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229. 탐욕과 분노(2)
“분노의 좌를 두고서 쟁탈전이 열렸다고?”
“예…….”
일렬로 무릎을 꿇고 있는 악마들을 감히 내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처음에는 몇몇이 홧김에 던졌지만 한걸음을 때기도 전에 머리가 잘려나간 뒤로는 조용해졌다.
‘네비로스보다도 약한 것들이.’
나는 쯧쯧 혀를 차며 악마들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몇몇 악마들이 크게 움찔거렸다.
신격은 대부분 중하급이었지만, 능력치는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닌 능력에 비해 신격이 높았다.
그건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이놈들이 악마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놈들은 마계의 악마 중에서도 말단 중의 말단일 테지.
“그럼 이놈을 노린 건 마몬이 시켰다는 건가?”
“비, 비슷합니다.”
마몬이라는 말에 몇몇 악마들이 발끈하는 눈치였지만 차마 대놓고 따지지는 못하는 얼굴이었다.
내 신격은 최상급에 이르렀으니 당연하다.
마몬이라고 해도 정면에서 싸우면 나를 어쩌지 못한다.
애초에 마몬은 잡기술이 많은 놈이지 힘 자체는 그렇게까지 강한 놈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소속된 악마들을 이용해 좌를 탈환하려는 거군.’
이놈들의 말에 의하면 마몬은 제법 강하다 싶은 악마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쟁탈전에 참여시키려는 모양이었다.
마몬 말고도 마라 파피야스와 벨제부브도 쟁탈전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7대 악마는 쟁탈전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참여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불쌍한 아바돈.’
지금쯤 올림포스의 감옥에서 쓸쓸히 밥을 먹고 있을 한 악마가 떠올랐다.
지은 죄가 있어서 풀어줄 수는 없지만 조금 불쌍해졌다.
차라리 아폴론과 한 몸이었을 때를 그리워하려나.
“쟁탈전에 참여하는 악마들 수준이 대략 이 정도인가?”
처음 악마들에게 포위되어 있던 악마는 요조숙녀처럼 다소곳하게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이 향하자 움찔하며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얼굴만 보면 산적같이 생긴 놈이 그러니 뭔가 불쾌하군.
“저, 저는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닙니다. 단지 조금이라도 참여 숫자가 많으면 확률이 올라가니 끌어들이려고 했을 뿐입니다.”
“역시 그렇군.”
“예, 옙.”
마계는 결코 만만한 장소가 아니다.
상위 20위권 안에 드는 악마들은 하나하나가 최상급 신격을 지닌 존재들.
거기에 10위 이내로 들어가면 그 이상이다.
말하자면 외신급.
니알라토텝이나 이드라와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평범한 최상급 신들보다도 훨씬 강하다.
괜히 아자젤이 시스템까지 개무시하며 지구에 떵떵거리고 남아 있는 게 아니다.
“저기……, 이야기는 끝났나요?”
눈치를 살피는 악마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언제 왔는지 민수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는 저 악마들을 묵사발 낼 수 있는 나와 달리, 민수아의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운 존재들일 테니 당연하다.
“이, 인간이 셋이나?”
“설마 나머지 두 명도 비슷한 수준인 건가?”
신자운과 민수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악마들이 크게 동요했다.
방금 나에게 잘근잘근 밟힌 게 트라우마가 됐는지 신자운과 민수아를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무서워해서 나쁠 건 없지.’
신자운의 실력이면 신격이 없다고 해도 저 악마들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개사기 스킬인 한계돌파를 보유 중이니까.
‘잠깐.’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이 가정이 옳은 건지 아닌지는 모른다. 슬쩍 민수아를 보자 녀석은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그 미심쩍은 행동 덕에 확신할 수 있었다.
신자운을 어째서 마계로 데리고 와야 했던 것인가.
그 해답을 지금 깨달았다.
“야, 니네 할 거 없지.”
“아, 아뇨. 저희는 마몬 님의…….”
“뭐라고?”
“아, 아닙니다. 할 거 없습니다. 옙.”
