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227. 마계(3)
퍼블리셔의 중심.
수많은 게임을 관리하는 중앙 통제실.
그곳은 거인족이라도 극히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장소였다.
‘위기는 곧 기회라지.’
거인 요루엠 또한 통제실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거인 중 하나였다.
본래 지구의 GM이었지만 최근 이런저런 사건들로 인사변동이 일어나며 통제실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반고 님이 죽은 건 안타깝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란 말씀이야.’
덕분에 요루엠은 통제실에 들어올 수 있는 위치까지 오게 되었다.
‘아키넨 그 멍청한 새끼.’
요루엠은 자신의 동기였던 한 거인을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멍청한 놈. 커뮤니티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로 볼 때 지구측에 붙은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구에 붙은 건지 요루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작은 별 따위가 퍼블리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한 건가?
‘놈이 가버린 덕분에 내게 순서가 온 거지만.’
어쨌든 요루엠으로선 아무래도 좋은 노릇이다.
그는 이제 통제실에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거인이었고, 앞으로는 갑의 위치에서 긴 시간을 살아가리라.
“이미르 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지?”
“권한을 요청하러 가셨으니 대략 한 달쯤 걸리지 않으려나.”
“어휴,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그런 요루엠의 귓가에 거인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최근 계속된 사건으로 그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걱정도 팔자구만.’
분명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벌인 일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퍼블리셔로부터 게임을 탈취한 것에 그치지 않고 반고를 죽이다니!
반고는 전 우주에서도 감히 덤빌 자가 없는 강자 중 하나였다.
이미르에게 패한 이후,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괴물 중의 괴물.
그런 반고가 페트로이아에서 린 테일러에게 죽은 건 일대 사건이었다.
황도 12궁 중 제 6궁에 불과한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의 힘을 이어받은 인간 소녀가 태초의 거인 중 한명을 쓰러트렸다. 고작 중상급 신격을 지닌 신의 아바타가 벌인 일이라기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분명 대단한 일인 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퍼블리셔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거기다 이미르 님은 아직 건재하시고.’
거기에 강한 힘을 지닌 거인들은 몇이나 있었고, 퍼블리셔가 부리는 별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거기다 지금 권한 요청을 하러 사라진 이미르는 지구에 상당히 분노한 상태였다.
‘외신을 끌어들이려나? 아니, 그건 내가 너무 오버해서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고작 별 하나를 지우려고 외신을 끌어들이다니.
하지만 얼마 전에 보았던 이미르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때 이미르는 반고를 죽은 충격으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찌됐든 이제 지구는 시한부인 셈이었다.
요루엠은 대충 결론을 지은 뒤 머릿속에서 지구에 대한 내용을 깔끔히 지웠다.
어차피 이번 사건도 긴 시간 속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
대충 상황을 정리한 이후, 나는 마계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우로부터 새로운 장비를 공급 받고, 1회차로부터 전승받은 스킬들을 확인했다.
전승패키지를 통해 이제 나는 1회차에 내가 지녔던 모든 스킬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퍼블리셔로부터 게임을 탈취한 이후, 벌써 몇 번이나 메인 퀘스트가 지나갔으니 당연한 일이다.
능력치는 능력치대로 1회차 시절의 나를 이미 초월한 이후였고, 이드라로부터 얻은 전승 스킬도 훨씬 강해졌고 수도 많아졌다.
‘지금이라면 가능하려나…….’
1회차 마계 무투제에서 나는 폭식의 악마 벨제부브와 싸웠다.
사실 싸웠다고 말하기도 우습다.
어찌어찌 한 방을 먹이긴 했지만 나와 벨제부브 사이에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민아.”
“아, 뭐야. 뭔데 또.”
갑자기 내가 부르자 TV를 보고 있던 민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내가 한 말은 기억하고 있지? 아키넨에게는 말해뒀다. 나머지는 모두 네가 하기 나름이야.”
“아, 알고 있거든요? 아우, 항상 나만 빡센 일이야. 어릿광대에게 이를까보다.”
“어릿광대도 이번 일에 도와주기로 했어.”
“어, 진짜? 자기는 신경 안 쓴다고 하던데.”
“네가 죽는 건 싫었나 보지.”
퍼블리셔가 지구를 침략하면 민아의 목숨은 없다.
이전이었다면 어릿광대도 그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게임 하나가 섭종하나 보다 하고 말았을 테지.
하지만 우리와 인연을 쌓으며 어릿광대는 민아에게 정을 주고 말았다.
그런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건 우리가 게임을 탈취한 이후다.
인간형 옵저버로 민아와 자주 대화하고는 하더니 이제는 항상 민아와 붙어 다니곤 했다.
“그렇구나…….”
민아는 내심 감동한 얼굴이었다.
요즘은 신과 아바타라기보단 친구였지만, 이러나저러나 신경 써 주는 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런 민아의 어깨를 두드려준 이후,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는 지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한지수, 너 정말 안 따라올 거야?”
“네, 네. 음, 네. 이번에는 쉬려고요.”
이번 마계에 데려가는 건 지수로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미묘한 얼굴로 거절했다.
따라오고 싶다는 눈치였음에도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요즘 왜 그런데?’
수상하긴 했지만, 나는 지수를 최대한 믿어주기로 했다.
본인도 엄청 따라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애써 거절하는 얼굴이었으니까.
“거기다…….”
의외인 점은 지수를 따라 우리 길드에 온 녀석들이었다.
지수가 간만에 길드로 돌아왔다 싶었더니 의외의 인물을 둘이나 달고 왔다는 점이다.
“안녕하세요, 세한 님. 민수아예요.”
“…….”
바로 민수아와 신자운.
