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222. 반역(1)
그와 처음 만났던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퍼블리셔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
시스템에서 태어나, 그것의 의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던 때.
반고는 거인족에서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한 존재였다.
누구도 그와 맞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녀석의 이름은 이미르.
반고와 가장 비슷한 시기에 탄생했던 거인.
처음에만 하더라도 그는 결코 거인족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이였다.
대체로 무투파인 다른 거인들과 달리 그의 전투능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거인들과 달리 머리가 좋았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이미르는 자신의 세력을 모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반고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거인왕의 자리는 이미 눈앞에 있었고,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의 반쪽을 찾은 것도 그때였다.
반고는 시스템을 부수고자 했다.
거인은 시스템에 태어났기에 결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통제받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나머지 열쇠의 반쪽을 찾아 시스템에 접근한다면 그것을 파괴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실행되기 전, 이미르가 움직였다.
설마 그 타이밍에 이미르가 칼을 빼어드리라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반고는 자신이 이기리라 확신했기에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 후, 반고와 이미르는 거인왕의 자리를 놓고 싸웠다.
또다시 긴 세월이 흘렀고, 우습게도 패한 건 자신이었다.
거인왕의 자리와 열쇠의 관리자.
그리고 불멸을 손에 넣은 건 자신이 아닌 이미르였다.
「우리는 이제부터 시스템을 이용한다.」
모든 걸 손에 넣은 그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
「이 세계의 시스템에서 태어난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지. 그렇다면 차라리 이용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어째서 그래야만 하지? 차라리 시스템을 파괴하는 편이…….」
「시스템이 없다면 다른 별들을 통제할 수단이 사라진다. 문명이 발전하게 되면 지성을 지닌 존재는 필연적으로 욕망을 가지게 되지.」
이미르는 자신과 달리 시스템을 이용하고자 했다.
시스템이 사라진다면 현 우주의 질서가 어지럽혀지리라 판단한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우주에 존재해야 할 별이 지성체의 등장으로 빠르게 소멸하고, 우주에 환원되어야할 자원이 사라진다.
이미르는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거인으로 긴 시간 동안 싸워온 수많은 신들의 억제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기에 이미르는 퍼블리셔를 만들었고, 거인족의 능력을 활용해 시스템의 ‘관리작용’을 게임으로 변모시켰다.
신을 버린 별.
필연적으로 그것들은 게임이 되었고, 시스템이 준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 멸망했다.
오직 별에 존재하는 지성체들만.
그렇게 지성체가 사라진 별은 다시 본래의 푸름을 찾았다.
새로운 문명이 생겨났고, 시간이 지나면 같은 일이 반복됐다.
그제야 반고는 이미르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는 이 세상을 영원히 순환시키고자 한 것이다.
지성체들이 우주로 뻗어나와 더욱 많은 것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면 우주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별 하나에 그치지 않는 대멸종을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르는 그런 확률 자체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것을 깨닫자 반고는 자연스럽게 이미르의 오른팔이 되었다.
퍼블리셔의 부사장으로서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렀다.
「나는 영원히 당신을 따르겠다.」
비록 자신이 생각한 자유는 얻지 못했지만 반고는 이것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거인족인 자신의 책임.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그것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존재가 나올 줄이야.
카카카캉!!
불꽃이 튀겼다.
린이 휘두른 리브라가 반고의 팔에 부딪치며 튕겼다.
확실히 방금 전과는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미혹을 떨친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고 망설임이 사라져 있었다.
‘정의, 스스로가 정의라고 정말로 믿는다는 말인가?’
자신이 정의라니. 어느 누가 감히 오만한 말을 한단 말인가
신도, 거인족도 아닌 한낱 인간 주제에.
자신이 정의라는 이름을 입에 담다니.
“주제를 알아라, 어리석은 인간이여!”
반고의 주먹이 린의 복부를 향해 쏘아졌다.
그것을 린은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피했고, 그대로 리브라를 휘둘러 반고의 목에 칼날을 닿게 하는데 성공했다.
“조금 강해지는 정도로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리브라의 칼날이 반고의 목을 베기 직전 시간이 되감겨진다.
칼을 뒤로 당겨지고 린의 몸은 우측으로 회전하기 직전의 모습이 된다.
“아악!”
복부를 향해 뻗던 반고의 주먹이 린의 머리를 수직으로 강타했다.
린의 머리가 크게 흔들리며 지면에 내리꽂힌다.
황상의 바닥을 몇 개나 꿰뚫으며 처박혔고, 그 위로 반고의 발이 운석처럼 떨어졌다.
그것을 고양이처럼 튕기듯 일어나 가까스로 피한 린은 지면을 박차고 벽을 박차며 질주했다.
반고가 자신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소용없다.”
