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39화 (239/332)

# 239

239. 분기점(1)

마계로 떠나기 전, 이드라는 내게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이걸 받거라.”

녀석이 품속에서 꺼낸 건 검고 네모난 직사각형의 물체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라 생각했다.

니알라토텝이 이 세계의 시스템을 참조하여 만든 외우주의 열쇠.

“이건 ‘나’가 남긴 유산이로다.”

여기서 ‘나’는 1회차의 이드라를 가리킨다.

마지막에 작은 울음소리를 내며 사라진 전능에 가까웠던 존재.

오직 나를 위해 수억 년의 세월을 견디고 나를 만나러 와준 나의 파트너.

“이건 그것이 남긴 파편을 모아 만든 정수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참조한 탓에 비슷한 모양이 되었지.”

이드라는 검은 핵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는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걸 나한테 줘도 되는 거냐? 애초에 네 힘이나 마찬가지 잖아.”

“나는 이미 이걸 만들며 남아 있는 기억을 받아들였다. 우리들에겐 이런 힘의 파편은 무의미해. 기억 자체가 힘의 정수로다. 그러니 이건 네가 받는 게 맞다. ‘나’도 그것을 바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내미는 검은 핵을 나는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검은 핵은 딱히 무겁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기에 손에도 딱 맞았다.

“다만, 사용하는 건 각오가 되었을 때 하거라.”

“각오가 됐을 때?”

“그래.”

이드라는 검은 핵을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는 눈으로 보았다.

“그것을 사용하면 외신의 힘을 받아들이게 된다. 단순한 신격이 아니라, 외신의 본질 자체를 그대의 몸에 끼어넣는 것이다.”

“……문제가 있나 보군.”

이드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외신을 뭐라 생각하느냐.”

“글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게 외신이란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뜻했다.

외계에서 온 침략자이자, 평범한 신들보다 고위에 속한 존재들.

내가 외신에 가진 인식이란 그 정도였다.

“간단히 말해서 외신이란, 시스템에 벗어난 이다.”

“시스템에서 벗어났다?”

“예를 들자면 악마가 있지. 너도 알다시피 악마들은 시스템의 속박에서 자유롭도다. 녀석들의 스킬이나 힘은 그냥 시스템의 힘을 이용해 표현할 뿐이다. 그것에 속박된 것이 아니야.”

확실히 그렇다.

악마는 시스템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과 계약한 플레이어는 ‘계약자’이지 아바타가 아니다.

“우리는 외우주에서 왔기에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외신.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은 이들이야. 다른 신들과 다른 것도 그것 때문이다. 뭐, 니알라토텝은 우주적으로 세상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모양이다만.”

그래서 만든 게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인 모양이다.

녀석은 외신으로서의 힘보다 그런 재주에 능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1회차에서 너의 아바타였는데? 그 말대로라면 나도 계약자라 불리어야 되는 거 아냐?”

“우리는 악마와 달리 이쪽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게임에 참여가 가능한 건 ‘신’으로서 우리를 시스템에 등록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긴 그건 그렇군.

적당히 납득하자 이드라는 낯빛을 굳히며 딱딱하게 말했다.

“이것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각오를 하고 네 가슴에 가져대거라.”

“가슴에?”

“정확히는 심장이 있는 곳에.”

이드라의 금안이 섬뜩하게 빛났다.

마치 경고를 하는 것처럼.

“다만,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그대에게 달려 있도다.”

***

손에 쥔 검은 핵은 묘하게 따뜻했다.

1회차 이드라가 나를 지켜보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끝까지 함께하겠구나.’

나는 녀석과 좋지 않은 결말로 헤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드라는 끝까지 나를 쫓아왔다.

결국 이런 모습이 되면서까지 나의 곁에 남았다.

죽는 건 아니다. 이건 결국 녀석의 잔재니까. 기나긴 시간이 지난다면 언젠가 되살아날 수도 있을 테지.

그때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두근.

검은 핵을 천천히 가슴에 대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신격과 마력,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무언가가 심장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큭!”

끔찍한 격통이 전신을 달렸다.

