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232. 쟁탈전(2)
하늘에 나타난 검은 날개의 천사.
태생은 ‘신’으로서 태어난 존재이지만 악마로서 타락한 존재.
오만의 악마이자, 현 마계에서 아자젤과 함께 가장 강한 악마라고 꼽히는 이.
루시퍼는 무료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솔직히 분노의 영역을 누가 차지하는 지는 그다지 관심 없다.”
그다지 의욕이 담기지 않은 어조로 녀석은 말했다.
“하지만 마계가 소란스러워지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지.”
그가 굳이 쟁탈전을 중재하기 나선 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분노의 영역이 오만의 영역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쟁탈전의 룰은 간단하다. 이번에 참가한 악마들끼리 싸워 살아남으면 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가 차기 분노의 악마가 되니 열심히 해보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어조는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평소 자신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는 그로선 이 상황자체가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아마 룰을 설명한 이후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라.
“그럼 무운을 빌지. 시간은 마계의 태양이 하늘의 중심에 떠올랐을 때다.”
간단히 말해서 정오.
태양의 위치를 보니 시간은 대략 30분정도 남은 것 같았다.
루시퍼는 말을 끝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세한은 루시퍼가 사라진 하늘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신자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간다. 잘해봐.”
참가하지도 않는데 남아있어 봐야 성가셔질 게 분명하니까.
신자운도 그 사실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서 기다릴 생각이지?”
“어차피 하루 이틀 싸워서 끝날 거 같지는 않으니 마몬에게 가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
혹시나 만약의 일을 대비해 마몬을 감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았다.
“끝나면 연락하도록 하지.”
“그래. 딱 보니 충분히 상대할 만한 녀석들이야.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알겠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만약 신자운이 죽기라도 하면 아자젤이 분노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한은 적어도 아자젤의 분노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르와의 싸움을 앞둔 상황에서 아자젤은 꼭 필요한 인재였으니까.
“그럼…….”
세한은 민수아와 함께 분노의 영역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던 신자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곧 정오였다.
‘음?’
쟁탈전의 시기가 가까워지자 악마들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몇몇은 팀을 이루는 녀석도 있었고, 어떤 녀석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이동할 준비를 하는 이도 있었다.
혹은 성가실 것 같은 상대를 포위하고 시작하는 즉시 처리할 생각을 가진 악마들도 있었다.
‘나부터 처리할 생각이군.’
신자운은 주변 악마들의 움직임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플레이어이자 인간, 둘 중에 어떤 게 그들의 심기를 거슬렀는지는 모른다.
아니면 마계에 올 정도의 인간이라면 변수로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애초에 쟁탈전에 인간이 끼는 것부터 잘못이다.”
“동감이야. 신격도 없어 보이는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쟁탈전에 참여한 건지 모르겠군.”
“인간은 목숨을 아낀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낄낄거리는 비웃음마저 들렸다.
신자운은 그런 악마들의 대화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 정도 모멸은 그가 살아오며 들어온 말들에 비하면 정말 별거 아니었다.
신자운은 그저 묵묵히 검은 장갑을 손에 꼈다.
아자젤이 그에게 준 장비다.
어떤 소재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장갑을 착용하면 아자젤의 스킬을 보다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시간이 됐나.’
태양이 정수리 위로 떠올랐다.
정오가 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악마들이 움직였다.
신자운을 둘러싼 악마들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세한이 말해준 그대로야.’
지금 자신에게 덤벼드는 악마들의 수준은 대략 신격 중급에서 중하급정도.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 무리를 지어 행동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해도 그 움직임은 신자운이 낼 수 있는 속도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플레이어로서 한계치까지 능력치를 올린다고 하더라도 신격이 없으면 한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육신의 한계를 S급으로 상정한 이상 그 이상에 이를 수는 없다.
그 한계를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신격.
신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발휘할 수 있는 신체능력의 한계도 상승하게 된다.
쉬익!!
가장 먼저 덤벼든 악마의 검을 신자운은 고개를 옆으로 젖혀 피했다.
“호오, 우리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건가! 과연 인간치고는 실력이 있다는 건가?”
이어서 다른 악마들이 신자운의 얼굴과 몸을 노리며 저마다 무기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을 이용하기도 했고 마법을 사용해 신자운의 다리를 속박하려는 이도 있었다.
콰쾅!!