반고의 주먹이 린의 얼굴을 강타했다.
린이 어디를 공격하던 반고는 시간을 되감고 곧바로 반격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린은 반고의 주먹에 쓰러졌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황성의 벽을 부수고, 바닥을 부수며 린은 몇 번이고 날아가 쓰러졌다.
“고작, 그 정도로 자신을 정의라 칭한 건가? 우습구나, 우스워. 너도 결국 오만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거다.”
“입 다물어.”
피투성이로 변한 린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금색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입에 담던 존댓말도 사라져 있었다.
“얕보지 마.”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지만,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떨림이 멈춘다.
한 걸음씩 반고를 향해 내딛으며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까지 어떤 싸움에서도 린은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싸운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쓰러지고,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으며 속수무책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거지?
몸에 충격은 누적될 대로 누적됐다.
방어가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신격과 마력이 제법 많다는 건 알지만 이미 오래전에 바닥이 드러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그럴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씩 린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아니야. 확실히 빨라지고 있다.’
어째서지? 왜 계속해서 빨라지지?
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린의 모습에서 달라진 점을 깨달았다.
‘몸이 커졌다?’
반고는 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 소녀의 모습이었던 것이 신장이 커지고 골격이 전체적으로 달라졌다.
마치 급격히 나이라도 먹은 것처럼.
갑작스런 성장에 한쪽으로 묶어둔 머리카락조차 풀려 긴 장발이 되어 너훌거리고 있었다.
‘설마, 신격으로 몸을 일시적으로 강제로 성장시킨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그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린 몸을 강제로 성장시켜 보다 전투에 걸맞은 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몸을 강제로 성장시키고 몇 번이고 자신과 부딪치며 커진 몸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
적당히 상대해 주는 건 이제 끝이다.
다음 공격을 받아치며 단번에 끝낸다.
수억 년간 익혀온 무예는 겉멋이 아니었다.
단 한방으로 별의 지형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담겨 있었다.
카앙!!
“!!”
반고의 주먹이 린의 검과 맞부딪치며 튕겨졌다.
그 충격으로 황성의 상반신이 사라졌고 잔해가 비처럼 쏟아졌다.
자신의 주먹을 정면에서 튕겨낸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다.
허공에서 반고의 주먹과 린의 검이 몇 번이고 부딪치며 튕겨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움직임조차 쫓지 못하던 계집애 주제에.
이제는 금색의 눈동자에 반고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눈 한번 깜박하지 않은 채, 모든 걸 꿰뚫어보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전신의 근육이 꿈틀 거리며 반고의 주먹이 거세게 휘둘러졌다.
주먹과 검이, 다리와 손이. 수십, 수백 번의 공방이 찰나에 교차한다.
처음부터 린이 반고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 건 아니었다.
반고와 린은 살아온 시간 자체가 달랐으니까.
굳이 루프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반고의 힘은 린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쫒아오고 있다.’
몇 박자가 늦던 린의 검이 반고의 주먹을 따라온다.
자신의 움직임을 바로 곁에서 따라붙었다.
느껴졌다.
자신의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발걸음의 소리가.
“이게 대체 무슨…….”
그것을 느낀 건 반고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3자. 이미르도 그것을 눈치챘다.
세한이 린에게 향하는 것을 막고 있던 그는, 린의 기색이 달라지며 계속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왜 그래?”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미르를 바라보며 세한이 비웃었다.
세한도 알고 있었다. 이미 까마귀의 눈을 통해 반고와 린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상황이 좋지 않나 봐?”
“비켜라.”
“싫은데.”
이미르의 정신은 이미 린과 반고의 싸움에 쏠려 있었다.
솔직히 아직 반고가 위험한 건 아니었다.
반고에게는 루프 능력이 있었으니 결코 패배할 리 없었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당장 비키라고 했다.”
“어째 상황이 반대가 된 거 같네.”
세한은 그런 이미르를 향해 상큼하게 웃었다.
궁왕과 빙설왕이 필사적으로 세한을 향해 공격하고 있었지만 세한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그들은 강했다. 강하지만 의지가 없었다.
거기다 이미르는 시스템의 제약 때문에 방해하는 건 몰라도 직접 나서서 싸울 수 없었다.
“지나가고 싶으면 힘을 쓰면 되잖아. 뭐, 그럼 한동안 퍼블리셔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지만.”
거인은 시스템에서 탄생했기에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패널티는 더 크게 받는다.
멋대로 페트로이아에 왔지만 힘을 발휘했을시 패널티는 일반적인 신들보다 훨씬 크다.
그러니 이미르는 섣불리 본신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너는 실수했어.”
애초부터 반고와 함께 덤볐으면 한결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린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함이었겠지.
세한과 함께 있다면 데리고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미르는 얕봤던 것이다.
세한과 린을.
