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231. 쟁탈전(1)
“근데 마몬을 내버려둬도 괜찮을까요?”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침착함을 되찾은 민수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가?”
“분노의 좌를 차지한 후에나 ‘인정’을 해준다는 이야기요.”
우리가 분노의 좌를 차지하려는 건 7대 악마의 동의를 얻기 위함이다.
질투와 나태, 그리고 분노와 탐욕.
이렇게 넷이 인정을 받아 마왕의 좌에 도전할 수 생각이었으니까.
“보나마나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 어차피 너는 미래를 볼 수 있으니 알 거 아니야?”
“그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내게 민수아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전혀 안 보여요.”
“마몬의 행적이?”
“네.”
민수아가 미래를 볼 수 없다.
그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상황에 개입했다는 걸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말하자면 나.
‘내가 마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내가 녀석에게 해코지를 할 일은 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뿐이다.
‘너무 쉽게 승낙하더니만, 뭔가 꿍꿍이가 있었나보군.’
하지만 놈이 할 수 있는 행동이 뭐가 있을까.
이제 와서 놈이 다른 행동을 한다는 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싸우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굳이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좌를 얻으면 분노의 악마가 지니고 있던 영역들을 놈에게 넘긴다고 말한 상태였다.
녀석의 목적이었던 걸 넘긴다고 했는데, 굳이 놈이 위험한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우선 놈에 대한 고민은 미루도록 해야겠군.”
신자운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시선을 돌리자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인간이 왜 여깄지?”
“쟁탈전이 열리는 장소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아무래도 계속 걸어 다니다 보니 원치 않게 시선을 모은 모양이다.
쟁탈전은 신분이 보장된 악마만이 참여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흥!”
쉭!!
당장 꺼지라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그보다 빠르게 공격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바람을 가르며 한줄기 화살이 내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이 내 목에 닿기 전, 신자운이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호오?”
설마 이렇게 쉽게 잡을 줄은 몰랐는지, 주변의 악마들의 안색이 변했다.
방금 우리에게 가해진 공격은 결코 만만한 위력이 아니었으니까.
“쟁탈전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려주겠나?”
화살을 날렸던 악마가 신자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방금 그렇게 빠르고 매서운 화살을 날렸던 것치고는 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흑영궁도 쟁탈전에 참여했을 줄이야!”
“폭식 쪽에 붙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악마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의 악마가 그만큼 강자라는 의미다.
‘흑영궁이라면 마계 서열 10위로구나.’
만난 적은 없지만 1회차에 들은 적은 있었다.
그림자의 시위를 당겨 쏘아내는 화살은 어떤 화살보다 빠르며 은밀하고 강력한 힘을 지녔다고 한다. 녀석이 본 실력을 내보이면 한 발이 아닌 수십 발을 동시에 쏘아낼 수 있었다.
“마몬이 우리의 신분을 보장할 거다.”
“마몬?!”
서열 6위 대악마의 이름이 나오자 주변이 크게 술렁였다.
흑영궁도 설마 마몬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놈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긴 이런 변수도 있어야 할 테지. 아는 놈들하고만 싸우면 지루할 테니까 말이야.”
그리곤 주변을 쏘아보듯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자 악마들은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같은 악마보다 인간이 더 강하다니, 이번 쟁탈전은 볼만하겠어.”
흑영궁은 그렇게 말한 후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비웃음마저 담긴 그의 말에 다른 악마들이 발끈했지만 차마 덤비는 자는 없었다.
서열 10위 안에 드는 마족과 그렇지 않은 마족간의 수준 차는 그 정도로 극심했다.
“더, 덕분에 더 이상 시비 거는 사람은 없겠네요.”
“확실히.”
신자운이 흑영궁의 활을 워낙 간단히 잡아낸 탓에 주변 악마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거기다 마몬의 이름까지 언급한 덕인지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꺼려하는 것 같았다.
7대 악마의 위상이 어떤지 똑똑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느 정도 걸어 들어가자 쟁탈전에 참여할 악마들이 모여 있는 광장이 보였다.
무법지대처럼 싸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악마들은 차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마치 운동회를 앞둔 어린아이들 같네요.”
“그래, 조금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군.”
민수아의 말에 신자운 역시 묘한 얼굴로 악마들을 보았다.
분명 그들의 말을 들었을 게 분명함에도 그들의 시선은 신자운과 민수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 이유야 간단하지.”
“간단하다니.”
“담당일진이 있는데 감히 움직일 수나 있겠어?”
신자운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이 되었지만, 나는 그것에 설명하기보단 손을 들어 가리켰다. 내가 가리킨 곳에는 텅 빈 잿빛 하늘만이 보였다.
“아무 것도 없다만.”
“잘 봐라. 정말 아무 것도 없냐?”
신자운은 내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딱히 반박을 할 생각은 없었는지 얌전하게 하늘을 올려보았다.
여전히 하늘은 텅 비어 있었다.
“역시 아무것도…….”
짜증이 치민 어조로 말하던 신자운의 말이 멈췄다.
그리고는 바람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돌렸다.
“……!!”
있었다.
텅 빈 하늘이었을 장소에 녀석이 있었다.
한 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새까만 날개를 지닌 천사. 그 머리카락 역시 검으며, 눈동자도 검었다.
하지만 그의 옷과 피부는 눈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어둠이라도 빨아들일 것 같은 검은 눈은 지상을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익히 아는 시선이다.
지수가 타인을 볼 때 저런 눈으로 보곤 했다.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쓸모한 존재를 보는 눈.
“루시퍼.”
7대 악마의 리더이자 최강의 악마라 꼽히는 ‘오만의 좌’.
그가 쟁탈전의 하늘에 나타났다.
***
마계 탐욕의 영역.
