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228. 탐욕과 분노(1)
세한이 마계로 향했을 무렵, 송시우는 세한이 시킨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중국에 있었다.
‘다들 열심히 하는데 나만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이미 송시우가 만든 장비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 플레이어들의 장비 수준을 크게 향상 시켰다.
대부분 보급형의 장비들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상위 던전 공략이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지구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크게 향상된 가장 큰 이유는 송시우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오셨네요.”
“말 편하게 하세요, 누나.”
“그럴까?”
유엔은 이제 상당히 성장한 송시우를 보며 빙긋 웃었다.
예전에는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의 신장은 이제 상당히 커져 있었다.
앳된 모습도 상당히 사라져서 이제야 제 나이에 걸맞은 모습이 되었다.
“세한 형이 부탁한 건 이제 거의 완성됐나요?”
“응. 이제 거의 끝나가. 그래서 확인 차 부른 거야.”
시우는 유엔을 따라 걸었다.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다른 신들도 알지 못하는 극비의 장소였다.
물론, 아바타인 이들도 섞여 있었지만 해당 플레이어들의 신들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건 유엔의 신도 마찬가지였다.
‘신들도 인간들은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건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세한으로 인해 변한 세상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신들은 지구의 인간을 예전처럼 하찮게 바라보지 않았다.
아바타로 삼았어도 이전처럼 행동을 강제하지 않았다.
민아의 신인 어릿광대가 말하길, 마치 신화시대와 비슷하다고 하던가.
신과 인간이 얽히던 시대.
도리어 그때보다 신이 인간을 존중하는 것 같다고 어릿광대는 말했다.
신과 인간이 단절된 시간이 워낙 길었던 이유인지, 혹은 인간과 신의 차이가 좁혀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확실한 건 인간과 신, 둘의 가치관이 변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시간 내에 완성했나 보네요.”
“아직 좀 남았지만, 미국에서도 상당히 원조가 왔거든.”
지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내려가자 거대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비밀기지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우와…….”
그것은 거대한 검이었다.
족히 수 킬로미터는 되는 거대한 검.
눈으로만 봐서는 검의 크기가 제대로 짐작되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이 쥐고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시우가 준 설계도대로 만들었어. 어때?”
“완벽해요.”
“그럼 다행이네. 근데 바로 실전에 사용해도 되려나?”
“이미 비슷한 걸 한번 실험해봤으니 괜찮아요.”
시우의 말에 유엔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지구 어디에서도 저런 거대한 검을 사용했단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으니까.
그야 당연하다.
시우가 이전에 만들었던 건 세한이 만든 환상 세계에서 사용한 것이 유일했으니까.
바로 아카터스를 죽일 때.
거대한 거인의 심장을 꿰뚫을 때 사용했었다.
그때는 한국의 3대 길드에서 지원을 받아 만들었었다.
덕분에 지금처럼 크지도 않았고 완성도도 떨어졌다. 아카터스를 죽인 후, 내구도가 다했으니까.
지금 만드는 건 그때 만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만든 신작이다.
유엔이 비밀리에 모은 플레이어들과 압도적인 중국의 인구를 동원해 만든 비밀병기.
‘거기다…….’
저 거대한 검에는 ‘핵’을 넣는 공간이 있었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그 공간에는 세한이 가진 ‘말뚝’이 들어갈 장소였다.
불멸자를 죽이는 말뚝.
그 힘이 저 거대한 검에 깃들게 되리라.
“단지 문제가 좀 있어.”
“문제요?”
유엔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에스더는 한국에서 공수해 와서 딱 맞지만, 코팅할 오리하르콘이 부족해.”
오리하르콘은 가장 희귀한 금속이다. 모든 금속 중에 가장 단단하며 가볍다.
저런 거대한 검을 코팅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에스더는 제법 단단하긴 하지만 신이나 거인을 상대로 사용하기엔 무른 면이 있었다.
애초에 마력에 민감한 것이었으니까.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세한 형이 저를 여기에 보내신 거고요.”
“정말? 혹시 새로운 광맥이라도 발견한 거니?”
