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235. 열쇠의 시험(2)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이드라를 보며 누군가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저기……,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 아니지……?”
그건 바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앉아 있던 민아였다.
그녀는 평소와 다른 이드라의 반응에 내심 긴장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뭐하러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려?”
민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어릿광대, 로키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퍼블리셔에게서 독립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굳이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냐는 거야.”
“그렇게 이 별의 운명이 신경 쓰이는 게냐?”
이드라의 말에 로키는 입을 조용히 닫았다.
그런 로키의 반응에 이드라는 옅게 웃었다.
“원래 이 별을 떠난 건 그대들의 선택이 아니었나. 이제와서 다시 정이 들었나 보구나.”
“애초에 그렇게 유도한 건 너희잖아? 흥, 머리 쓰기는. 내가 지금 민아에게 투자한 포인트가 얼마나 되는 줄 알아?”
“많이 투자하긴 했다만 랜덤박스에 나간 포인트도 만만치 않지.”
“…….”
랜덤박스의 유혹이란 참으로 두렵다.
질러봐야 손해만 난다는 걸 알면서도 지르게 되는 게 랜덤박스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세한 오빠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이드라와 로키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민아가 끼어들었다.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로키의 행동에 감동한 모양이다.
그런 민아의 말에 이드라를 노려보던 로키의 눈에서 독기가 빠졌다.
“후우, 정말 이렇게 인간 세상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냥 유희. 단순한 게임. 이 정도가 좋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지구의 신들은 아마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구가 퍼블리셔의 손에서 떠난 순간, 그들의 감성을 자극하던 무언가가 있었다.
퍼블리셔는 별을 말 그대로 ‘장난감’처럼 취급한다.
당연히 거기에 참여하는 신들도 그런 퍼블리셔에 공감하며 강한 자극을 바란다.
신들의 시대를 잊은 인간들에 대한 작은 복수심.
보통 신들이 게임을 참여하는 건 그런 지리멸렬한 이유다.
하지만 이드라가 게임을 탈취한 직후부터 지구의 플레이 양상은 전혀 달라졌다.
메인 퀘스트는 존재하지만 이전처럼 자극적이고 어렵지 않다.
아바타와의 교류가 많아지고, 룩이나 커뮤니케이션에 주력하게 되면서 잊고 있었던 감성을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시대가 변하며 신들은 떠났고,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신화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게다.”
“알고 있어.”
“하지만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건 가능하지. 지금 이 게임이 계기가 되어 신과 인간은 새로운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 거다.”
자극적인 게임도 계속하다 보면 질리는 법이다.
신들은 여태 긴 시간 동안 자극적인 게임만 해왔고, 그것에 대한 역치 값이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밋밋하게 느끼는 수준이 된 상황에서 지구라는 게임은 여태까지 게임과 정반대의 성향을 추구했다.
“고로 앞으로의 미래를 더 보고 싶다면 이 게임을 망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야.”
“알고 있다니까.”
“하긴, 알고 있으니 이렇게 기다려 준 거겠지.”
로키는 이드라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아가 초상계에 숨어드는 건 너무 위험해. 차라리 내가…….”
“아바타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기특하다만, 신격을 가진 존재가 숨어드는 건 너무 위험하다. 더군다나 최상급 신격을 지닌 그대라면 무조건 걸릴 수밖에.”
“끙.”
로키는 작은 신음을 내며 민아를 올려보았다.
그녀의 형태를 본뜬 인간형 옵저버 덕에 그녀의 감정은 작은 얼굴에 선명하게 비쳤다.
“그런데.”
그런 로키와 이드라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민아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초상계에 어떻게 가는데? 그냥 차원 이동하듯 가면 되나?”
“그건 아키넨이 도와줄 게다. 원래 퍼블리셔에서 일하던 녀석이니 어느 정도 인맥이 있을 테지.”
“불안한데…….”
“걱정 마라. 누구로 변신해야 할지도 이미 정했다고 했으니까.”
빙긋 웃으며 말하는 이드라의 말에 민아는 뚱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가는 게 아니라고 참 쉽게 말한다 싶다.
“정말 매번 부려 먹히는 거 같아.”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중요한 일은 매번 자신이 맡는 것 같았다.
***
마계 분노의 영역.
쟁탈전이 시작된 후, 참여한 악마들의 대부분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떨어져나갔다.
남은 건 말 그대로 서열 30위 안에 드는 악마들.
그들은 마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은 배태랑 악마들이었고, 그렇기에 언제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참 인간이란 알다가도 모르겠군.”
한 악마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미 전의는 씻은 듯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앞에서 싸우는 악마들은 최소 8위부터 10위에 이르는 악마들.
7대 악마의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이다.
순위는 갈리지만 그들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때그때 컨디션에 따라 승부가 날 정도의 차이.
