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30화 (230/332)

# 230

230. 탐욕과 분노(3)

마계 외곽.

그곳은 지위가 높은 악마의 눈에 들지 못해 버려진 약한 마족들이 머무는 슬럼가.

당연히 지역을 통치하는 악마들의 서열도 극히 낮았다.

‘순위가 좀 낮으면 어때? 어차피 여기선 내가 왕인데.’

빌렘은 그런 외곽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는 악마였다.

서열은 119위. 악마 중에서는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지만 악마는 악마였다.

엄연히 하위 신격을 지녔고, 보통의 마족들보다는 훨씬 강했다.

도리어 황폐한 슬럼 지역을 통치하는 악마치곤 굉장히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아, 오늘도 괜히 힘썼네.’

덕분에 가끔 이렇게 빌렘이 통치하는 영역에 침범하는 악마들이 있어도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영역이 워낙 넓은 터라 귀퉁이는 다른 악마들에게 나눠준 상태였지만 대부분은 빌렘의 소유였고, 그곳을 노린 악마들과 가끔 전투를 벌이고는 했다.

“아, 오늘 몸을 좀 썼더니 몸이 뻐근한데 어디 괜찮은 계집 없나?”

빌렘은 건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슬럼의 거리를 걸었다.

그가 지나갈 때면 마족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혹여나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이곳에선 내가 왕이다.’

마계 외곽은 서열이 높은 악마에 눈에 띄지도 않는 탓에 고위 악마의 침범을 걱정할 리도 없었다. 마계에서 이보다 안전한 곳이 또 어딨단 말인가!

‘정말 여기로 도망치길 잘했어.’

몇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에 빌렘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놈’이라고 해도 이곳까지 오지 않을 것이다.

“엉?”

겁에 질린 마족들의 시선을 느끼며 걸어가던 빌렘은 눈을 살며시 찡그렸다.

그가 걸어가는 길목에 후줄근한 로브를 뒤집어쓴 놈이 걸어가는 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감히 내가 걸어가는데 무릎을 꿇지는 못할망정 태연히 걸어가?’

신입인가?

하긴 가끔 저런 놈이 있지.

막 슬럼에 들어온 마족들. 혹은 악마.

설령 악마라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슬럼 지역까지 쫓겨온 악마들의 수준은 대부분 고만고만했으니까.

대부분 300위권 악마들.

조금 둔해졌어도 100위대 악마인 자신이 질 리가 없었다.

빌렘도 그것을 노리고 굳이 이곳에 온 거다.

‘아침에도 한판 했는데 설마 또 있었을 줄이야. 혹시 동료인가?’

빌렘은 혹시나 싶어 앞에 걸어가는 녀석을 유심히 관찰했다.

신격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굉장히 옅었다.

‘별 볼 일 없군.’

악마들은 ‘감정’을 신격으로 변화시키는 게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위 악마들의 이야기다.

서열이 낮은 악마들은 일반적인 신들처럼 신격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네비로스가 그 예였다.

하지만 그런 고위악마가 슬럼에 올 일은 없으니 빌렘은 눈앞의 건방진 놈을 당장 죽이기로 결정했다.

감히 슬럼의 왕인 자신의 앞에서 걸어가다니!

다른 마족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하긴 가끔 이렇게 피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래야 마족들이 더 말을 잘 들을 테니까.

빌렘은 씩 웃으며 앞에 걸어가는 건방진 놈을 불렀다.

“이봐.”

“…….”

절대 작은 소리라 말한 건 아니었다.

들렸을 게 분명한데도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은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저 새끼가 미쳤나.”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빌렘은 한달음에 녀석을 향해 다가가 로브를 잡아당겼다.

“어디서 온 새끼인지 모르겠는데, 감히 내 말을…….”

로브를 확 잡아당기자,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가 쭉 찢어졌다.

검고 긴 머리칼이 넓게 펼쳐지며,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 빌렘의 눈에 들어왔다.

“계집?”

그것도 놀랄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순간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악마인가?’

선명한 악마의 힘이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처음에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인간이 마계에 있을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큭큭, 뭐 상관없지.”

빌렘은 눈앞의 여성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여성은 찢어진 로브를 보며 눈을 살며시 찡그리고 있을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 모자란 년인가?’

이런 상황에서 찢어진 로브나 보고 있다니.

“무슨 일이죠?”

“어?”

“갑자기 왜 저를 붙잡은 건가요.”

약간의 짜증이 담겨 있는 말투였다.

하지만 연한 갈색의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것 같은 무심한 눈빛.

당연히 빌렘은 그런 여성의 시선이 어이가 없었다.