에스더도 한국에서 공급받았던 터라 유엔의 얼굴은 단번에 화색이 되었다.
저 검을 만드는데 디어사이드가 관리하던 에스더 광맥들도 모조리 말라버렸다고 들은지라 오리하르콘에 대해선 생각도 못하던 차였다.
“아뇨, 그건 아니고.”
“아, 그, 그래?”
가볍게 부정하는 시우의 말에 유엔은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하기야 자신의 신도 이런 거대한 검을 코팅할 오리하르콘은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온갖 별에 있는 오리하르콘 광맥을 다 끌고 와야 겨우 할 수 있을까 말까라던가.
오리하르콘은 그 정도로 희귀한 광물이니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설계도에는 저 거대한 검을 오리하르콘으로 코팅하여 마무리 짓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오리하리콘이 부족하리라는 걸 세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세한 형이 이걸 줬어요.”
“그건……?”
시우의 손에 들려있는 건 작은 병이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액체가 들어있는 작은 병. 대체 저걸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변형 오리하르콘, 이라고 세한 형은 말하더라고요. 무기나 장비를 코팅할 수 있는 거라고 해요. 거기다 중요한 건…….”
겉보기에는 기껏해야 단검 하나나 겨우 코팅할 수 있는 양으로 보이지만, 이건 결코 그런 단순한 게 아니었다.
“장비의 크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어요.”
수 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검이라도 그것이 ‘장비’라는 카테고리에 있다면 말이다.
***
마계.
1회차에는 딱 한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마계 무투제가 열렸을 때였다. 본래라면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에 열렸을 것.
거기에 나는 지구의 대표 플레이어 중 한 명으로 참여했었다.
당시에 지구는 거의 멸망 직전이었기에 취급도 그리 좋지 않았지.
그래도 지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싸웠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마 벨제부브를 만나며 무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벨제부브라…….’
마계 서열 제 2위. 폭식의 악마.
아자젤보다 떨어진다는 평을 듣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벨제부브가 약하다는 건 아니다.
7대 악마 중 상위 3명은 다른 7대 악마들보다 족히 한 단계는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군.’
언젠가 마계에 다시 오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진도가 빨라도 몇 년 후가 되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내 생각보다 일은 척척 진행되었고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마계에 올 수 있었다.
심지어 마계 무투제가 열리기도 전인,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자, 신자운이 물었다.
녀석은 내가 아닌 하늘을 보고 있었다.
마계의 하늘은 파란색이 아닌 잿빛이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생기라고는 없는 잿빛.
마치 스모그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지만 전혀 맑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알다시피 우리는 딱 두 명의 악마만 이기면 돼.”
과반수가 되려면 네 명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분노의 악마가 없으니 우리의 선택지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탐욕, 색욕, 폭식.
이 셋 중에 둘을 골라야 한다.
‘오만’도 있었지만 녀석은 논외.
‘7대 악마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오만에게 덤비는 건 미친 짓이지.’
오만의 악마, 루시퍼. 녀석은 7대 악마의 수장에 있는 만큼 강력한 힘을 지녔다.
아자젤도 녀석과 싸우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할 정도.
이미르와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싶은 놈이다.
굳이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 녀석을 고르고 싶지는 않다.
“소거법을 따지면 가장 만만한 건 탐욕과 색욕이 되겠지.”
“그렇군.”
“……넌 다른 의견은 없는 거냐?”
“없다.”
신자운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아자젤이 가라고 해서 왔을 뿐이야. 이곳에서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하긴 그렇군.
신자운은 정말 아무래도 좋은 얼굴이었다.
“애초에 싸우는 것도 내가 아니라 너다. 그러니 싸울 상대는 네가 정하는 게 당연하지.”
“그것도 그러네.”
그럼 대체 너는 왜 따라온 거냐.
정말 따라가라고 해서 따라왔을 뿐인가.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저요?”
나는 잠자코 있는 민수아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오자 민수아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어디로 갈지 정해도 길을 모르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
내가 마계의 길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우선 가까이에 있는 마을을 향해 무조건 걸어야만 했다.