“거기에 인간이 있단 말이지…….”
서열 10권 악마 세 명과, 인간 하나.
퍽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이젠 어떤 악마도 살아남은 ‘인간’을 우습게 보지 못했다.
‘아자젤의 권속일 확률이 높아.’
인간이 싸우는 걸 몇 번 보면 알 수 있다.
신격도 없이 능력치가 끝없이 치솟는다면 아자젤의 전승스킬인 ‘한계돌파’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덕분에 오히려 서열 10권의 강자들조차 인간을 경계하여 먼저 덤벼들지 못했다.
대략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아는 다른 악마들과 달리 눈앞의 인간은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럼 협공을 하면 될 텐데.’
자신을 경계하는 세 악마들의 시선을 느끼며 신자운은 빠르게 거리를 달렸다.
이미 쟁탈전이 열리던 장소에서 멀어져 도시에 진입한 상황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도시는 전투의 여파에 이곳저곳이 파괴되어 있었다.
신자운의 입장에서는 찜찜했지만, 악마들에겐 익숙한 일인지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모두 빠져나갔다.
‘악마들의 자존심이라는 건가.’
처음 신자운에게 덤볐던 악마들과 달리, 서열 10위권의 악마들은 합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에 그만큼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는 거다.
‘……나로선 고마울 뿐이군.’
한 명씩 때려눕히면 되니까.
신자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시야에는 아까 전부터 눈에 띄던 악마가 있었다.
바로 흑영궁.
마계 서열 10위의 악마. 현재 살아남은 악마 중에 신자운이 가장 만만하게 상대할 수 있는 놈이었다.
‘큭, 건방진 놈이!’
신자운의 시선을 느낀 흑영궁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표적이 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인간이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다니.
쉬이이익!!
흑영궁의 오른손이 왼쪽에서 우측으로 쭉 그어지자 검은 화살이 만들어지며 신자운을 향해 날아갔다.
‘빨라. 거기다 정확도도 높고 방향 전환까지 가능하다.’
검은 화살은 신자운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것을 주먹으로 쳐내려고 하자 부드럽게 꺾이며 좌측 어깨를 노렸다.
치익!!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피했지만, 핏방울이 튀었다.
몸을 제법 강화시키고 있음에도 간단히 살갗이 찢어지는 걸보면 위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더욱 몸을 강화시키고, 속도도 한층 올린다.’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지 않으면 죽는다.
적은 흑영궁만이 아니다. 다른 두 악마도 싸우고 있었지만 이쪽의 상황을 살피는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쿠우웅.
신자운이 발을 내딛자 방금 전과는 달리 대지가 쩌적 갈라졌다.
방금 전보다 신체능력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다.
흑영궁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 마자 양손을 휘둘러 다섯 발의 화살을 쏘았다.
다섯 발의 화살은 마치 검은 뱀처럼 허공을 기어 신자운을 향해 쇄도했다.
‘단번에 끝내야 한다. 능력치의 한계를 올릴 틈을 줘선 안 돼!’
아칸이 어떻게 죽었던가.
실력을 아끼다가 도리어 당하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한계를 돌파하기도 전에 쓰러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온힘을 집중해 단 한 번에 쓰러트린다.
쉬쉬쉬식!!
다섯 발의 화살이 신자운의 사각을 노리는 순간, 신자운이 지면에서 발을 땠다.
무릎을 굽히고 몸을 최대한 낮추며 앞으로 달렸다.
화살의 방향을 상체로 유도하여 피한 것이다.
‘나 역시 그 다섯 발은 단순한 견제일 뿐이다.’
급격히 자세를 낮춘 탓에 신자운의 자세가 무너졌다.
속도는 빨랐지만 저렇게 낮은 자세에서 공격을 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신자운의 장기는 정면에서 휘두르는 주먹.
저렇게 낮은 자세에서 휘두르는 주먹에 힘이 실릴 리도 없었고, 상체를 일으키며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기에는 늦다.
“──흑천시(黑千矢)!!”
하지만 자신의 장기는 속사다.
다른 고위 악마들에 비하면 수수한 능력이지만. 그 단순한 능력으로 서열 10위까지 올라왔다.
단순하면 어떤가. 공격은 빠르고 강하면 그만이다.
거기다 자신의 오의인 흑천시는 동시에 천 발의 화살을 쏘아낼 수 있었다.
이것을 사용하면 마력의 절반 이상을 소모하겠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패배하는 수모는 당하지 않을 테지.’
분노의 악마가 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인간에게 패배하지 않는 게 악마의 자존심상 더 중요했다.
설령 아무리 놈이 강한 인간이라도, 아자젤의 권속이라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샤아아아!!
