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224. 반역(3)
“읏!!”
리브라가 부러졌다.
만약 리브라가 부러지는 순간 고개를 뒤로 젖히지 않았다면 머리까지 박살 났을 것이다.
이마를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 머리가 크게 흔들리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을 정도였으니까.
‘……방어가 약해졌어.’
지금까지 반고의 주먹에 계속 얻어맞은 탓인지 린의 몸을 두르고 있던 방벽이 약해졌다.
열쇠의 힘을 이용해 힘을 계속 보충하고 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급격히 강해진 신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 이상 마력을, 신격을 들이붓게 되면 목숨이 위험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꽈악.
반토막난 리브라를 손에 쥐었다.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건 공포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육신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괜찮아.’
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반고를 보았다.
리브라를 부러트린 탓인지 그의 몸을 감싸던 공포가 옅어졌다.
꽉.
한층 검을 꽉 움켜쥐자 떨림이 멎었다.
그래, 아직은 싸울 수 있다.
그런 린을 반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어찌 이럴 수 있는 거냐.’
한계는 이미 옛적에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쓰러지지 않았다.
정의의 천칭마저 부서트렸건만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 주제에.’
고작 인류의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미물이.
정의의 여신의 자격을 지녔으면서도 세상을 버린 반역자가.
린이 검을 꽉 움켜쥐듯 반고 역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누구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두 명의 발이 앞을 향해 내디뎌졌다.
반쪽만 남은 리브라에서 금색의 빛이 솟구친다. 그 길이는 대략 1미터 정도.
‘빛의 칼날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터.’
이대로 계속 싸우게 되면 자신의 승리다.
캉! 카카캉!!
주먹과 검이 찰나의 순간에 수백 번을 격돌했다.
금색의 입자가 꽃가루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반쪽만 남은 리브라의 칼날이 조금씩, 조금씩 무뎌진다.
린의 검이 반고의 주먹을 미끄러트리며 어깨를 노린다.
빛의 칼날이 피부에 닿기 직전에 뒤로 밀려난다.
시간이 역행하며 린의 몸이 방금의 행동을 되짚는다.
반대로 반고의 몸은 방금 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뻗었던 오른손 대신 왼손을 휘둘러 린의 얼굴을 노렸다.
그러나 린 역시 처음 루프를 경험했을 때와는 달랐다.
아직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반고의 공포를 쫓는다.
시간의 흐름을 잡는다.
거부할 수 없었을 시간을 비틀며 머리를 오른쪽으로 움직여 주먹을 피했다.
치익!
린의 볼을 반고의 주먹이 스쳐 지나가며 핏방울이 흩날렸다.
몇 미리 차로 반고의 주먹을 피한 것이다.
만약 루프하는 시간을 움직이지 못했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린의 눈에 흔들림은 없었다.
마치 당연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두렵지 않은 것이냐?’
반고는 이미르와 같은 불멸자는 아니다.
불멸과 열쇠를 다룬 싸움에서 이미르에게 패했으니까.
그러나 그는 태초의 거인이었기에 영생을 살 수 있었고, 그의 육신은 무엇보다 강건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반고는 죽음을 모른다.
하지만 필멸자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건지는 안다.
그도 생명체이기에.
‘아직 어린아이 아니었나?’
그것도 약간 소심한 기색이 있던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랬을 텐데, 어째서 물러서지 않는 것인가.
‘어째서.’
검과 주먹이 격돌할 때마다 대지도 함께 울리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의 치솟는다.
더 이상 대지가 둘의 힘을 버틸 수 없을 때에야 둘의 몸이 떨어졌다.
‘정의를 버린 정의의 여신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는 거지?’
방금 전까지라면 반고가 바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반고의 움직임에 약간의 망설임이 생겼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볼 때오는 공포 때문이었다.
쓰러져야 하는데 쓰러지지 않는다.
거기에 아주 조금씩이지만 린은 아직도 강해지고 있었다.
당장 쓰러져야 할 텐데 도리어 눈동자의 빛은 더 강해졌다.
왕관의 빛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분명 정의를 버린 린은 정의의 여신으로서의 권능을 사용하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리브라는 별빛과도 같은 광체를 내뿜으며 무엇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분명 순수한 정의의 빛깔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반고의 가슴이 술렁였다.
옅어졌던 공포가 조금씩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보인다!’
상대의 공포가 또렷이 느껴졌다.
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콰앙!
발을 앞으로 내딛자 폭탄처럼 땅이 터져나갔다.
소리를 찢으며, 빛으로 휩싸인 린이 단숨에 반고와의 거리를 좁힌다.
‘이런!’
설마 린이 이렇게 달려들 줄 몰랐던 반고는 순간적으로 뒤로 뛰었다.
고작 인간에 불과하다고 머릿속은 계속해서 소리쳤지만, 마음은 달랐다.
한번 치켜든 공포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도 작은 생쥐에게 겁을 먹기도 한다.