이드라의 도움을 받아 오기는 했지만 페트로이아와 달리 마계는 이드라가 마음대로 위치를 지정하기 힘들다. 아마 적당한 곳에 대충 이동되었을 게 분명했다.
“저는 답하지 않을래요.”
“뭐?”
“어차피 곧 정하시게 될 것 같거든요.”
그게 무슨 뜻인지 물으려는 순간, 땅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다지 큰 진동은 아니었지만 일행 중에 이 진동을 느끼지 못한 자는 없었다.
‘이건.’
미약하게 느껴지는 불규칙적인 진동.
분명 멀지 않는 곳에서 싸움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스스슥.
그림자에서 작은 까마귀 몇 마리가 튀어나오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있다.’
까마귀의 눈을 사용하자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열 명이 넘는 악마들이 단 한 명의 악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민수아가 말한 게 저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내가 슬쩍 수아를 보자 그녀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쾅!
나는 발을 박차며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지금의 내게 이 정도 거리는 코앞이나 마찬가지였다.
‘저긴가!’
열 명이 넘는 악마가 한 악마를 둘러싼 장소가 보였다.
나는 그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떨어졌다.
콰쾅!!
“큭?!”
딱히 한 악마를 구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민수아가 한 ‘곧 정하게 될 거다’라는 말을 믿었을 뿐이다.
“어떤 건방진 새끼야!”
악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대략 중하위 신격을 가진 강자였지만, 악마로 치면 크게 높은 수준은 아닐 것이다.
“나다.”
“뭐?”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악마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인간이잖아?”
처음에는 경계심이 가득 차 있던 눈동자였지만 내가 인간인 걸 확인하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포위되어 궁지에 몰려있던 악마조차 나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플레이어가 어떻게 마계에 있는 거지?”
악마들이 술렁이며 나를 보았다.
그 시선에 공통된 점은 모두 나를 얕잡아보고 있다는 거다.
“인간이 여기에 있는 것도 황당한데, 갑자기 우리 일을 방해해? 정녕 미친 것이냐?”
“그냥 무슨 일인가 싶어서 왔을 뿐인데.”
나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주변의 악마들을 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혼자 고군분투 중이던 남성체 악마였다. 상처투성이였지만 개인의 실력은 포위한 악마들보다 강했다. 지금 떠들고 있는 대장 악마보다도 조금 강한 수준이었다.
“니들 여기서 뭐하냐?”
“뭐, 뭐?”
“아니 왜 여기서 싸우고 있나 싶어서 말이야.”
이유가 있으니 싸우고 있던 거겠지.
뭣보다 나는 마계의 길을 모르는 터라 길을 안내해 줄 녀석이 필요했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대장으로 보이는 악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플레이어 따위가 미쳤나?”
“플레이어 따위?”
녀석의 말에 나도 웃었다.
하긴 녀석의 입장에선 플레이어는 따위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수명도 적은 인간. 놈의 입장에서는 쓰레기와도 같겠지.
“야.”
“야? 크, 크크큭! 진짜 별꼴을 다 보는 군, 어디서 이런 미친 새끼가 튀어…….”
비웃음이 담긴 어조로 욕설을 내뱉던 놈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황당함이 경악으로 변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마 느꼈을 것이다.
내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막대한 양의 신격을.
“이제부터 허튼 소리하면 뒤진다.”
특별히 숨겼던 건 아니다.
단지 놈이 나를 플레이어이자 인간으로 봤기 때문이다.
악마에게 있어 인간이란 먹이.
당연히 자세히 볼 필요가 없었을 거다.
“허, 허억.”
공기가 무거워지고 비웃던 악마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하얗게 질린 안색은 단번에 시퍼렇게 변했다.
“어, 어떻게.”
푹!
무심코 중얼거리던 악마의 말은 유언이 되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의 머리에 한 자루의 검이 박히며 쓰러졌기 때문이다.
“허튼 소리하면 죽는다고 했잖아.”
마계는 강자지존, 약육강식의 세계다.
이놈들에게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오직 압도적인 힘.
“어차피 길 안내는 한 명이면 충분하거든.”
단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