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238. 칠죄종(3)
후둑, 후두둑.
거대한 덩치를 지닌 벨제부브가 대지를 부수며 나동그라진 탓에 솟아올랐던 흙먼지와 돌무더기가 떨어져 내렸다.
진천백에게 사용했을 때처럼 모든 힘을 쥐어짜 공격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혈천수라공으로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이었다.
‘이 정도로는…….’
벨제부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복부 부분이 붉게 부어 있었지만 큰 상처로 보이지는 않았다.
“크흐흐흐.”
놈은 낮게 웃으며 아까보다 한층 자세를 낮췄다.
육식동물이 사냥감을 발견한 것처럼 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오만할 만큼 실력은 있구나.”
쩌억, 벨제부브의 입이 벌어지며 침이 뚝뚝 떨어졌다.
평범한 인간 따위는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을 만큼.
드드득.
놈이 몸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며 지면이 뭉개진다.
쾅!!
발을 박차자 방금 공격으로 날아갔던 거리를 단번에 좁힌다.
‘빠르다!’
방금 전보다 한층 속도가 올라가 있었다.
자세히 보면 녀석의 몸을 감싼 지방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크흐하하하!”
달려드는 녀석의 거리를 계산해서 허수 공간을 열고 금속덩어리들을 하늘에서 낙하시킨다.
족히 수백 킬로그램은 되는 무게의 묵철 덩어리들.
그것을 하늘에서 낙하시키자 마치 운석처럼 떨어져 놈의 몸을 강타한다.
쿠쿠쿠쿠쿵!!
철의 운석이 떨어지며 대지를 마구잡이로 파괴했지만 벨제부브의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도리어 녀석의 손이 뻗어지며 떨어지는 둥근 묵철을 잡아챈 후,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와직!
마치 과실을 베어먹는 짐승처럼 벨제부브는 거대한 철덩어리를 씹어 삼켰다.
그러자 녀석의 등이 묵철의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역시 성가신 능력이야.’
나는 짧게 혀를 차며 정면에서 달려드는 녀석의 공격을 허리를 숙여 피했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에 몸이 저릿저릿해졌다.
‘폭식이라는 건 이름뿐이 아니라는 거지.’
폭식의 악마, 벨제부브가 가진 권능은 말 그대로 ‘식사’다.
흔히 내가 린이 타인의 기술을 배우는 걸 식사라고 표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묘사일 뿐.
진짜 그것을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벨제부브는 다르다.
놈은 정말로 먹어치운다.
한번 먹으면 일시적으로 먹은 것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같은 것을 3번 먹으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1회차에는 그 사실을 몰라 이드라의 허수공간을 빼앗겼었다.
철컹!!
내 양옆에서 허수 공간이 열리며 흑색의 포신이 나온다.
시우가 새롭게 만들어낸 장비였다.
콰과과광!!
코앞에서 포격이 가해지자 벨제부브의 몸이 크게 밀려난다.
묵빛으로 변한 피부가 우그러지며 붉게 달아올랐다.
‘한번 공격을 할 때마다 최상급 마력석이 하나 소모되지만…….’
위력 하나는 절륜했다.
처음으로 벨제부브의 얼굴이 찌푸려졌으니까.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있군.”
“이기기 위해선 뭐든 사용하는 주의라서.”
나의 재능은 상대적으로 린이나 지수에 비하면 떨어졌다.
그만큼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그 갭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앙!!
한번 포격이 가해질 때마다 수백 미터가 초토화되며 벨제부브의 몸이 움찔거린다.
어디까지나 벨제부브에게는 조금 귀찮은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약간의 귀찮음이 있기에 내가 지금 정면에서 벨제부브를 상대할 수 있었다.
녀석의 손이 내 머리를 내려치려는 순간 포격이 가해지며 팔이 살짝 흔들린다.
난 그틈을 노려 녀석의 옆구리를 빠져나가 녀석의 무릎 뒤편을 칼로 찔러넣었다.
드드득!
녀석의 살갗을 뚫지 못하고 칼날이 긁히고 지나갔지만, 벨제부브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틈을 노려 프라가라흐가 벨제부브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마치 파리 같은 놈이구나!”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프라가라흐를 향해 벨제부브의 입이 쩍 벌어졌다.
프라가라흐를 집어삼키려는 것이다.
‘그걸 노렸다.’