최근 있었던 사건으로 마몬이 머무는 거대한 성의 일부가 부서지긴 했지만 특별히 큰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까마귀가 왔을 때는 정말 어쩌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훨씬 잘 풀렸다.
분노의 좌를 차지하고 영토를 주는 대가로 마몬은 마왕에 도전할 권리를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된다.
어디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쏘냐.
말 그대로 분노의 영역을 꽁으로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거기에 까마귀까지 처리할 수 있겠어.’
마왕의 좌에 도전하고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자는 없었다.
누구도 마왕이 되지 못했다.
수 천, 수 만년이 흐르는 동안 마왕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가 맞겠지.
마계에서도 이름 높은 강자들조차 마왕이 되지 못했다.
그중에서는 최상급 신격을 지닌 놀랄 만큼 강한 강자가 즐비했다.
세한이 강한 건 맞지만 마왕에 도전한 건 결코 그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괴물들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어떤 악마도 마왕이 될 수 없었다.
‘하물며 인간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군!’
세한이 사라지면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강대한 존재가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상하게 운수가 좋다는 생각이 들만큼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만약 녀석이 나를 죽이려고 하더라도 도망치면 그만이야.’
이미 보험은 몇 개나 만들어뒀다.
그곳에 숨는다면 설령 세한이라도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없으리라.
‘분노의 영역을 얻으면 거기다 뭘 만드는 게 좋으려나.’
그곳을 차지하게 되면 7대 악마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몬에게 바쳐지는 공물의 양도 배는 늘어날 터.
“후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겨?”
힘차게 웃어재끼던 마몬의 얼굴이 굳었다.
분명 자신만 있어야 할 집무실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아, 아자젤.”
“안녕. 반갑기도 해라, 잘 지냈니?”
하얀 양산을 쓰고 꽃처럼 웃는 아자젤은 청초한 미소녀였지만 마몬에게는 무엇보다 무서운 식인꽃이었다.
“어,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냐.”
“글쎄……. 내가 왜 왔을 것 같아?”
마치 재밌는 장난을 생각한 악동 같은 얼굴이다.
아자젤이 왜 이곳에 왔는가.
그것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생각할 시간도 필요 없었다.
딱!
“젠장!!”
마몬은 빠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가 서 있던 바닥에 자색의 마법진이 그려지며 순식간에 발동했다.
말 그대로 깜짝할 사이였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마몬의 모습에 아자젤은 두 눈을 깜박이다가 싱글싱글 웃었다.
“역시 마몬은 겁쟁이야.”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가 천천히 내려갔다.
방금 전의 상냥한 얼굴과는 다른 담담한 얼굴로.
“겁쟁이면 적당히 나댔어야지 않겠니.”
아자젤은 결코 잊지 않았다.
미국에서 자신의 계약자를 죽이려고 했던 일을.
잘 풀리기는 했지만 자칫했으면 신자운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전이라면 웃으며 넘어갔을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몬도 그렇게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일을 벌였으리라.
기껏해야 아끼는 장난감을 망가트리는 정도.
7대 악마의 대부분은 아자젤을 싫어했기에 그런 ‘장난’을 치는 경우가 잦았다.
특히 마몬은 아자젤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간혹 그런 행동을 했다.
평소라면 귀엽게 봐줬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을 넘어버린 멍청한 악마는 알뜰살뜰하게 이용해서 죽일 생각이었다.
“후우, 후우.”
아자젤에게서 멀어진 마몬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새까만 어둠이 눈에 들어오자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제대로 작동했군.’
이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이 장소를 만들었다.
탐욕의 궁. 마계의 누구에게도 눈이 닿지 않는 비경에 만들어둔 비밀 장소.
이곳을 아는 악마들은 전부 죽여 비밀을 지켰다.
하나가 도망치긴 했지만, 도망친 놈의 실력과 상처를 생각하면 추격대를 뿌리치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젠장!”
잘 풀리고 있던 일이 꼬여버렸다.
이렇게 되면 세한에게 분노의 영역을 받는 것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몰래 접촉하는 수밖에.’
아자젤은 최근 지구에 빠져 있으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마몬은 그렇게 생각했다.
“응?”
어쩐지 등이 서늘해졌다.
마치 무언가가 뒤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설마.’
아자젤이 온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심장이 공포로 쿵쿵 뛰었다.
아무리 아자젤이라고 해도 이곳을 알 리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런 젠…….”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자신의 착각이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면에서 두 개의 붉은빛이 번쩍였다.
“큭?!”
그것이 누군가의 눈동자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황급히 몸을 빼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붉은 눈의 괴물이 마몬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감히 내가 누구인줄 알고, 건방진 괴물 새끼가!”
반사적으로 손에 마력을 집중해 멱살을 잡은 괴물의 복부에 마력을 폭발시켰다.
웬만한 악마라면 일격에 가루가 될 만한 폭발이 일어나며 괴물의 복부에 적중했다.
콰콰쾅!!
“……넌.”
멱살을 잡은 손을 떨어지지 않았다.
어둠속에 오래 있었던 탓에 조금씩 자신의 멱살을 쥔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칼을 지닌 여성이었다.
마력으로 공격을 받았던 복부는 둥근 구멍이 뚫리며 관통됐지만 다른 부분까지 피해가 미치지는 않았다. 육신의 강도가 지나치게 단단한 탓에 핀포인트만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나마의 피해도 관통한 직후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아자젤의 작품이로군.”
역시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미국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세한의 옆에 있던 여성.
꽤 강한 플레이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악마’가 되어 있을 줄이야.
“그래, 처음부터 아자젤은 이걸 노렸던 거야.”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여성에게 마몬은 덤덤히 말했다.
“너도 마왕이 될 생각이구나.”
무표정한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건,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