존재 자체를 흔드는 고통. 수많은 고통을 맛본 나였지만 그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나를 나로 있을 수 없게 하는 힘이 전신에 휘몰아치며 전신으로 뻗어갔다.

[에러. 정체를 알 수 없는 프로세스가 접근중입니다.]

이드라의 힘이 퍼지기 무섭게 알림이 울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이건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인간, 아니 생명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어째서 이드라가 경고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외신이라는 존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힘이 없다면 벨제부브를 쓰러트리는 건 무리다.

녀석은 지금 나를 터치하지 않고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해보라는 것처럼.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는 미식가의 눈으로 나를 품평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요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답은 뻔했다.

[에러. 더이상 프로세스를 허용하면 존재 자체가 소멸하게 됩니다.]

경고음이 한층 심해졌다.

끔찍한 격통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코앞에서 다가온 죽음이, 가슴팍에 쑤셔 넣은 것을 빼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안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의식을 붙잡는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근원을 느낀다. 1회차에서 계속 함께했던 파트너의 기운을 찾는다.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가닥가닥 흩어진 그것을 하나하나 풀어낸다.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고, 정신이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았지만 어떻게든 견뎠다.

나는 재능은 부족할지언정 인내심만큼은 자신 있었다.

‘됐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만들고, 풀린 실에 나의 신격을 연결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전신을 찢어버릴 것 같았던 통증이 점차 옅어진다.

귀에서 계속 울리던 경고음도 사라졌다.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눠서 받아들이면 된다.

딱, 벨제부브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엉킨 실타래를 전부 풀어낼 수는 없었지만, 일부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고오오오!

평소라면 ‘꿈의 마녀 이드라의 힘을 받아들입니다.’와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스템이 지금 일어난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작 일부.

내가 지금 연결시킨 건 1회차의 이드라가 지니고 있던 힘의 일부 중의 일부다.

본체의 힘은 요그소토스를 죽이며 대부분 소멸했고, 남은 파편들을 모아 핵으로 만든 것이니까.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외신이 보던 세계였다.

***

벨제부브가 세상을 구분하는 건 단 두 가지였다.

음식과 음식이 아닌 것.

그에게는 신도 악마도, 그리고 외신과 거인조차도 다 똑같았다.

폭식의 권능을 지닌 자신이라면 무엇이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무법자였고, 폭식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폭식’이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악마가 되어 마계를 지배하고자 생각했다.

루시퍼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오만의 좌에 있는 대악마이자 마계를 통솔하는 지배자.

마왕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그는 벨제부브를 정면에서 박살 내어 그의 의지를 꺾었다.

루시퍼의 힘을 먹을 수 있었다면 모른다.

하지만 루시퍼는 벨제부브가 식사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처참히 패배한 벨제부브는 자신의 영역에 틀어박혀 때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이긴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한 어린 악마의 등장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나타나 나태의 좌를 차지한 악마.

아자젤이라 불리는 신과 악마의 혼혈.

그녀의 존재는 벨제부브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만약 녀석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은 동등하지만 시간이 지난다면?

그래서 벨제부브가 생각한 것이 바로 마왕의 자리였다.

모든 악마를 통솔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마왕이라면 모든 게 해결된다.

굳이 강한 힘을 탐할 필요도 없고, 루시퍼와 아자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강한 아군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도 흔들렸다.

분노의 악마가 죽은 기회를 노려 7대 악마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아자젤이 끼어든 것이다.

정체불명의 악마를 한 명 데리고.

‘그 계집들을 막아야 한다.’

겨우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아자젤이 데리고 다니는 악마는 ‘지구’에 속한 플레이어였다.

아직 플레이어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아자젤이 키운 악마.

그리고 그 계집은 까마귀자리의 김세한을 좋아했다.

그의 말이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만큼.

‘처음에는 적당히 가지고 놀다 사로잡으려고 했건만.’

그래서 김세한이 폭식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기뻤다.

놈을 사로잡아 아자젤과 그 계집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크흐흐흐, 이건 또 뭐냔 말이다.”