발로 한번 밟으면 죽을 뿐인데 쥐가 작은 이빨을 들이밀며 덤벼들면 도망치기도 한다.
반고의 입장에선 그 생쥐가 밟아도 죽지 않는 것이다.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았다.
린의 눈에는 그런 반고의 공포가 또렷이 보였다.
‘놓쳐서는 안 돼!’
아주 작은 당황.
아주 작은 공포.
그 모든 것이 합쳐 만들어진 작은 기회였다.
반고는 강했다.
신체도 기술도, 무엇하나 따라잡지 못했다.
분명 계속 싸우면 린이 반고를 완전히 따라잡는 것보다 먼저 목숨을 잃게 되었겠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무서웠다.
린은 아직 어린아이였으니까.
「린,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세한이 말했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인류가 가진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누구보다도 위대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는 자신에게 모든 걸 맡겼다.
여태까지 자신이 지켜온 정의를.
인류의 정의를.
자신은 늘 지켜지고 있었다.
세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린은 그렇게 느꼈다.
위험하지 않은 장소에서 편하게 지내왔다.
그건 힘을 얻은 후에도 같았다.
린은 언제나 안전한 장소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힘만을 발휘했다.
아버지는 그런 린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슬퍼했다. 린이 가진 힘을 자신이 지녔다면, 늘 그렇게 말했다.
그럼 린이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싫다.
모든 걸 지닌 게 자신이라면, 그건 자신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다른 누가 대신하는 게 아닌.
내가.
금색의 눈동자가 밝게 빛나며 린의 몸이 가속했다.
음속을 넘고, 빛을 따라잡으며 황금색 빛줄기가 길게 늘어진다.
멀어지는 반고를 한달음에 쫓아간다.
‘이게 마지막.’
반고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것이 저 소녀의 마지막 불꽃임을.
이 불꽃을 꺼트리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는 걸.
뿌리쳐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어떻게 해도 떨쳐낼 수 없었다.
이제야 발돋움한 어린 신을.
인간이자, 플레이어에 불과한 존재를.
“고작, 인간 따위를 내가 뿌리칠 수 없다고?!”
내가. 이 반고가.
“까불지, 말란 말이다──!!”
딸칵.
세계를 움직이는 시계태엽이 움직인다.
시계바늘이 움직이며 시간이 역행한다.
부서지던 땅이 원래대로 다듬어지고 불어오던 바람이 뒤로 밀려난다.
구름이, 하늘이. 대지가 모든 게 역행하며 역사를 되짚는다.
“너야말로 까불지 마!!”
그렇지만 린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반고의 몸에서 한층 짙어진 공포를 쫓는다. 바로 저것이 신을 죽이는 길이었다.
자신은 그 길을 따라 달린다.
이 길을 탈선하게 되면 자신은 패하고 죽게 되리라.
알데바란은 자신에게 말했다.
「버그」라고.
반고 역시 자신을 버그라고 말했다.
‘만약 내가 정말로 버그라면!’
세계의 법칙을 벗어나는 정도는 간단할 테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도 같이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타고, 타고, 타고 넘어서 폭포와도 같이 쏟아지는 시간의 물길을 거스른다.
그리고 더 이상 올라갈 것이 없다고 느꼈을 때.
반고가 있었다.
불과 수십 미터 앞에.
둘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반고를 향해, 린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아까부터 인간, 인간 시끄러워!!”
리브라를 쥔 오른팔을 높이 들어 올린다. 아직 검이 닿지 않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검을 치켜드는 린의 모습에 반고는 전신에 힘을 퍼트렸다.
시간을 되돌려도 소용없다.
저 버그덩어리는 어떤 힘을 사용해도 자신을 쫓아왔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받아내는 수밖에.
“어리석은 것이!!”
이 공격을 받아낸다면 자신의 승리다.
반고는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세를 잡았다.
머리와 가슴에 박힌 보색에서 보라색 광채가 흘러나왔다.
별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힘이 모여든다.
‘페트로이아가 날아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분명 죽는 신이 있을 테고, 다른 신들과 시스템으로부터 크나큰 패널티를 받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운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했다.
“어리석은 건 너야.”
린은 이를 으드득 깨물며.
반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이미 눈치챘다.
별과 함께 자신을 날려버릴 생각이다.
위로 치켜든 리브라를 손에 꽉 쥐고 반고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그것은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닌, 던지기 위한 동작이었다.
린의 손을 떠난 리브라가 반고를 향해 날아갔다.
“뭣?!”
설마 갑자기 리브라를 집어던질 줄 몰랐던 반고는 그것을 황급히 손을 움직여 튕겨냈다.
린에게 지닌 무기는 리브라뿐이었기에 설마 그것을 던질 줄 몰랐던 것이다.
덕분에 린의 공격을 대비하던 자세가 약간 무너졌다.
그건 찰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아주 짧은 순간.
그 작디작은 틈에 린은 반고의 바로 앞에 당도했다.
