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237. 칠죄종(2)
“진심인가? 아자젤.”
“이런 곳에서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잖니?”
“그건 그렇군.”
루시퍼는 아자젤과 지수를 번갈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몬을 죽인 게 저 여자였나.’
마계 전역을 관리하는 루시퍼는 마몬이 죽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파장에 마몬을 죽인 악마가 누구인가 싶었지만, 설마 저런 어린 악마일 줄이야.
탄생한 지 불과 몇 달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에서 악마로 변했으니 몸에 겨우 적응했을 시간이었다.
“확실히 재능이 있는 이를 찾았어. 너의 후계자로 키울 생각인가?”
“악마에게 그런 게 어디 있니? 그리고 내 후계자가 아니라니까. 얘는 이제부터 마왕의 시험에 도전할 거야.”
“솔직히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군.”
“넌 그냥 이 아이를 인정하는 걸로 충분해.”
단호한 아자젤의 말에는 조금의 농도 섞여 있지 않았다.
아자젤이 아주 어린 악마였을 때부터 지켜봐온 루시퍼로선 그런 그녀의 모습이 무척 생소했다.
지구에 다녀오더니만 상당히 감정적이 되지 않았는가.
“내가 순순히 인정해 주리라 생각하나?”
“그건 모르는 일이지.”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루시퍼는 의아해졌다.
그녀가 자신의 힘을 모를 리가 없다.
저 소녀가 대단한 건 맞지만, 오만의 악마라 불리며 마계를 관리하는 자신에 비하면 부족할 따름이었다.
설령 이미르라고 해도 저렇게 행동하지는 못하리라.
“어린 악마여.”
“……?”
재미없다는 얼굴로 조용히 서있던 지수는 루시퍼의 부름에 시선을 옮겼다.
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무감정한 시선이 루시퍼는 조금 신기했다.
“본래라면 이렇게 경고할 필요도 없이 너를 지워버렸을 것이다. 허나 아자젤과 너의 재능을 봐서 다시 기회를 주겠다.”
“기회인가요?”
“솔직히 아직 너는 ‘대악마’의 영역에 발을 디디기는 이르다. 조금 더 시일을 두는 편이 어떻겠나. 새로운 분노의 악마를 쓰러트리는 방법도…….”
“싫어요.”
루시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수는 단칼에 답했다.
“그래서는 늦어요.”
“무엇이 늦는다는 거지?”
“저는 마왕이 되어야 해요.”
마치 자신이 인정만 해준다면 언제든 마왕이 될 수 있다는 태도다.
루시퍼는 이런 악마들을 오래전에 봤었다.
아직 열쇠의 악명이 널리 알려지기 전, 마왕의 자리에 도전했던 악마들은 대체로 저런 태도를 보였다.
왕관을 머리에 쓰기만 하면 마왕이 되어 마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처럼 떠들었다.
하지만 그런 악마들은 단 한 명도 마왕이 되지 못했다.
선대 마왕이 죽고 수만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마왕의 시험에 도전하면 너는 사라진다.”
지수의 재능이 진심으로 아까웠던 루시퍼는 결국 시험의 내용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전했다.
“…….”
가벼운 반문이라도 돌아올 줄 알았건만, 지수의 얼굴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알아듣지 못했나? 마왕의 좌에 실패하면 너는 사라진다.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야. 너의 정보가 완전히 말소되어 누구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시스템이 탄생하여 마계에 열쇠가 전해진 순간부터 마왕의 자리를 도전한다는 건 그런 의미가 되었다.”
루시퍼는 지수와 아자젤을 번갈아보며 이야기했다.
7대 악마 중 타인에게 ‘시험’에 대한 정보를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루시퍼뿐이었다.
“본디 인간이었던 너라면 소중한 사람이 한두 명은 있겠지. 너를 사랑해주는 이들. 그들도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지수가 조금만 재능이 떨어졌다면, 혹은 아자젤과 관련된 이가 아니었다면 루시퍼는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죽여버리거나, 두들겨 패서 영역 밖으로 내쫓았을 것이다.
이건 루시퍼가 지수에게 향하는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너의 이름, 얼굴. 그 어떤 것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너와 관련된 기억들은 개변된다. 그리고 잊혀진 자는 허무 속에서 떠돌다. 자신조차 잊고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상태가 되지.”
보통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이다.
시험이 내용에 대해서 7대 악마는 결코 발설할 수 없다.
하지만 오직 루시퍼만이 그것을 한정적으로 어길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타인에게 시험의 내용을 말한 건 긴 시간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상관없어요.”
“……내 말을 이해하긴 한 것이냐?”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최후를 들었음에도 지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지수의 반응에 루시퍼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애초에 알고 왔다는 건가?”
루시퍼의 말처럼 지수는 민수아를 통해 미래를 읽었음에도 이 선택을 했다.
이제와서 무슨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결심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좋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저 어린 악마는 결코 설득되지 않으리라는 걸 루시퍼는 깨달았다.