놈이 시선이 프라가라흐로 향한 틈을 노려 등 뒤에 허수공간을 열었다.
허수 공간에서는 은색으로 빛나는 장치가 튀어나오며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벨제부브와 싸울 때를 대비해 만든 장비 중 하나였다.
효과는 간단.
강력한 자성(磁性)을 지녀 근처에 있는 금속으로 된 물체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벨제부브의 육신은 묵철을 먹어 금속화가 되어 있는 상태.
강력한 자성으로 인해 벨제부브의 몸이 뒤로 밀리며 젖혀졌다.
“큭!”
더불어 근처에 지면에 떨어져 있던 묵철들까지 끌어 당겨지며 벨제부브의 전신을 마구잡이로 강타했다. 큰 충격은 되지는 못했지만, 벨제부브의 시야를 방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지금 녀석은 나를 완전히 놓쳤다.
그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녀석의 피부와 지방을 뚫으려면 모든 힘을 한 점에 집중해야 해.’
쿠웅!
진각을 디디며 한달음에 벨제부브에게 접근한다.
전신에 몰아치는 마력이 심장의 혈류를 따라 팔에 집중되고, 신격이 나선처럼 회전하며 금색의 빛무리를 만든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천수라공의 힘을 완벽히 통제하며 팔을 넘어 손에 쥔 검에 휘감는다.
‘빠르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달리며 팔을 내지른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소리를 앞지르고 빛의 영역에 발을 디딘다.
‘강하게.’
혈천수라공의 초식 중 가장 빠르고 기본이 되는 초식.
수라(修羅).
그것이 다시 한번 펼쳐지며 텅 비어 있는 벨제부브의 명치를 찔렀다.
콰콰콰콰!!
대지가 일직선으로 쭉 갈라지고, 바람이 밀려나며 순간적으로 진공 상태가 만들어진다.
진천백을 꿰뚫었을 때보다 한층 발전된 수라의 일격.
계산한 대로라면 벨제부브는 이것에 꿰뚫렸어야만 했다.
1회차에 싸웠던 벨제부브의 육체 강도를 상정하고 가한 일격이었으니까.
‘역시.’
검은 확실히 벨제부브의 살갗을 꿰뚫었다.
딱 1센티미터 정도.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결코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의 몸은 전보다 한층 단단해져 있었다.
내 전력을 다한 수라로도 고작 이 정도가 한계일 만큼.
“그게 본모습이었나.”
“크.”
시선을 위로 올리자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고 있는 벨제부브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크흐흐흐흐. 재미없구만.”
지방덩어리의 육중한 육체는 날씬하게 변해 있었다.
신장은 여전히 컸지만, 전신이 근육으로 덮여 방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펼친 ‘수라’는 근육질로 변한 녀석의 몸을 꿰뚫지 못하고 조금 박히는 것에 그쳤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악마에게 저 정도 상처는 사실상 노데미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떤 것도 내 본모습이다. 이건…… 그래. 소화를 시킨 거지.”
검은 흑발이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붉은 동공이 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기왕이면 전부 먹어치우고 소화를 시키고 싶었다만.”
녀석은 손을 뻗어 자신의 몸에 박힌 검으로 두 손가락을 뻗어 잡았다.
챙캉!
신격으로 둘러져 있는 검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좀 더 굶주리고 먹는 편이 맛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녀석의 지방과 살덩이는 그 자체가 녀석이 잡아먹은 ‘무언가’다.
그것은 재능이나 스킬일 수도, 전설의 무기일 수도 있다.
벨제부브는 무엇이든 먹어치울 수 있다.
나는 마계 무투제를 생각했을 때부터 놈과 다시 싸우는 걸 상정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때는 벨제부브의 힘을 그저 막연하게 상상했다.
1회차에 내가 본 벨제부브의 힘은 방금 전 그 살덩어리 모습이 끝이었으니까.
그 모습의 벨제부브에게 처참히 패배했기에 그 이상이 있다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싸울 걸 상정했으면서도 되도록 놈을 피하고자 했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는구나. 재미가 없어.”
벨제부브가 계속 여유로웠던 것도 이해가 갔다.
지금 벨제부브의 몸에서 느껴지는 힘은 방금 전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먄약, 린과 반고가 싸우는 걸 보지 못했다면 식은땀 정도는 흘리고 있었겠지.
