 수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돌아가는 광경은 소름이 돋을 만한 광경이었지만 이미르는 태연하게 서 있었다.
“아자토스.”
아우터갓에서 유일하게 우두머리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모든 신들보다 우위에 서는 외신들 중에서도 정점에 도달한 존재.
만약 이미르에게 열쇠가 없었다면 이렇게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괴물이었다.
외신 중의 외신.
홀로 우주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절대자.
“그대의 소중한 전령을 죽인 자가 있다. 마침 내가 이번에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이거든.”
하지만 그는 이드라나 니알라토텝처럼 함부로 이쪽 우주로 넘어올 수 없었다.
시스템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자신의 영역을 어지럽힐 수 있는 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쇠를 다룰 수 있는 이미르라면 그를 한정적으로 불러오는 게 가능했다.
“혹시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없나?”
「────」
이미르의 말에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조차 아니다. 소리와 비슷한 무언가가 심처에 가득 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이어 제대로 된 ‘언어’가 들려왔다.
「이드라가, 그곳에 있는가.」
“놀랍군, 설마 당신이 대화를 해올 줄이야.”
「그럼 네놈은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나?」
대화할 것도 아닌데 떠들고 있었냐는 지적이었다.
당연히 이미르는 벙찔 수밖에 없었다.
“농담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
「조금 공부를 했지」
공부라, 어처구니없는 말에 이미르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 대화를 청한 건 맞지만 그냥 약간의 관심을 얻고 싶었을 뿐이다.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아우터갓이지만 니알라토텝을 죽였다는 걸 안다면 조금 관심 정도는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대화를 해올 줄이야.
‘이드라의 영향인가?’
인간의 섭리를 익힌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이미르에게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이미르는 지구를 침범할 때 혹시 모를 보험을 만들어두고 싶었고, 그 보험은 아자토스만 한 게 없었다. 절대무적의 외신을 감히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드라는 그곳에 있는 인간들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 니알라토텝도 그랬고. 서로 상반된 의견이긴 했다만.」
“알고 있었나?”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오만한 말이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이쪽 우주가 시스템의 지배를 지배받는다면, 외우주는 아자토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다.
물론 지닌 바 개념이나 힘은 달랐지만 한 우주를 대표하는 존재인 건 분명했다.
아자토스를 상대로 맞설 수 있는 건 이쪽에서 열쇠를 가진 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 정도가 아닐까.
루시퍼나 아자젤, 그런 이미르와 비등한 존재들이 붙어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네놈의 의도도 안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그럼 나를 돕겠나?”
「돕는다? 오만한 놈이로구나. 나는 단지 관심이 생겼을 뿐이다. 다만 조금 준비가 필요하겠어.」
“준비?”
「이 모습으로 가면 너무 눈에 띄니 조금 준비를 할 생각이다. 이드라나 니알라토텝처럼.」
아자토스는 기왕 갈 거 제대로 다녀올 생각이었다.
솔직히 이드라가 넘어간 우주에는 관심도 있었으니 이미르의 의도대로 조금 싸워주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네놈이 원하는 건 나 하나만이 아니지 않나.」
아자토스의 말에 이미르는 씩 웃었다.
그 말대로 이미르가 바라는 최선의 수는 아자토스만이 아닌 ‘외신 전체’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조금 시일이 걸리겠지만 기다리도록 하거라. 관심이 있는 아이들을 추리도록 하지.」
아자토스는 조금 가벼워진 어조로 말했다.
이번 소풍은 제법 즐거울 것 같았으니까.
***
나는 눈앞의 쪽지함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하지만 적혀있는 문구는 달라지지 않았다.
[발신자 : 광기의 마왕]
광기의 마왕.
정확한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본래라면 내가 도달했을 엔딩의 명칭이며, 바로 마왕이 된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진 엔딩 아니었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의 엔딩은 배드엔딩 ‘흩어진 세계’다.
근데 이제 와서 DLC 상점이 해금되며 광기의 마왕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하다니.
“……설마 했지만.”
DLC 상점은 무엇인가.
나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이것도 시스템이 준 힘인가 아니면 제 3자의 것인가.
답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내 특성으로 인해 시스템이 준 힘이라면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시스템은 자신에게 대적할 존재를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과거로 회귀하여 시스템과 계속 적대하는 포지션에 있었다.
그러나 DLC 상점의 아이템들은 도리어 그런 나를 돕는 아이템들이 시기적절하게 튀어나왔다.
마치 이때는 이런 물건이 필요할 거라는 걸 안다는 것처럼.
이상하긴 했지만 나는 그것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상품은 많이 있었으니까.
“만약 DLC 상점을 만든 것이 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전달했는지. 그리고 ‘광기의 마왕’에 도달하여 미쳐버린 내가 이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
그 답은 이 메시지에 적혀 있을 테지.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천천히 메시지를 열었다.
==
발신자 : 광기의 마왕
축하한다.
이 메시지를 읽었다면 너는 내가 도달하지 못했던 엔딩에 도달했다는 거겠지.
하지만 엔딩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엔딩에 집착해서는 안 돼.
지금 중요한 건 누군가가 살아남았다는 것.
내가 잊은 누군가가 분명 너에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넌 다른 누군가를 잊었을 테지.
억지로 기억하려고 하지 마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
이 메시지와 도끼를 전달하는 것이다.
내가 잊어버린 누군가에게, 그, 혹은 그녀에게 전달하면 된다.
그다음은, 직접 말해주도록 하지.
기다리마.
==
메시지의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저 무엇을 해야 할지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굳이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직접 말해준다는 것과 엔딩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가?’
유독 그 문장이 신경 쓰였다.
어째서 엔딩이 중요하지 않은가. 이 세계의 미래가 결정되는 일인데.
거기에 직접 만나 말해준다는 이야기도 이상했다.
광기의 마왕 엔딩은 이미 존재하지 않잖아?
여러모로 이상했지만 나는 계속 메시지를 살폈다.
‘여기서 「내가 잊은 자」란, 광기의 마왕일 때 사라진 이를 말하는 거겠지.’
지금 내가 누군가를 잊은 것처럼.
광기의 마왕 엔딩에 도달하게 되면 다른 존재가 사라진다.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미 민수아를 통해 확인했으니까.
“이드라.”
나는 메시지와 동봉되어 있던 도끼를 보았다.
정말 특별할 것 없는 이것을 이드라에게 전달한다면 무언가 달라질까?
이 배드엔딩을 극복할 수단이 있는 건가?
모른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드라에게 가져가서 나쁠 건 없었다.
만약 이것이 나를 위장한 다른 존재가 보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드라라면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가자.”
애초에 내게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광기의 마왕이 이드라가 없기에 맞이한 엔딩이라면, 분명 이 상황을 극복할 방법은 이드라에게 있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