“건방진 년일세. 야. 내가 누군지 모르냐?”

“?”

마치 알 필요가 있는지 묻는 눈빛에 빌렘은 헛웃음이 나왔다.

악마 중에서도 보기 힘든 외모인지라 제법 마음이 동했지만 살려두고 싶은 마음은 싹 사라졌다.

“하는 건 시체로도 충분하지.”

흥, 하고 작게 비웃은 빌렘은 거칠 것 없이 여성의 목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건방진 계집의 목을 단번에 잘라낼 생각으로.

깡!

“엥?”

빌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성의 목에 격돌한 자신의 손이 찌르르 울리며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베어내지 못했다고?’

여성의 목에는 한 줌의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약간의 흔적마저 없었다.

빌렘의 손은 무엇보다 날카로운 보도(寶刀)다.

신격과 마력을 집중해서 휘두르는 그의 손으로 얼마나 많은 마족과 악마들이 죽어갔던가.

그가 백 위권의 악마가 될 수 있던 것도 이 기술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계집의 피부 한 장도 벗겨내지 못했다.

‘이 계집은 대체.’

당혹감에 물든 채 빌렘은 여성의 목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여성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연한 갈색이었을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헉!”

위험하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빌렘은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그는 그다지 강하지 않은 악마였기에 위기에 민감했다.

지금 자신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을 건드린 것이다.

망설일 틈 따위, 조금도 없었다.

‘피해야 해!’

수백 년간 살아온 이 영지를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콰직!

“커억!!”

하지만 그가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뒤통수에 충격이 느껴지며 바닥에 처박혔다.

처음에는 둔기인가 싶었다.

하지만 황급히 몸을 돌리자 자신을 공격한 것이 한낱 손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날아다니는 날파리를 잡듯 손바닥으로 대충 후려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빌렘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가 흔들려 시야가 흐릿하고 코와 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사, 살려…….”

빤히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때문인지 혓바닥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고위 악마다.’

그것도 빌렘이 모르는 고위악마.

대체 어디서 이런 존재가 튀어나온 것인가.

하필 슬럼 지역에 왜 이런 게 존재한단 말인가.

“왜요?”

여성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말하며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렸다.

새까만 앵클 구두가 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바닥에 떨어진 날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여성의 행동에는 조금의 악의도 없었다.

그냥 귀찮게 하니까 죽인다, 단지 그 정도의 마음만이 느껴졌다.

‘죽는다.’

설마 이렇게 하찮게 죽게 될 줄이야.

빌렘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여성을 올려보았다.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질 구두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잠깐.”

빌렘의 이마를 찍어 부수려던 구두 굽이 코앞에서 멈췄다.

“걔 죽이지 말아볼래?”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가벼운 어조였다.

그 말에 우뚝 멈춰있던 여성의 구두가 옆으로 비켜졌다.

‘사, 살았다.’

빌렘은 여성을 말린 목소리의 주인이 너무나 고마웠다.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이라면 발이라도 핥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역시 맞네.”

빌렘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향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당장 머리라도 박고 감사할 생각이었지만,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바지가 축축해졌다.

“아, 아자젤 님.”

나태의 악마가 새하얀 양산을 쓴 채 서 있었다.

대체 왜. 나태의 영역이 아닌 이곳에 있단 말인가.

“당연히 너를 찾으러 온 게 당연하잖니.”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자젤이 말했다.

그녀는 지수에게 싱긋 웃어 보인 뒤, 빌렘에게 다가갔다.

“너 마몬과 아는 사이였지?”

“네? 네. 네! 그, 그렇습니다. 하, 하지만 연락하지 않은 지 상당한 시간이…….”

“그건 상관없어. 기껏해야 수백 년이겠지. 너는 그냥 마몬이 머무는 곳으로 안내만 해주면 돼.”

“예?”

길 안내?

그건 자신이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탐욕의 영역에 가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아자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안내해 주길 바라는 장소는 마몬 외는 누구도 ‘몰라야 했을’ 장소였다.

“아니 그런 뻔한 곳 말고. 분명 까마귀가 마몬에게 접촉했을 거 같아서 말이야. 녀석 성격상 대충 계약을 마무리 짓고 피신해 있을 게 분명하잖아.”

“까마귀…… 말입니까?”

그건 또 누구지. 계속 슬럼에서 머물렀던 빌렘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너는 탐욕의 궁을 만들 때 참여했었다고 들었어.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탐욕의 궁.

그곳은 마몬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만들어둔 은신처였다.