“내게 인정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르쳐주지.”
그렇다면 쓰러트리면 그만이다.
아자젤의 것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수는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는 루시퍼를 보며 작게 심호흡했다.
언제라도 덤비라는 것처럼 빈틈을 내보이고 있었지만,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잊혀진다라…….’
지수는 방금 루시퍼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 선택이 옳은 건지는 솔직히 모른다.
그저, 세한이 마왕이 되는 모습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다.
“가.”
아자젤이 짤막하게 말하며 지수의 등을 두드렸다.
지수는 그런 아자젤을 잠시 바라보았다.
타인에게 그다지 감정을 주지 않는 지수지만 아자젤은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피를 받은 순간부터 뭔가가 달라졌다.
그것은 분명 아자젤도 비슷하리라.
‘아무래도 좋아.’
지수는 루시퍼를 바라보며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가다듬었다.
감정을 막대한 마력으로 변환시켜 신격으로 그릇에 크기를 키운다.
고오오오!
새빨갛게 눈동자가 붉게 물들며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마치 야생동물이 사냥하기 전처럼.
지수의 전신을 타고 붉은 실선이 그어지며 문신처럼 전신에 새겨진다.
달아오르기 시작한 신체, 그리고 뜨거워진 숨결.
몸은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었다.
“와라.”
루시퍼의 짤막한 말이 신호가 되어 지수의 신형이 대지를 박차며 달렸다.
극성에 이른 혈천수라공이 전신에 소용돌이치며 신격을 펌핑시킨다.
검은 머리카락에 적색의 기운이 맴돌며 허공에 붉은 잔상을 만든다.
‘과연. 육체의 강함을 믿고 싸우는 타입인가.’
어느새 지수의 오른손에는 거대한 둔기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상대를 단순히 때려죽이는 게 아닌 찢어죽이기 위한 무기.
콰아아앙!!
수직으로 휘둘러지는 그것을 루시퍼는 가볍게 팔을 들어 막았다.
딛고 있는 지면이 쩍 갈라졌지만 그의 신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단 한 팔로 막는 루시퍼의 모습에 지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반동으로 살짝 균형이 무너진 그녀의 복부에 루시퍼의 손바닥이 닿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면 모르겠다만.”
루시퍼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는 동시에 손바닥의 앞에 새까만 구체가 만들어지며 대지가 타오른다. 막대한 에너지가 뭉친 검은 구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지수의 복부를 그대로 관통하며 그녀의 몸을 직선으로 날려 버렸다.
“큭!!”
파동에 밀려 날아가던 몸을 어떻기든 바로 세운다.
절반이 넘게 날아간 허리는 단숨에 재생시키고 루시퍼를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이 정도로…….’
강하다는 건 예상했지만 루시퍼의 강함은 정말 규격 외였다.
7대 악마 중 상위에 위치한 3명은 격이 다르다는 말을 들었지만 마몬과 이토록 차이가 심할 줄이야.
아자젤은 그런 지수를 보며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망설이고 있네.’
아직 열쇠를 차지해야만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이 선택이 올바른지 망설이는 것이다. 엔딩도 이미 들었고, 자신의 마음에도 확신을 지녔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세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단지 그것이 지수의 마음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다.
분명 ‘착한 아이’라는 특성 때문일 테지.
‘아직 나쁜 아이가 될 각오가 부족해.’
지수는 튕겨나가고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루시퍼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마몬조차 제대로 막을 생각도 못한 지수의 공격을 루시퍼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현재 루시퍼는 자신이 힘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이 무의미한 싸움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인 모습이었다.
지수는 저 고민이 끝나기 전에 답을 내려야만 했다.
아무리 지수가 빠르게 강해졌다고 해도 루시퍼와 정면에서 싸우기엔 부족했다.
아자젤은 분명히 느꼈다.
바로 여기가 미래의 린이 말하던 ‘분기점’이라고.
***
육중한 벨제부브의 몸체가 대지를 말 그대로 갈아버리며 나를 향해 질주했다.
두툼한 비계와 살들은 내가 휘두르는 검 정도로는 기스조차 나지 않을 정도.
‘그때와 달리 신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상처를 낼 수 없는 건가?!’
대충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역시 벨제부브의 신체는 평범한 악마와는 차원이 달랐다.
순수 자신의 육체의 강함을 내세우며 싸우는 벨제부브는 어떤 의미로는 지수와 비슷했다.
“크흐흐흐, 제법 잘 피하는구나.”
끔찍한 외형과 말투와 달리 여전히 목소리는 위압감이 넘쳤다.
녀석의 오른팔이 지면을 향해 휘둘러지자 그것을 옆으로 피한 후,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찔러 넣었다.
방금 전보다 신격을 집어넣은 것이었지만, 창날의 끝은 깔끔하게 부러졌다.
“칫!‘
콰아아앙!! 콰아앙!!
마치 아기가 몸부림치는 것처럼, 거대한 육신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나를 향해 공격한다.