“대악마라 불리는 이가 고작 이 정도라 생각하진 않았거든.”
“고작? 크흐흐하하하! 그걸 고작이라고 말하다니! 너는 생각보다 재밌는 놈이로구나!”
분명 살덩이의 벨제부브도 강했다.
7대 악마 중 4위 이하라면 그 모습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대악마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서열 3위 이내의 대악마.
아무리 아자젤이 서열에 관심이 없어도, 벨제부브가 약하다면 2위의 자리를 내어줄 리가 없었다.
벨제부브를 쓰러트리려면 아자젤도 전력으로 가야 할 정도.
그런 ‘노력’을 해야 되기에 아자젤은 벨제부브에게 서열을 양보했다.
당연히 벨제부브의 힘은 최소 반고 이상이라고 봐야 했다.
린과 싸우는 반고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전능에 가까운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녀석보다 강하다면 겨우 이 정도 잔재주로 쓰러트릴 수 있을 리가 없지.
“하나 물으마.”
벨제부브가 웃음을 뚝 그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보여준 것들이 네 전력인가?”
“그래.”
“……흐음. 그렇군. 뭐, 그것만으로 대단하긴 하다만.”
녀석은 조금 아쉽다는 얼굴이었지만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벨제부브의 본 모습을 본 것만으로 대단한 업적이었으니까.
예전이었다면 이 정도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 전력이지.”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뒤가 없었다.
현재 김세한이라는 플레이어가 낼 수 있는 한계는 이 정도였다.
좀 더 시일이 지난다고 해도 벨제부브를 이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린이나 지수처럼 하늘이 내린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
특별한 특성을 지녔지만, 그건 지금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1회차의 기억에서 볼 수 없었던 벨제부브의 모습이었기에 공략을 알 수도 없었고, DLC 상점으로는 이런 초월자를 쓰러트릴 아이템을 얻을 수 없었다.
나 혼자서는 이게 끝이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물러나고 좀 더 이길 확률을 높인 후에 다시 덤볐을 거다.”
만약 마계에 아자젤과 지수가 없었다면, 그리고 이미르가 좀 더 여유를 줬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결코 도박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1회차의 나는 그랬다.
언제나 최적의 루트를 산정하고 최대한 안전한 길로만 가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피해가 발생하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약하니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고, 애써 자위하면서.
“그런데 한 아이를 보고 느꼈어.”
반고와 싸우던 린은 솔직히 말해서, 내 예상 밖이었다.
린이 반고의 천적이라는 건 알았지만 반고의 힘은 내 예상을 웃돌았고, 이미르까지 페트로이아에 있었다. 솔직히 린이 반고를 이긴 건 운이었다.
하지만 그 행운으로 내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업적을 만들었다.
‘고작 어린아이가.’
아무리 린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린아이다.
나의 도움 없이 홀로 반고를 토벌하는 건 무리였다.
그럼에도 린은 해냈다.
그녀가 가진 재능은 분명 대단했고, 그 덕을 본 건 맞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다.
특별하기로 따지자면 반고도 충분히 특별한 존재였다.
태초의 거인이자, 시간마저 자신의 의지로 조정할 수 있는 초월자.
그런 대단한 존재를 린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1회차의 나와 달리 앞으로 나설 용기가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무모함에 도전할 용기.
이제 나도 그것을 지닐 때였다.
나는 천천히 벨제부브에게서 떨어졌다.
두 동강난 검은 대충 바닥에 버렸다.
“벨제부브.”
내 부름에 녀석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뭐냐.”
놈은 내 이런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본 모습을 내보인 벨제부브와 태연하게 대화를 하는 존재가 얼마나 있겠는가.
처음에는 낄낄거리고 있던 놈도 내가 이렇게 나오자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다.
나는 약했기에, 약함을 감추는 방법을 알았다.
거기다 이미 이미르도 코앞에서 봤잖아.
이제와 이 정도로 흔들릴 내가 아니다.
‘정말 이것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되도록 좀 더 시간을 두고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 다른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
나는 천천히 허수공간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직사각형의 네모난 무언가.
검은 부등변다면체. 혹은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이라 불리는 물체와 꼭 닮은 그것을.
당연히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은 아니다.
그건 지금 이드라가 가지고 있었다.
이건 말 그대로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것.
“네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요리를 준비해 주지.”
바로, 1회차 이드라의 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