대장 악마는 고분고분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진작 그랬으면 좀 좋아.
“마몬에게 우리를 안내해라.”
“마, 마몬 님께 말입니까?”
“어차피 보고해야 할 거 아냐. 그때 따라가면 되지.”
“그, 그건……!”
“싫어?”
싱긋 웃으면서 말하자 악마들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아닙, 아닙니다. 저희만 따라오십쇼.”
신과 동등하거나 이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악마가 인간에게 기어야 하는 상황이 우스웠다.
이런 점에서 신보다는 악마가 상대하기 편했다.
악마들은 힘의 우열만 정해지면 바로 납작 엎드리니까.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군.”
“동감이에요.”
신자운과 민수아는 그런 광경을 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 확실히 이렇게만 보면 악마들이 좀 불쌍해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악마들이 인간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놈들보다 약했다면 이놈들이 왜 ‘악마’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
마계에서 살아가는 건 악마만이 아니다.
지구에서 등장하는 것보다 몇 배는 강하고 흉악한 몬스터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다녔고, 악마를 숭배하는 지성체들도 존재했다.
바로 마족.
인간보다는 조금 수명이 길며 마력에 민감한 종족이다.
마족들은 악마들을 숭배하며 도시와 마을을 이루었고, 악마들은 그런 마족들에게 공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중 7대 악마들의 영역은 더욱 특별했다.
언제 습격 받아 죽을지 모르는 마계에서 ‘안전지대’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7대 악마의 영토를 침범할 간 큰 악마들은 없는 터라, 자연스럽게 7대 악마의 영토는 세가 불어나고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거대한 7대 악마들의 영토 중 지금 ‘분노’의 영역에 주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많은 악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분노의 좌를 차지하려는 것도 당연했다.
특히 7대 악마 중에 하위권이라고 할 수 있는 마몬의 경우에는 더욱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스모데우스를 죽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설마 폭식도 나설 줄이야.’
보통 7대 악마 중 상위에 존재하는 3명은 자신의 영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루시퍼의 경우에는 ‘마왕의 좌’를 지키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자젤의 경우에는 항상 떠돌아다녀서 본인의 영역에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폭식도 마찬가지라 지금까지 생각했는데 가장 먼저 나설 줄이야.
‘아바돈이 사라진 지금, 색욕만 처리한다면 분노의 영역도 내가 차지하리라 생각했건만.’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폭식, 벨제부브에게 붙은 악마들은 서열 8위부터 10위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몬이 포섭한 악마 중 가장 강한 악마는 14위.
솔직히 게임이 되지 않았다.
쿵쿵쿵!
“마, 마몬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난감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싸매고 있던 마몬은 갑자기 들려온 부하의 목소리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분명 내가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했건만!’
심지어 문까지 두드리다니!
자신이 최근 부하들을 너무 풀어준 모양이다.
아무래도 방금 소리친 놈을 본보기로 삼아 기강을 세울 때가 되었다.
‘무능한 놈들은 필요 없지. 이 기회에 아예 물갈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쟁탈전에 참여도 못하고, 쓸 만한 것들을 데려오지도 못하는 쓰레기들을 자신이 영역에 두고 싶지 않았다.
“방금 문을 두드린 놈이 어떤…… 컥!!”
콰쾅!!
문을 여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며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자신이 쓰러졌다는 걸 깨달은 건 잠시 후였다.
‘방금 내가 맞은 건가?’
그것도 얼굴을 맞고 피라미처럼 날아가 처박혔다 이 말인가?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문을 안 열어?”
건방진 목소리였다.
깔끔하게 정돈해둔 가구들을 부수며 쓰러져있던 마몬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검은 머리칼에 더러운 인상.
눈매가 특히 더러운 저 얼굴은 마몬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냐. 까마귀!”
“오랜만이다. 얼굴 보니까 반갑네.”
자세히 보면 세한의 옆에 쭈뼛거리고 서 있는 악마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닌 걸보니 죄다 두들겨 맞은 모양이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세한과 만났던 건 불과 몇 달 전이다.