‘빈손으로 와봐야 소용없을 텐데.’
헛짓을 하는군. 그렇게 생각하던 반고는 린의 손을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분명 비어 있어야 할 린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쥐어져 있었으니까.
왜 검이 쥐어져 있지?
그것도 어쩐지 익숙한 검이다.
이미르가 신경 쓰던 까마귀가 사용하던 검이 딱 저렇게 생겼었다.
비검 프라가라흐.
분명 그렇게 부르던 검이었다.
‘설마.’
반고는 그제야 린의 바로 뒤에 열려 있는 검은 공간을 볼 수 있었다.
꿈의 마녀 이드라의 전승 스킬인 허수 공간이다.
허수공간이 열리며 프라가라흐가 튀어나오는 동시에, 린은 손에 쥔 리브라를 던진 것이다.
“하아아아!!”
린의 손에 쥐어진 프라가라흐의 칼날에 별빛이 모여든다.
모여든 별빛은 황금색 빛의 기둥이 되며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구름을 꿰뚫고, 하늘을 가를 만큼.
악을 심판하는 정의의 칼날.
그것이 반고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한다.
“……!!”
반고는 양팔을 교차하며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교차한 양 팔목의 사이에 빛의 칼날이 격돌했다.
쿠우웅!!
무겁다. 무겁지만 견딜 수 있었다.
칼날은 아주 조금 팔뚝에 파고들었을 뿐이다.
빛의 칼날은 자신을 베지 못했다.
‘이겼다.’
이제 이것을 밀어내고 힘이 다한 린 테일러를 쓰러트리면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이글거리는 금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어리석은,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눈이다.
평소라면 비웃을 그것이 지금은 너무나 두려웠다.
“우습게보지 마.”
빛의 칼날을 쥔 손에 한층 힘이 들어간다.
금색으로 빛나던 광채가. 그 빛이 점점 더 강해져간다.
점차 어두워지던 세상을 태양처럼 밝히며, 금색을 넘어 백색으로.
그 빛은 밤하늘마저 새하얗게 물들였다.
반고는 깨달았다.
이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저 백색의 검은, 시간을 되돌리려 한다면 그 시간조차 갈라 버리리라.
“꺼져버려──!!”
멈춰 있던 백색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그 앞을 막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
“김세한.”
백색의 검이 떨어진 후, 이미르는 반고와 린이 사라졌던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거인왕이라는 위명과 달리 그 목소리에는 어떤 힘도 담겨 있지 않았다.
혹시나 시스템을 거부하면서 전력을 다해 덤벼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미르는 역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와 만나는 건 다음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아마 퍼블리셔로 떠난 걸 테지.
‘마지막이라…….’
한마디로 퍼블리셔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나를 포함한 지구를 멸망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예상했던 일이다. 어차피 겪어야 했을 일.
설령 내가 놈의 편에 붙었다고 하더라도 지구는 무사할 수 없었을 테지.
“수고했다.”
나는 쓰러져 있는 린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숨은 미약하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럼에도 프라가라흐는 손에 꽉 쥐고 있었고, 부러진 리브라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좌로 돌아간 거겠지. 반고와 싸우며 두 동강이 났으니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는 그런 린에게 미안했다.
만약 내게 조금만 더 많은 능력이 있었다면 린을 싸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열쇠를 다룰 수 있는 게 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린의 손에 쥐어져 있던 프라가라흐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분명 멀쩡하던 칼날이 불에 녹은 것처럼 눌러 붙어 있었다.
‘원상복귀 한참 걸리겠군.’
한 팔로 린을 안은 채, 떨어져있던 프라가라흐를 집어 들었다.
두 동강 나버린 리브라와 달리 이건 칼날이 죄다 녹아버려서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비검 프라가라흐가 막대한 신격을 받아 모든 봉인이 해제됩니다!]
[여신의 권능이 깃들어 진화합니다!]
“엥?”
프라가라흐를 쥐기 무섭게 알림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
비성검(飛星劍) 프라가라흐(SS)
여신의 힘이 깃듯 신검.
빛에 가까운 속도로 비행할 수 있으며 그 위력은 별조차 꿰뚫는다.
하루에 한 번 여신의 권능을 빌어 심판검 백야(白夜)를 사용할 수 있다.
사용 후 프라가라흐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며, 수복 후 재사용이 가능하다.
==
린이 프라가라흐를 쥐고 초대형 빛의 칼날을 사용한 탓인지 여태 잠겨 있던 봉인이 풀려 버렸다.
그뿐 아니라 진화까지 해버렸다.
오히려 본래의 프라가라흐보다 훨씬 강하게.
“오우…….”
예상치 못한 개이득에 할 말을 잃었다.
빛의 칼날, 아니 마지막에 반고를 반 토막 내버린 기술까지 사용가능 하다니.
‘심판검 백야.’
이름부터 내 취향이다.
정말로 린은 하늘이 나에게 내린 복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