길디 긴 세월을 살아온 벨제부브였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김세한에 대한 정보는 조금씩 들었다.

퍼블리셔에게서 별을 탈환했다거나, 외신을 아바타로 삼았다거나 하는 터무니없는 소문.

당연히 대부분은 헛소문이라 생각했다.

외신이 아바타가 되었다는 말은 대악마인 자신이 한낱 플레이어의 수하가 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거기다 놈들은 ‘감정’ 자체를 제대로 지니지 않았다.

인간을 먼지보다 못하게 보는 놈들이 인간에게 복속했다고?

“설마 사실일 줄은.”

거기다 단순한 아바타가 된 게 아니었다.

겨우 그뿐이라면 지금 천천히 눈을 뜨는 남자가 이 정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이것도 일부에 불과하다.’

방금 세한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

막으려고 한다면 막을 수 있겠지만, 그의 몸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에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건 만찬이다.

검은 머리칼에 밝은 금색의 머리털이 브릿지처럼 생겨나며, 한쪽 눈은 금색으로, 다른 쪽 눈은 노을빛으로 물든다.

저건 신격의 노출로 변한 게 아니다.

‘꿈의 마녀’의 본질을 흡수하여 달라졌을 뿐이다.

‘저것을 먹는다면.’

벨제부브의 입가에 야수와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완성된 ‘저것’을 먹는다면 마왕이 되지 않더라도 루시퍼에게도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순한 외신의 힘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저 안에 숨겨져 있었다.

‘더 이상은…….’

반개한 눈으로 고요하게 서있는 세한을 보며 벨제부브는 입가에 줄줄 침을 흘렸다.

바닥에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음에도 그는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한 입, 딱 한 입이라도 먹어보게 해다오!!”

그의 몸이 낮춰지며 양팔로 지면을 내딛는다.

아까와 같은 자세였지만 속도는 전혀 달랐다.

지방과 살덩이로 뭉쳐져 있던 육신과 달리 지금은 근육질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콰아아아!!

공기가 밀려나는 충격파가 일어나며 반경 수백 미터가 단 한걸음에 초토화된다.

양손은 세한의 몸을 붙잡기 위해 뻗고, 그의 입이 세한을 한입에 먹어치우려는 것처럼 쩍 벌어진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세한을 사로잡아 정보를 얻어야 된다는 생각이 사라져 있었다.

“우선 너에게는 감사하도록 하지.”

코앞까지 다가온 벨제부브의 얼굴을 보며 세한은 차분히 말했다.

만약 벨제부브가 호기심 삼아 기다리지 않았다면 세한은 이드라의 힘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심지어 지속시간도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당장 숨이 멎을 것만 같았으니까.

만약 재생스킬과 지수의 ‘천살성’이 아니었다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몸이 폭발했으리라.

“이쯤 되어야 연습이 되겠지.”

늘어트리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검지만 하늘을 향해 까딱 움직였다.

세한이 한 행동이라곤 고작 그것이었다.

당장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서 덤벼드는 야수에게 하기엔 너무나 하찮은 행동.

고작 그뿐인 것이 거대한 이변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땅이 치솟으며 코앞까지 다가온 벨제부브의 몸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저항할 틈도 없이 벨제부브의 시야는 하늘 위로 바뀌어 있었다.

단번에 구름이 있는 상공까지 날려버린 것이다.

‘마법인가?!’

아니다. 마법이 아니다.

단순히 땅을 치솟게 만드는 마법이라면 달려들던 벨제부브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다.

이건 대지의 형상을 한 무언가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벨제부브를 이토록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환상.’

치솟았던 대지가 빛의 부스러기가 되어 사라진다.

미약하게 남아있는 마력의 잔향과 평평한 대지가 방금 일어난 일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말해줬다.

정말로 대지가 솟아올랐던 것이면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으니까.

‘환상을 실체화시켰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전승스킬’ 따위가 아니었다.

상상하는 모든 게 자신의 힘이 된다는 것이었으니까.

한계야 있겠지만, 지금 보여준 것만으론 그 한계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전능의 편린.

신이 도달할 수 있는 종착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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