놈을 이용해 아스모데우스를 죽이는데 성공했었다.
아흐리만이 이후 간단히 쓰러진 건 예상외였지만 아자젤의 도움이 있었으니 이상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마…… 니알라토텝을 죽였다는 게 정말인가?’
분노의 악마 쟁탈전 관련 문제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최근 커뮤니티에도 들어가 보지 못한 터라, 페트로이아에서 일어났던 사건도 그다지 알지 못했다.
반고가 린 테일러라는 소녀에게 죽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른다.
“외신의 신격마저, 흡수한 거냐?”
“보다시피.”
“어처구니가 없군.”
방금 자신이 간단히 얻어맞은 것도 당연했다.
세한은 니알라토텝을 죽였다.
플레이어의 특성상 죽인 상대의 신격을 흡수했을 테고, 능력치도 한층 증가했을 것이다.
‘헛소문이라고 생각했건만.’
눈앞에 산 증거가 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니알라토텝을 쓰러트리지 않고서야 이렇게 급속도로 강해진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곳에 왔다는 건,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냐?”
입속이 바싹 말랐다.
마몬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재해가 들이닥친 거나 마찬가지다.
‘이길 수 있을까?’
마몬은 7대 악마다.
외신급 존재인 건 맞다. 그렇다고 니알라토텝보다 강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니알라토텝은 외신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편이라 최소 서열 4위 이상은 되어야 이긴다고 확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한은 니알라토텝을 죽였다.
즉, 최소 악마 서열 4위 이상의 힘을 지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뭣보다 죽일 수 없는 ‘불멸자’를 죽였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대체 놈은 무슨 수를 써서 죽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외신을 죽인 것인가.
‘망했군.’
분노의 좌고 자시고 우선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곳에서 싸우다 죽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후회되냐? 이래서 함부로 은원관계를 만들면 안 되는 거야.”
“……새겨듣도록 하지.”
눈치를 슬슬 살피며 신격을 모으는 마몬의 모습에 세한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틈만 보이면 바로 도망칠 속셈이네.’
놈이 작정하고 도망치면 상당히 귀찮아 진다.
잡을 수야 있겠지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너를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오늘은 널 죽이러 온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세한은 근처에 널브러진 의자 중 하나를 가져와 적당히 앉았다.
반면 마몬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거래를 받아들이면 당장 오늘 죽이는 건 넘어가주마.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한 살려는 줄게.”
“…….”
오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마몬으로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거래의 내용은 뭐냐.”
“너 쟁탈전에 참여할 부하가 필요하다며.”
“그, 그건 그렇다만.”
“내가 사정이 있어서 분노의 좌를 차지할 필요가 있거든. 근데 쟁탈전은 신분이 불확실하면 참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말하자면 신원보증을 해달라는 이야기다.
탐욕의 악마와 관련된 이로서 쟁탈전에 참여한다면 다른 악마들이 문제 삼을 리도 없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분노의 영토는 세한에게 넘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마몬에게 정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그거 말고 또 있다는 것이냐?”
“그래, 이건 어려운 건 아니야. 나중에 그냥 내 말에 동의만 하면 돼. 결코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시키지 않을 거다.”
“그걸 어떻게 믿지?”
“만약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거절해도 좋아.”
세한에게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7대 악마 중 과반수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분노의 좌를 차지하고, 마몬에게서 승낙을 받으면 마왕의 좌에 도전할 자격을 지니게 된다.
“좋다.”
마몬은 그런 세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짐작이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마계의 열쇠를 노리는 건가? 그렇다면 오히려 도와주는 편이 낫겠군.’
힘은 약하지만 그는 상당히 영특한 편이었다.
분노의 좌와 자신의 동의.
그것에서 엮을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마몬은 열쇠의 시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만약 세한의 목적이 그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고말고.’
세한이 그것에 대해 알아내려고 해도 무리다.
시험에 대해 아는 건 7대 악마뿐이었고, 7대 악마에겐 시험의 내용을 말할 수 없는 금제가 걸려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