린은 반고가 처리할 수 있고, 세한은 자신이 막을 수 있다.
그렇게 판단했기에 이런 짓을 벌였던 것이다.
위험해 처한 린을 미끼로 세한을 설득하고, 경험이 적은 린은 반고가 설득한다.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린은 반고의 손으로 죽인다.
그러나 이미르의 생각은 틀어졌다.
이미 죽었어야 할 린이 반고와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무서운 속도로 강해지면서.
“실수? 실수는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비켜라. 비키지 않는다면 너의 세상은 내가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반드시 파멸시킬 것이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잖아. 너는 오차를 싫어하지. 지구는 변수가 너무 많은 별이야. 네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거라 생각하라는 거냐?”
“너……!!”
“인간을 얕봐도 유분수지.”
세한은 눈동자가 한쪽은 적색으로, 다른 쪽은 금색으로 타올랐다.
두 눈에 가득 담겨있는 증오는 이미르의 몸을 거미줄처럼 옭아맸다.
인간의 끝이 없는 악의가 이미르의 입을 막았다.
“네가 얼마나 고상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지는 관심 없다.”
세상의 섭리를 위해서.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희생될 생각 따위는 요만큼도 없었다.
언젠가 생길지 못할 만약을 위해 현재의 가능성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너희들은 인간보다 조금 강하고, 조금 오래 살 뿐이야. 그런 주제에 마치 주인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꼴이 우스워.”
스스로 쟁취하지 않은 자유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것이니까.
“야.”
세한은 이미르를 향해 이죽이며 말했다.
“너 내 검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는 있냐?”
“검이라고?”
그제야 이미르는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휘두르던 세한의 검, 프라가라흐가 사라져있다는 걸.
그것이 어디로 사라졌는가.
답은 아주 간단했다.
“이…… 까마귀 새끼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눈을 부릅뜨는 이미르를 향해 세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프라가라흐는 자신의 손을 떠났다.
고작 검 한 자루.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그 별거 아닌 것으로 승부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린.’
세한은 한쪽 눈에서 비치는 린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며 싸워가는 소녀를.
억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반고의 시간을 쫓아가는 인류의 정의를.
분명 반고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다.
근접전에서 싸운다면 이미르조처 승부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문제는 그의 강함이 긴 세월에서 쌓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거다.
수천, 수억 년간 쌓아온 무예의 정수가 반고의 힘이었다.
본래라면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의 힘이었지만, 린은 그것을 쫓아가는 게 가능했다.
린에게는 특성 ‘메리수’가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린과 반고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먹어치워라.’
반고가 가진 모든 걸.
카가각!!
까마귀의 눈에 비친 린은 반고를 향해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미 수백 번은 반복된 무의미한 행동이 아니다.
그 검격은 반고의 무예를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빠르며,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있는 강맹함이 담겨 있었다.
한 걸음씩 쫓아오던 발걸음이 이제는 열 걸음씩 뛰기 시작했다.
반고가 지나온 길을 되짚어오고 있었다.
그가 겪어온 수많은 시간을 건너뛰고 있었다.
분명 아득히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하찮은 인간이.
지금 자신의 바로 등 뒤에 서있었다.
‘버그.’
있을 수 없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시스템의 틀을 벗어난 버그다.
반고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싸우고 있는 건 인간 따위가 아니다.
“──!!”
금색의 섬광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검을 내질렀다.
이제 더 이상 뿌리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를 꿰뚫으려는 검을 확인한 반고는 황급히 시간을 되감았다.
기이이잉!!
다가오던 검이 순식간에 밀려나며 시간이 과거로 회귀한다.
‘오른쪽 어깨를 찌르고 있었으니 곧바로 왼쪽으로 움직여 뒤통수를 노린다.’
반고는 빠르게 판단을 내린 후, 시간이 완전히 되감겨지기 전에 발의 움직임을 틀었다.
아니, 틀려고 했다.
린의 왼손이 반고의 멱살을 잡지 않았다면.
‘어째서.’
시간이 되감겨지며 밀려나야 할 린의 몸이 밀려나지 않았다.
검을 쥔 오른팔은 억지로 비틀리며 밀려나고 있었지만, 왼손으로 반고의 멱살을 잡은 채 저항하고 있었다.
시간은 세상의 이치다.
그 무엇도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애초에 시간의 속박할 수 없는 외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그런데 움직이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금색의 눈동자에 반고의 얼굴이 비쳤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었음에도 그 눈동자는 거울처럼 맑았다.
시간의 틈 속에서 린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야 보여.”
그것은 하나의 감정이었다.
되돌려지는 시간 속에서, 린은 그 감정을 쫓아서 손을 뻗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며 짙은 잔향을 쫓았다.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
“──당신의 공포가.”
절대자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