손톱은 닿기 전에 주먹을 휘둘러 쳐냈고, 마법은 크게 뒤로 뛰어 피했다.
신자운이 특별한 기술이나 스킬을 사용한 건 아니다.
단순히 피했을 뿐이다.
‘과연.’
세한은 자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악마들은 태생부터 강하기 때문에 기술의 숙련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특히 그건 고위 악마보다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악마들이 더 심했다.
고위 악마들은 저마다 기술을 갈고 닦아서 그 위치까지 올라간 거였지만 중급 악마들은 보통 기술보단 태생의 힘을 밀고나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말해서 네비로스가 그렇다.
“그래, 이 정도였어.”
자신의 얼굴에 가면을 씌웠던 악마를 떠올렸다.
그때는 그토록 강하게만 느껴졌던 녀석이 이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신자운의 반응에 신나게 공격하던 악마들은 점차 이상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공격이 안 맞는데?”
“대체 어떻게 피하는 거지?”
플레이어가 낼 수 있는 신체능력의 한계.
말하자면 최대 S급 능력치는 확실히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격이 없을 때의 이야기.
신격을 사용하게 되면 단순히 S랭크라 불리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다.
즉, 신격이 없는 신자운이 S급 신체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악마들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운은 명백히 악마들보다 빨랐다.
적어도 몇 발자국 앞서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 여럿의 악마들이 합공을 해도 옷깃하나 스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이 새끼,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잖아!!”
그들의 기술이 신자운보다 떨어진다는 것.
그리고.
“확실히 신격은 육신이 낼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을 수 있게 해주지.”
돌려 말해서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신격이 없다 해도 전혀 문제 될 것 없었다.
고오오.
신자운의 얼굴 반쪽을 가린 비탄의 가면.
눈동자가 있는 부분에서 붉은빛이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성가시니 그만 죽어라.”
단순히 신체능력의 강화.
그런 레벨이 아니다. 신자운은 마력이 전신을 순환하는 동시에 스킬이 발현했다.
아자젤의 전승스킬.
‘한계돌파’가.
“잠……!”
정면에서 덤벼들던 악마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졌다.
검은색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악마의 몸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인간의 한계. 기술의 한계.
그런 물리적인 한계를 강제로 넘어버린다.
황급히 무기를 들어올려 신자운의 주먹을 받아내려 했지만, 무기를 쥔 악마의 손이 도리어 꺾인다.
콰아앙!!
“끄아아악!!”
악몽이었다.
인간의 주먹을 악마가 막지 못한다.
처음에 신자운을 둘러싸고 있던 다섯의 악마였지만, 묘한 상황이 되자 주변의 악마들까지 가세했다.
그럼에도 신자운의 움직임은 가차없었다.
상급 이상의 악마들이 아닌 한, 자신의 상대가 없다는 걸 방금 알아차렸으니까.
쾅쾅쾅쾅!!
순식간에 튕겨지고 날아가는 악마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략 열이 넘는 악마가 주변에 쓰러져있었다.
신체하나 온전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은 마치 마수의 발톱에 찢겨진 인간과 같았다.
‘미, 미친.’
악마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의 인간에게선 조금의 신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능력치를 아득히 초월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호, 혹시. 저놈 아자젤의 계약자인가?!”
그제야 떠올렸다.
최근 아자젤이 지구에서 머무는 이유,
처음으로 계약자를 정했다는 소문이 마계에서 떠돌았다.
대부분은 거짓말이라 비웃었다.
아자젤은 지금까지 계약자를 둔 적이 없었다.
재미삼아 힘을 준 경우는 있었지만 계약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전승스킬을 견딜 존재가 없었으니까.
한계돌파라 불리는 그녀의 전승스킬은 그 막강한 권능만큼 크나큰 부담을 줬다.
그것을 인간이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럼 눈앞에 있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 인간의 능력치는 분명 악마에 비하면 별볼일 없었다.
그런데 공격에 얻어맞는 순간 튼튼한 악마의 육신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건 신자운이 아자젤의 힘을 필요한 요소에서만 발휘하기 때문이다.
공격이 명중하기 직전, 발을 구르는 순간.
그 작은 요소에 일시적으로 한계돌파를 사용한다.
지수가 아자젤의 곁에서 악마가 되어가는 동안 신자운은 그녀의 상대를 해야만 했다.
지수는 결코 신자운을 봐주는 법이 없었고, 덕분에 신자운은 한계돌파를 완벽하게 숙달시킬 수 있었다.