단순할 뿐인 공격이지만 그 여파로 깔끔한 모습이던 홀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여기서 싸워봐야 좋을 것 없겠어.’
나는 그대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성의 창문을 깨부수며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안고 있던 민수아를 대충 바닥에 내려놓았다.
“최대한 싸우는 곳에서 멀리 피해.”
“아, 알겠어요.”
“스킬 아끼지 말고 사용해라. 죽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네, 네.”
더듬거리는 민수아의 모습은 방금 벨제부브가 덤벼들던 광경이 생각났는지 안색이 새파래졌다. 아무튼 미래를 볼 수 있는 녀석이니 쉽사리 죽을 일은 없을 테지.
콰차차창!!
나를 쫓아 창문을 부수며 튀어나오는 벨제부브의 모습이 보였다.
수아에게 달리라는 신호를 보낸 후, 재차 날개를 펼쳤다.
“이제와서 장소를 바꾸는 것이냐!”
“좁은 곳은 나랑 안 맞거든.”
이 녀석에게는 허수공간을 열어 무기를 투척하는 공격은 무의미할 것이다.
무의미하게 지닌 장비를 낭비하는 행동일 뿐일 테지.
‘이곳에서 싸우면 민수아만이 아니라 다른 마족들까지 휘말릴 거다.’
그러니 최대한 넓은 평야로 놈을 유도해야 했다.
놈의 목적이 나를 사로잡는 것인 이상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날파리 같은 놈!”
콰과쾅!!
녀석이 발을 구르자 두툼한 살덩이가 하늘을 날았다.
그 모습은 이 상황조차 잊을 만큼 장관이었다.
“이런 미친!”
“귀찮게 어디까지 갈 생각이냐!”
하늘을 날아오른 녀석의 손은 내 다리 근처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 후, 지상으로 떨어졌다.
놈이 떨어진 충격에 도시의 건물이 몇 개나 무너졌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마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싸워봐야 네 영역에 있는 마족이나 악마들이 죽을 뿐이야!”
“겨우 그런 것에 죽는다면 마계에 사는 생물로서 수치지. 약한 놈이 죽는 게 무슨 문제가 있나?”
하여간 악마 중엔 제정신인 놈이 없다.
도시의 건물을 부수며 나를 향해 직진하는 놈의 행동에 나는 기가 질릴 정도였다.
‘1회차에도 느꼈지만 목표를 정하면 정말 앞뒤 안 가리고 덤비는 놈이군.’
그러니 폭식의 자리까지 포기하며 열쇠에 도전했지.
돼지 같은 면상과 달리 저돌적인 녀석이다.
‘이 정도면 되려나?’
적당히 중앙도시에 멀어졌을 때, 나는 허수공간을 열었다.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오며 빠른 속도로 벨제부브를 향해 날아갔다.
“프라가라흐!”
린의 손을 거친 프라가라흐는 전과 달리 새하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응? 뭐냐 이건?”
머리를 노리고 쇄도하는 프라가라흐의 모습에 벨제부브는 귀찮다는 얼굴로 팔을 내저었다.
푹!
“……음?”
여태까지 내가 가했던 공격처럼 적당히 쳐내려했던 모양이지만 프라가라흐는 녀석의 두터운 피부와 지방을 뚫고 팔에 박혔다.
‘그래, 프라가라흐는 먹히는 구나.’
역시 SS급 무기.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벨제부브의 피부를 가른 것만으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놈의 신체는 반고보다 조금 약한 수준의 강도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흥!”
팔에 난 상처를 힐끗 본 벨제부브는 오른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곤 대지를 강하게 내리쳤다.
쿠우우우웅!!
벨제부브를 중심으로 쩍 갈라진 대지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며 땅이 마구잡이로 치솟았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강렬한 충격에 내 신체가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큭!!”
주먹을 한번 내리친 것만으로 이정도 충격이라니.
나는 허수공간을 열어 거대한 방패를 꺼냈다. 흙먼지 때문에 벨제부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1회차의 전투를 생각해보면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콰과광!!
들고 있는 방패가 우그러지며 내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시우가 오리하르콘을 섞어서 만든 방패가 단번에 망가졌지만 내 몸에는 특별한 충격이 없었다.
그야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만든 것이었으니까.
드드드!!
방패가 부서지긴 했지만 충격을 옆으로 흘려내며 벨제부브의 몸으로 한층 파고들었다.
나는 강하게 진각을 내딛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전신의 신격과 마력이 요동치며 전신에서 나선으로 회전했다.
오른쪽 눈은 금색으로, 왼쪽은 적색으로 물들며.
극성에 이른 혈천수라공의 힘이 오른팔에 모여든다.
“수라(修羅).”
녀석의 복부에 내 주먹이 박혀들었다.
콰아아앙!!
굉음이 울리며 흙먼지가 일제히 밀려나며 벨제부브의 육신이 수백 미터 밖으로 날아갔다.
“……좋아.”
방금은 분명 손맛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