아자젤은 없었지만 이 둘이 우리 길드에 있는 것만으로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야 신자운은 이전에 우리 길드원들을 습격한 전적이 있으니 당연하다.
요즘 좀 완화되기는 했지만 민아는 여전히 신자운을 볼 때마다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녀석을 볼 때마다 얻어맞았던 배의 통증이 따끔따끔 느껴진다나.
“제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데려가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지수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어디로 봐도 대신 데려가 달라는 얼굴이 아니잖아.
“정말로 오빠랑 함께 가고 싶지만 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지. 지수가 가면 나도 좋지만 일이 있다는데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잖아.”
“억지로 끌고 가셔도 되지만……. 조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열망이 깃든 눈동자로 나를 올려보았다.
“곧 끝나니까요.”
대체 뭐가 끝난다는 거야?
궁금하기는 했지만 물어도 지수는 이것에만은 답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둘은 왜 따라온 다는 거야?”
이상한 건 지수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길드를 찾아온 민수아와 신자운도 이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자젤 님이 세한 님을 도와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근데 그 세한 님이라는 호칭 말고 다른 거 없어? 들을 때마다 좀 그런데.”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공손하게 말하는 민수아의 모습에 괜히 나까지 점잖아졌다.
유독 민수아는 나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광기의 마왕 엔딩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미래를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민수아의 태도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오빠라고 부르는 건 안 돼요.”
그때, 지수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지금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알아요? 더 늘리면 헷갈릴 걸요.”
말투는 지극히 담담했지만, 마치 ‘그렇게 오빠소리가 듣고 싶으냐’라고 추궁하는 얼굴이었다.
오빠라고 하는 애라고 해봐야 지수나 민아밖에 없는데. 린에게는 계속 말해도 결국 아저씨로 돌아오는 상태였다.
“같은 플레이어인데 그냥 씨 자 붙여서 부르던가.”
“그, 그건 좀…….”
“그냥 세한 님이라고 불러도 문제없잖아요. 거리감 있고 좋은데요.”
지수는 아무래도 수아와 내가 친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이 부르는 호칭과 같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민아도 그것 때문에 눈총을 자주 받았고.
참 피곤한 성격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타인을 해코지한 적은 없어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괜찮아. 어차피 존댓말 쓰잖아. 세한 님보단 그냥 세한 씨라고 부르는 게 낫다. 그렇다고 오빠 소리 들을 만큼 친한 것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수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슬쩍 지수를 바라본 후,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미래를 보는 제 능력은 마계에서 세한 님……이 아니라 세한 씨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왔습니다.”
“신자운을 데려온 것도 그런 이유인가? 미래에 관계되어 있다거나.”
“예.”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계에서 신자운이 필요한 일이 생기는 모양이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수아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세한 씨는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미래를 바꿀 수 있기에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말하게 되었다가 세한 씨의 행동에 영향이 가면 제가 본 미래와 달라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겠네.”
“네. 결코 세한 씨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자젤 님도 기대하고 계세요.”
아자젤도 기대하고 있다니.
그럴 거면 마계에 따라오면 되지 않나.
“아자젤 님이 함께 오시면 미래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나태의 악마의 영향력이란 마계에서 절대적인 것이니.”
“그렇군.”
확실히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조금 수상쩍기는 했지만 민수아가 따라와서 내게 나쁠 건 없었다.
‘이제부터의 일은 나도 모르는 것이니까.’
1회차에 마계에 갔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 달라졌다.
그때는 애초에 퀘스트를 통해서 마계 무투제에 참가하게 된 거였고, 이번에는 그냥 마계로 넘어가는 거다.
7대 악마중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 마왕의 좌에 도전하는 것이 이번 목표였다.
“그럼 준비는 다 해서 왔겠지?”
“네.”
“너는?”
나는 잠자코 서있는 신자운에게 물었다.
녀석은 잠자코 팔짱을 낀 채 고개만을 끄덕였다.
‘폼 잡기는.’
참 재수 없게도 얼굴은 잘생겨서 저런 모습이 꽤나 어울렸다.
민수아의 시선도 그런 신자운에게 박혀있는 걸보니 나만 멋있다고 생각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럼 바로 가자.”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마계에서 결과를 내는 것뿐이었다.
***
세한과 신자운 일행이 이드라가 있는 운영실로 내려가자, 민아는 슬쩍 지수를 보았다.
‘정말 뭔 일 있나?’
다른 누구도 아닌 지수가 세한이 함께 와 달라는 말을 거절하다니.
예전이라면 싫다고 거부해도 스토킹하던 여자가 정녕 맞단 말인가.
‘나도 가고 싶은데.’
민아의 생각처럼 지수도 세한을 따라가고 싶었다.
최근 세한과 함께 다니지 못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내가…… 해야 해.’
알데바란이 지상에 강림했을 때, 미래의 린은 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끔은 나쁜 아이가 되셔야 해요.」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세요.」
그때는 그런 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내가 무언가를 해야 되나 보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생각만 해왔다.
얼마 전, 수아에게 미래를 묻기 전까지.
「할 수 있을 거예요.」
지수는 수아에게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사용할 계획을 미리 이야기했다
그걸 사용한다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수아는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길 망설였다,
그것은 지수에게 있어 너무나 끔찍한 미래였으니까.
「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분명 엔딩은 바뀌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엔딩은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계속 흔들리고 있는 걸보니 언제든 변동될 것 같지만…… 너무 위험해요.」
세한과 지수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지만, 그렇다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수아가 본 엔딩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꾸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수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지수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마치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처럼.
「그 미래에는 지수 언니가 없어요.」
수아가 본 엔딩에는 언제나 세한의 곁에 지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엔딩 어디를 봐도 지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