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242. 분기점(4)
“죽을 뻔했잖아요! 진짜로 죽을 뻔했단 말이에요!”
마계에 퍼지는 불길한 기운에 나는 민수아를 황급히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폭식의 영역에 있었던 탓에 악마들의 보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다른 악마들이 잘 막아줬잖아.”
“못 막았으면 어쩌려고요!”
평소 내 눈치를 살피던 건 어디 갔는지 민수아는 내 옷깃을 잡고 열변을 토했다.
촉촉이 젖은 눈망울과 새빨간 얼굴은 수아가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미안하긴 하네.’
폭식의 영역에 있는 악마는 한둘이 아니다.
상급 신격 이상을 지닌 악마들의 수도 꽤 되던 터라 그 정도는 당연히 막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민수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운석이 떨어져서 별이 아작날 수도 있잖아요!”
“마계는 일반 행성과 달라서 그 정도로는 멀쩡해. 평범한 행성인 지구와는 레벨이 달라.”
차분히 설명하는 내 말에 민수아는 뚱한 얼굴이 되었다.
“……알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넘어갈게요.”
“고마워.”
겨우겨우 진정했는지 수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세한 님이 묻고 싶은 건 이상한 기운 때문이시죠?”
“맞아.”
“누구인지는 예상하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수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미래를 읽고 있다는 의미다.
“역시 지수인가?”
“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지수는 결코 루시퍼와 싸울 수준이 되지 않을 텐데?”
“맞아요. 하지만 세한 님이라면 알 거예요. 미래의 시간을 당겨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아이템을.”
설마.
“지수가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네. 언니는 그것을 통해 미래를 봤어요. 그것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만약 단순한 개죽음을 당했다면 지수는 루시퍼에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
촤악!!
나는 황급히 날개를 펼쳤다.
정신력을 워낙 많이 소모하여 어질어질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벨제부브에게 수아를 맡긴 후, 조금이라도 빨리 오만의 영역으로 가야만 했다.
“늦었어요. 이미 엔딩은 바뀌고 있으니까요.”
“……엔딩이?”
“네.”
나나 지수처럼 ‘본래의 흘러가야 했을 역사와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은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수아가 말하길, 미래를 개변하는 행동을 했을 경우 특정한 미래가 확정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말은 마치 바뀌게 될 엔딩이 뭔지 알고 있다는 것 같은데?”
분명 수아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자세한 말을 하는 걸 꺼렸던 거겠지.
수아는 푸른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이제 우리가 도달하게 될 엔딩은 배드 엔딩 ‘흩어진 세계’입니다.”
배드 엔딩. 흩어진 세계.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찔해졌다.
다시 배드엔딩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내가 도달했던 ‘최악’은 아니었지만 지구가 멸망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체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흩어진 세계에 도달하게 되면 지수는 사라진다고 수아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기를 바라는 지수가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만약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 이유는…….
‘이드라.’
마몬의 은신처에서 수아는 말했다.
흩어진 세계에 도달하게 되면 지수는 사라진다.
하지만 광기의 마왕에 도달하면 사라지는 건 이드라다.
“언니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우습죠? 그렇게 집착하던 사람이 이렇게 다 놔버리다니.”
지수는 다른 무엇보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이다.
나의 희생으로 세상이 유지되는 광기의 마왕이 아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흩어진 세계를.
***
잿빛 하늘에 암운이 드리웠다.
복수의 영역에서 혈투를 벌이던 악마들도 그런 이변을 눈치챘다.
‘뭔가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만해도 폭식의 영역이 있는 방향에서 땅이 울리더니, 이제는 오만의 영역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 폭식의 영역에서 운석 같은 거 떨어지지 않았나?”
“지금 오만의 영역에서 발생한 일과 관련 있는 거 아냐?”
악마들은 긴장감 없는 어조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야 오만도, 폭식도 마계를 대표하는 악마인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악마들은 별이 통째로 날아가도 쉽게 죽지 않는 존재들인지라 걱정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다른 별로 가면 그만이었으니까.
‘정말 일이 쉽게 풀리지가 않는군.’
신자운은 대략 어떤 상황인지 눈치 채고 있었다.
아자젤이 무얼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분노의 악마가 된 심정이 어떠냐.”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던 신자운은 아래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복수의 좌를 두고 다투던 서열 8위의 악마였다.