아자젤조차도 놀랄 만큼.
“후우…….”
대략 10분 후, 신자운의 주위에는 방금 전까지 ‘악마’라 불리던 고깃덩어리들이 흩어져있었다.
여덟쯤을 쓰러트렸을 시점에 도망친 악마들도 있었지만 신자운은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 정도 수준이면 내가 아니어도 다른 놈들이 죽일 테지.’
진짜 적은 20위권 안에 드는 상위 악마들이다.
대략 그들의 수를 파악해뒀던 신자운은 주변의 기척을 민감하게 느끼며 천천히 발을 뗐다.
***
탐욕의 영역에 이르렀을 때 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 왔을 때만 해도 조용하던 장소가 뭔가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이봐.”
“예, 옙?!”
이전에 마몬의 집무실을 습격했을 무렵, 입구를 지키고 있던 악마를 불러세웠다.
녀석은 마몬의 성의 입구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어 유독 눈에 띄었다.
듣기로는 마몬과 예전부터 함께한 집사라고 하던가.
“최근 무슨 일이 있었나?”
“그, 그게…….”
녀석은 눈동자를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동자만을 데록데록 굴렸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누가 왔다 간 거지?”
“예?! 그, 그건 아닙니다.”
“거짓말 마.”
나는 이드라의 힘을 지녔기에 상대가 나를 속이려는지 알 수 있다.
린의 지닌 능력과 비슷하다.
악마도 그것을 아는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뭐?”
“결코……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갈한 연미복을 입은 악마는 차마 내게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며 떠뜸떠듬 말했다.
7대 악마의 직속에 위치한 악마가 이렇게 벌벌 떨 존재가 누구일까.
거기다 이 악마는 결코 약한 악마가 아니다.
마몬이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있던 악마이니 최상급 신격을 지닌 고위 악마였다.
나라도 꽤 공을 들여야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
‘그럴 수 있는 건 최소 서열 3위 이상의 악마.’
신은 아니다.
고위 악마를 벌벌 떨게 만들 수 있는 신은 외신을 제외하고 없다.
혹은 이미르라거나.
하지만 이미르나 외신이 마계에 왔을 리는 없으니 남은 건 3위 이상의 악마라는 것이다.
“그럼 이건 대답할 수 있나?”
“예?”
“마몬, 살아 있냐?”
집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은 어떤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죽었군.”
“……그렇습니다.”
탐욕의 악마 마몬이 죽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쟁탈전이 문제가 아니라 이쪽이 더 큰 사건이다.
분노의 악마는 적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 죽었다.
녀석이 죽은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악마는 없었다.
근데 마몬은 갑자기 증발해버렸다.
이건 말 그대로 일대 사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잠깐 들어가 봐도 되나?”
“어디를…….”
“네가 지키고 있는 이 집무실 말이야. 여기가 녀석이 있던 마지막 장소겠지?”
“그, 그건 그렇습니다.”
나는 집사의 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마력의 잔향이 느껴졌다.
‘이동마법인가.’
전투의 흔적은 없었다.
그 이야기는 마몬은 이동마법으로 급하게 몸을 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역시 도망칠 장소를 마련해두고 있었군.”
예상했던 일이다.
단지 어디로 도망쳤는지 찾기가 힘들었다.
보통 마력을 쫓으면 대략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지만, 이곳에서 발동한 마법은 도중에 뚝끊겨 있어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분명 마몬이 술수를 쓴 거겠지. 놈은 전투력은 비교적 떨어져도 다른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아자젤은 지구에 있고, 루시퍼는 굳이 마몬을 죽일 필요가 없어.’
그럼 분노의 영역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벨제부브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서늘했다.
“민수아.”
“예.”
“혹시나 싶어서 묻는 건데, 아자젤 마계에 있냐?”
조용히 서있는 민수아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수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전 그런 것에 대해선 말할 수 없어요.”
“그럼 그걸 말하는 것만으로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거군.”
“…….”
“알겠다.”
아무래도 아자젤이 마계에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마몬이 죽었으니.’
사실상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던 계획은 꼬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자운이 분노의 악마가 되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더욱 꼬이게 되리라.
‘설령 신자운이 분노의 악마가 되지 않더라도 색욕이 남아있었는데, 이젠 벨제부브까지 염두 해둬야 할지도 모르겠어.’
녀석과 싸울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