위치를 아는 자는 궁을 만들 때 참여했던 악마들뿐이었고, 완성된 이후에는 마몬이 모두 죽였기에 아는 자가 없었다.

지금 아자젤의 눈앞에 있는 악마를 제외하고.

빌렘은 궁의 건설에 참여했고, 마몬에게서 도망쳐 살아남은 유일한 악마였다.

***

마계, 분노의 영역.

본래라면 아스모데우스가 통치하고 있었을 장소였지만 지구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무법지대가 된 지역이었다.

만약 마계의 ‘법’이라 불리는 루시퍼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다른 악마들의 영토가 되어 케이크처럼 갈라졌을지도 모른다.

“전 쟁탈전이라고 해서 대회 같은 건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험악한 인상의 악마들이 지나갈 때마다 수아가 움찔거렸다.

전투력이 취약한 수아로선 아무리 약한 악마라고 해도 두려운 존재였다.

“정말 자운 오빠가 나가는 건가요?”

“미래를 다 보고 왔을 거면서 뭘 물어.”

“그, 그건 그렇지만 전 세세한 미래는 못 본다고 했잖아요.”

가끔 세세하게도 보는 것 같던데.

불안한 수아의 얼굴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신자운 엄청 좋아하네.’

나는 덤덤한 얼굴로 졸졸 따라오는 신자운을 돌아보았다.

쟁탈전에 참여하는 게 내가 아니라 자신이 되었음에도 신자운은 조금도 반박하지 않았다.

목숨이 걸려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

태평하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걸보면 이 녀석도 난놈이긴 하다 싶었다.

“넌 자신감이 넘치는 거냐?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거냐?”

이 녀석은 지수처럼 내 말이면 뭐든 따르는 성격이 아니다.

지수도 요즘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 늘어난 터라, 신자운의 행동은 그저 묘하기만 했다.

“나 말고는 나갈 사람도 없는 게 아니었나?”

신자운은 피식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매캐한 연기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간접흡연이 얼마나 몸에 안 좋은 줄 모르나.

“그건 그렇긴 하지만, 너무 순순하니 수상하잖아.”

“아자젤이 말했으니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후 여기에 오기로 한 건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지. 당연히 내가 해야 했을 일일 뿐이니 신경쓸 필요없다.”

말 한번 폼나게 하네.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확실히 그 말처럼 신자운이 쟁탈전에 참여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아의 말에 예상하긴 했지만, 나는 쟁탈전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7대 악마가 된 존재는 마왕에 도전할 수 없었으니까.

즉, 열쇠로 향하는 길이 끊긴다.

그러니 내 입장에선 분노의 좌를 차지할 대체자가 필요했다.

지수는 오지 않았고, 린은 잠들어있으니 남아 있는 건 오직 신자운뿐.

상위 악마와 경쟁할 수 있는 지구의 플레이어는 놈이 유일했다.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거기서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아니, 네가 사람이 없다고 해도 순순히 나선 게 이상하다고. 아자젤의 말이면 그렇다는데 너 왜 그렇게 아자젤의 말이면 껌벅 죽냐?”

내 말에 신자운은 입을 굳게 닫았다.

그리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런 녀석의 행동이 묘했기에 나는 장난 삼아 물었다.

“너 설마 아자젤 좋아하는 건 아니지?”

“…….”

대답이 없었다.

뭐야. 설마. 아니. 진짜로?

“네?! 저, 정말이에요?!”

신자운의 미묘한 반응에 민수아가 펄쩍 뛰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신자운의 팔을 잡고 팔락팔락 흔들었다.

“그런 건 아닌가 싶긴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도 그런 게 아닌가 싶긴 했는데 민수아도 신자운에게 마음이 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아자젤이 있는 곳에 남자는 이놈뿐이지.

민수호는 아가트람 쪽으로 옮긴지 좀 됐으니까.

.이거 민아의 친구들도 위험한 거 아닌지 몰라.

“……오해하지 마라.”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신자운을 차분히 말했다.

“아자젤은 내 목숨을 구해줬다. 하지만 난 녀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계약자야.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이라는 건 어떻게 안 되더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실소했다.

신자운이 재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주위에 괴물들이 너무 많았다. 지수나 린과 같은 재능을 넘어선 무언가를 본다면 자괴감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아자젤이 말했다. 좌를 차지하게 되면 역대 분노의 악마들이 지녔던 힘을 계승받기에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되면 조금이라도 녀석의 계약자에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녀석의 곁에 있고 싶으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신자운의 모습은 아주 떳떳해 보였다.

‘그게 좋아한다는 거잖아, 븅신아.’

나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옆에서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민수아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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