이름은 아마 제이드라고 했던가.
확실히 강한 힘을 지닌 악마였고, 신자운도 겨우겨우 그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군.”
“크, 크크크. 그렇겠지. 우리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인간이 복수의 악마가 될 줄이야.”
제이드의 말에 다른 악마들의 머리도 끄덕여졌다.
기나긴 마계의 역사상 인간이 7대 악마의 자리에 앉은 경우는 없었다.
“분명 너에게 도전하는 수많은 악마가 올 것이다. 복수의 좌에 앉은 걸 분명 후회하게…….”
“그보다.”
신자운은 제이드의 말을 가볍게 잘랐다.
그의 시선은 이미 제이드에게서 떨어져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크윽! 7대 악마의 자리만 빼앗기지 않았어도 이렇게 인간에게 굴욕을 당할 일은……!”
“떠들 시간이 있으면 도망치는 걸 추천한다.”
“이, 이이이!”
또 말을 자르는 신자운의 행동에 제이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신자운은 이미 전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이봐! 영역의 지배가 됐는데 어딜 가는 거냐!”
악마들이 신자운을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그런 사소한 말들은 신자운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분명 그 여자다.’
이 불길함.
이 고요함.
신자운은 이걸 익히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그 여자와 싸워온 신자운이니 확실했다.
저건 화약고다.
곧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
폭발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튀는 게 제일이었다.
오만의 영역과 분노의 영역은 상당히 가까웠으니까.
***
“이것이 네가 보고자 했던 것이냐, 아자젤.”
루시퍼는 눈앞의 존재를 보며 전율이 일었다.
대지를 침식하는 불길함은 악마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응. 이것을 보고 싶었어.”
아자젤은 ‘저것’을 보며 옅게 웃었다.
저건 악마인가 인간인가.
린 테일러 때와는 달리 지수는 특별히 신체가 성장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달라지고 있었다.
허리춤까지 오던 머리카락은 무릎 뒤까지 길게 내려왔고.
순수한 흑발은 겉은 흑빛이었지만 커튼처럼 둘러진 암막은 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가 선명히 빛나고, 망가졌던 육체가 완전히 회복된다.
만신창이가 되었던 의상도, 흑색의 드레스가 되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어둠을 지배하는 공주와도 같이.
“그래, 그 모래시계는 미래의 시간을 불러오는 물건인가.”
루시퍼는 변하는 지수의 모습을 보며 라플라스의 모래시계가 가진 힘을 눈치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불러온 것일까.
악마이니 외모가 변하지 않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점은 눈앞의 여성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
‘이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에 이런 악마가 탄생했는가.’
그런 루시퍼의 말에 지수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훑었다.
흑색의 드레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하얀 손을 쥐락펴락하며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수는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까지 왔다?”
묘한 뉘앙스의 말에 루시퍼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루시퍼의 말을 들은 듯, 지수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네요.”
“적이 아닌 적도 있었나 보군.”
“이런 미래가 아니라면 말이에요.”
현재의 지수는 10년 후의 지수였다.
그녀는 마계에 오지 않았고, 세한이 마왕이 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도 되도록 당신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린 테일러.
그녀가 말했다. 과거를 만들 수 있는 분기가 생기리라고.
지금 그것이 만들어졌기에 자신이 그런 기억을 가지고 현재에 온 것일 테지.
미래는 이제 불확정해졌다.
광기의 마왕으로 가는 길은 이제 끊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세한은 폭식과 싸우며 상당한 힘을 소진했다.
이드라의 능력을 사용해 원거리로 도약할 수 없을 테고, 날아오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폭식과 오만의 영역은 마계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으니 전력을 다해 날아오더라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났을 것이다.
“열쇠를 얻어야 해서.”
지수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오른팔을 천천히 올리며 옆으로 뻗었다.
그 손에는 지수의 애병인 ‘흉성의 학살자’가 쥐어졌다.
흉성의 학살자는 기존에 지수가 사용하던 것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지금’의 지수가 아닌 ‘미래’의 지수가 사용하던 흉성의 학살자는 몇 배로 강화된 물건이었다.
“한지수.”
당장이라도 루시퍼에게 달려들 것 같은 지수를 부른 건 아자젤이었다.
흑색과 적색이 뒤섞인 지수의 마력을 보며 하나 궁금증이 생겼다.