흑영궁의 양팔이 빠르게 움직이며 정면에서 덤벼드는 신자운을 향해 화살을 쏠 준비를 했다. 최대 천 발까지 연속해서 쏘아내는 흑천시는 설령 7대 악마들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피하더라도 따라가고, 방어를 해도 꿰뚫는다.’
흑영궁은 신자운이 구부린 몸을 일으키고 피하는 순간을 노렸다.
이미 열 두발의 화살이 쏘아지며 신자운의 몸을 노리고 있었다. 신자운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불과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헉!!”
당연히 화살을 피하는 동작을 취해 조금의 멈칫거림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신자운은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덤벼들었다. 몇 발의 화살이 몸을 관통했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그 낮은 자세 그대로 악마의 허리춤을 껴안았다.
“무, 무슨…… 커헉!!”
허리를 붙잡힌 순간, 그대로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뒤로 넘어졌다.
흑천시가 제대로 완성되기 전에 신자운의 몸이 먼저 자신에게 도달한 것이다.
‘바보 같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공격 따위에!’
설마 그대로 허리춤을 붙잡을 줄 몰랐고, 자신이 이렇게 간단히 균형을 잃을 줄은 몰랐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처음부터 신자운은 흑영궁을 스텐딩 자세에서 쓰러트릴 생각이 없었다.
쓰러진 흑영궁을 보며 신자운의 입이 삐뚜름하게 비틀어졌다.
“……넌.”
신자운은 종합격투기 선수였다.
서서 싸워야 할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를 구분하는 건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누워서도 화살을 쏠 수 있나?”
“이 새끼가!!”
몸을 비틀며 신자운에게서 빠져나가려했지만 마치 거미줄에 속박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팔을 움직여 화살을 쏘려했지만 제대로 된 궤적이 그려지지 않았다.
신자운이 노린 게 바로 이것이었다. 스텐딩이 아니라 그라운드로 상황을 끌고 간다면 상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퍼억! 퍽!
“누워서 싸우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군.”
“커어억!!”
신자운의 주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무릎으로 상대의 팔을 누르며. 마력을 이용해 몸의 체중을 순간적으로 증폭시키자 놈의 팔이 꼼짝없이 속박되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악마가 누워서 싸우는 방법을 익혔을 리 없다.
낙법을 익혔을 리 없다.
‘제, 젠장!’
신자운의 주먹이 마구잡이로 흑영궁의 머리를 후려쳤다.
계속되는 파운딩에 흑영궁은 이러다간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내가 졌다. 그만, 그만!”
악마의 자존심 따위는 이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은 아칸처럼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빠른 항복에 죽을 때까지 머리를 후려치려던 신자운의 손이 멈췄다.
흑영궁은 손이 멈추자 이때다 싶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쟁탈전에서 빠지겠다!”
쟁탈전에서 기권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영역의 밖으로 추방된다.
그것을 노린 흑영궁의 말에 신자운에게 깔아뭉개져 있던 흑영궁의 모습이 사라졌다.
“…….”
확실히 쟁탈전이니 꼭 죽일 필요는 없었지만, 묘한 찜찜함에 신자운은 고개를 들었다.
마침, 남은 다른 두 악마도 승부가 난 것 같았으니까.
***
색욕의 영역에서 빠져나온 나와 민수아의 목적지는 벨제부브가 있는 폭식의 영역이었다.
마계 서열 2위의 악마이자 마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벨제부브는 폭식이라는 이명답게 욕심이 많았고 원하는 건 반드시 자신이 취해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만.’
벨제부브의 능력은 잘 알고 있다.
이길 수 없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아니다.
“지수는 아직 오지 않은 건가?”
나는 혹시 몰라 맵을 열어 지수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지수의 위치가 표시되지 않았다.
‘맵을 통해 자신의 위치가 표시된다는 걸 알 테니 뭔가 수를 쓴 거겠지.’
아자젤이 도와줬을 가능성이 컸다.
그 여자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으니까.
“인간이 이곳에 무슨 일이지?”
폭식의 영역으로 통하는 성문에는 대략 수십 명의 마족들이 지키고 있었다.
역시 경비 같은 일은 마족이 하는 건가.
악마가 하기엔 모양이 빠지긴 하지.
“이곳은 벨제부브님의 영역이다. 허락받은 악마가 아니라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그 허락은 누구에게 구하는데?”
처음 온 우리가 허락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른 7대 악마가 말했다고 해서 들여보내 줄 양반도 아니니 단순한 트집잡기에 가까웠다.
“나다.”
아니나 다를까 마족들 사이에서 한 악마가 걸어 나왔다.
마족들을 통솔하는 악마인 모양이었다.
신장이 2미터가 넘는 탓에 나는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힉.”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민수아는 겁에 질린 듯, 파르르 떨며 내 옷깃을 잡았다.
물론 나는 옅게 웃었다.
괜히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