“미래를 바꾸면 너는 사라질 거야. 그래도 후회하지 않니?”
지금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통해 불려온 지수는 10년 후, 광기의 마왕 엔딩을 거친 지수였다.
만약 다른 엔딩으로 확정된다면 분명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이 모습은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통해 빌려온 것이에요. 사라진다고 해도 당연한 거죠.”
“하지만 지금의 가능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거야. 너의 미래가 사라진다고 해도 괜찮아?”
“네.”
지수의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후회는 질릴 정도로 했어요. 곁에 있는 게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한지수로서 세한의 곁에 있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세한은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세한은 죽지 못해 살아야만 했다.
이드라를 잊은 자신과 지구의 인간들을 증오하였지만 극단적인 수를 쓰지는 않았다.
이미르에게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세한을 보며 지수는 진정한 의미로 ‘고통’을 깨달았다.
“그리고.”
드드드.
흉성의 학살자를 대지에 질질 끌며 루시퍼를 향해 걸어간다.
기대감이 깃들어 있는 오만의 악마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저를 얕보지 말아주세요.”
한지수라는 존재의 소멸.
모두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는 엔딩.
그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세한이라면 분명 답을 찾을 테니까.
광기의 마왕과 달리 그는 불완전하게 기억을 잃지도 않을 테니 정신이 망가질 일도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루시퍼를 꺾고.’
마계의 열쇠를 얻는 것.
“아아── 아아!!”
지수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새하얀 피부를 가로지르며 붉은 문양이 그려졌다.
발을 내딛은 대지는 부하를 견디지 못해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고, 마치 몇 배의 중력이 증가한 것처럼 사방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다.
쾅쾅쾅쾅쾅!!
지수의 가는 발이 한걸음 땅을 박찰 때마다 땅이 갈라졌다.
붉은 눈동자가 루시퍼를 응시하며 오른팔을 크게 뒤로 젖혔다.
콰아아아!!
그리곤 온 힘을 다해 집어던졌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가는 흉성의 학살자는 말 그대로 경로에 있는 모든 걸 믹서기처럼 갈아버렸다.
‘여기서 싸우다간 유적이 날아가 버리겠군.’
아까처럼 제자리에서 싸우는 건 무리다.
그렇게 판단한 루시퍼가 정면에서 달려드는 지수를 향해 오른손 손바닥을 뻗었다.
고오오오!!
손바닥 앞에 원형의 마법진이 생겨나며 빠른 속도로 마력이 응집됐다.
“「물러나라.」”
그의 언령이 발현되자, 손바닥을 중심으로 훅 바람이 꺾였다.
바람만이 아니다.
루시퍼를 향해 날아오던 흉성의 학살자가 그의 손바닥 앞에서 우뚝 멈춘 뒤,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마법은 아니다.
이건 좀 더 근본적인 힘이었다.
바로 척력.
그는 인력과 척력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었고,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다가올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지수는 루시퍼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까 전까지는.
콰아앙!!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
뒤로 튕겨져 나간 흉성의 학살자와 달리 지수의 발을 멈추지 않았다.
코뿔소처럼 직진하며 말 그대로 온몸으로 루시퍼를 들이 받았다.
“큭?!”
황급히 방어벽을 만들어 충격을 상쇄시켰지만, 갑작스럽게 만든 탓에 바로 파괴되고 말았다.
반면 지수는 양다리를 대지에 박아 넣으며 방어벽이 부서진 루시퍼의 양팔을 잡았다.
뚜두두둑!!
그러나 손이 루시퍼의 팔에 닿는 순간 손가락과 팔이 구부러지며 반대로 꺾였다.
전보다 척력의 힘을 배는 사용한 것이다.
‘양팔이 부러졌으니 바로 다음 공격은 이어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루시퍼는 재차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지수의 가슴팍을 노렸다.
다리는 대지에 박혀있고, 양팔이 사라졌으니 방어할 수단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수는 루시퍼의 공격을 방어할 생각이 없었다.
천살성인 지수에게 ‘방어’라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콰아앙!!
“……!!”
루시퍼의 손이 지수에게 닿는 것보다 빠르게.
지수의 머리가 망치처럼 휘둘러지며 루시퍼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 위력은 오만의 악마조차 순간 아찔하게 만들 정도로 위협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