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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투 플레이어-221화 (221/332)

# 221

221. 자각(自覺)(4)

‘서둘러 린에게 가야 하는데.’

나는 멀리서 느껴지는 린의 신격을 느끼며 조금씩 초조해졌다.

자취를 감췄던 반고의 신격이 린이 있는 장소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번의 격돌 끝에 잠잠해졌다.

린의 신격은 다행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분명 고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린이라고 한들, 혼자서 반고를 상대로 싸우는 건 무리니까.

“여유 있는걸. 이 상황에서 딴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느긋한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궁왕이 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단순한 화살이라면 문제될 게 없었지만, 문제는 화살 전체가 마력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단순한 물리 방벽이라면 간단히 투과하기에 마력으로 방어하지 않는다면 막을 수 없었다.

‘물론 나는 다른 방법이 있지만.’

핑핑핑!

나를 쫓아 날아오는 화살들의 궤도를 읽은 후, 허수공간을 열었다.

그러자 허공에 열린 공간 속으로 화살들이 빨려들 듯 사라졌다.

허수공간은 생명체는 담을 수 없지만 그 외에는 모조리 담는 게 가능하다.

아무리 유도능력이 있는 화살이라도 코앞에 허수공간을 열어버리면 그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궁왕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지면을 얼리며 다가오는 얼음의 파도는 꽤나 성가셨다.

‘만약 이지를 상실하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어.’

무차별 난사를 가하는 궁왕과, 그 곁에서 각종 얼음을 조종하며 사방을 압박해 오는 빙설왕의 힘은 막강했다. 전신을 호신강기로 뒤덮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피부가 얼어붙어 죽었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도 숨을 쉬는 건 상당히 괴로웠다.

‘역시 강해.’

아무리 저 둘이 페트로이아를 배신한 이들이라도 칠 영웅이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1회차의 자신이었다면 이렇게 정면으로 싸우려고 하지도 않았으리라.

허나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쓰러트리고자 했으면 얼마든지 쓰러트릴 수 있었다.

니알라토텝을 꺾고 최상급 신격에 도달한 지금의 나라면 힘으로 찍어눌러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단지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로군.”

빙설왕과 궁왕의 뒤에 서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남자.

거인왕 이미르는 나를 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많을 수밖에. 퍼블리셔의 우두머리가 함부로 다른 별에 간섭하는 건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을 텐데? 설령 관리자의 감투를 쓰고 있다고 해도 말이야.”

“호오, 관리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확실히 나는 함부로 다른 별에 간섭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선 시스템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해. 내가 움직일 만한 중대한 사안이 있다거나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만 하지.”

시스템을 이용해 포인트를 벌어먹고 사는 퍼블리셔라도 시스템에게 자유로운 건 아니다.

애초에 ‘그런 자리’를 만든 만큼 오히려 시스템에게 귀속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방해를 하는 정도는 괜찮아. 아무리 제약이 있다고 해도 고작 이 정도 힘도 발휘 못해서야 퍼블리셔의 우두머리로 있을 이유가 없잖나.”

작은 방해라니.

확실히 사용하는 힘은 이미르의 전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정도다.

진심으로 나왔다면 이렇게 대화를 할 수도 없었으리라.

“의도가 뭐냐.”

“의도?”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면서 까지 내게 온 의도.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적다지만 이곳에 강림하는 것만으로 상당한 힘을 소모했잖아? 제한시간도 있을 것 같은데?”

“있고말고. 고작 30분이다.”

이미르는 선선히 답했다.

여태 자신의 일을 방해한 상대를 앞에 둔 것치고는 꽤나 친근한 얼굴이다.

“나는 간단한 제안을 하러왔을 뿐이야.”

녀석은 나를 향해 덤벼들려는 궁왕과 빙설왕을 저지하며 말했다.

“그동안 네가 하는 일을 지켜봤다. 하나같이 놀라운 일들뿐이더군. 나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게임을 지켜봤지만 게임을 스스로 탈취하고 외신을 아바타로 삼은 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나는 그만큼 너를 고평가한다. 이번에는 무려 니알라토텝을 쓰러트리지 않았나.”

“그건 운이 좋았어.”

1회차의 이드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니알라토텝을 물러나게는 할 수 있었어도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흠, 그래? 허나 운도 실력이다. 나는 너를 지켜보며 두 가지 중 고민을 했지. 너를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우리의 편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아무래도 전자는 이쪽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할 것 같거든. 그래서 후자로 결정했다.”

“후자로 결정했다고?”

“퍼블리셔에 자리를 마련해 주마.”

자색의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지구를 독립적인 게임으로도 인정해 주지. 대신 네가 퍼블리셔에 속하길 바란다. 아, 린 테일러라고 했나? 그 아이도 함께했으면 하는군.”

“뭐?”

“네게도 나쁜 건 없을 텐데? 계속 우리와 싸워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거다. 되도록 그대의 편의를 배려해 주고 지구에게도 손을 완전히 떼도록 하마.”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이미르의 말도 분명 진심일 테지.

하지만.

“싫다.”

“……호오, 이유가 뭐지?”

“그걸 너한테 말할 필요가 있나?”

“하긴 그렇군.”

이미르는 짐짓 아쉽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현명한 선택은 아니야. 내가 이곳에 30분밖에 머무르지 못한다고 해서 안심한 건가? 반고와 싸우고 있는 차기 정의의 여신은 살아남지 못할 거다.”

“역시 성의 지형을 바꾼 건 너였군. 신격과 마력도 느끼지 못했던 건 열쇠의 힘을 사용한 거냐?”

“하하, 정답이다. 거절도 생각해야 했으니 적어도 성가신 걸 하나쯤은 처리해두고 싶었거든.”

이미르는 호쾌하게 웃었지만 나는 입안이 바싹 말랐다.

태연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린이 계속 신경 쓰였다.

“후회가 된다면 물러줄 수도 있다만.”

“아니.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그래? 아쉽군. 네 선택이 저 아이의 목숨을 거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녀석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러자 뒤로 빠져있던 궁왕과 빙설왕이 재차 앞으로 나섰다.

“이 둘과 나를 뚫고 저 아이에게 갈 수 있을 거 같나? 아니면 린 테일러가 30분을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어느 쪽이든 불가능하다.”

“너는.”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이미르에게 나는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린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냐?”

“……?”

“모르겠지. 플레이어의 능력치는 설령 퍼블리셔라도 볼 수 없으니까.”

확실히 이미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린과 반고에게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고, 나도 이미르가 보조하는 두 영웅을 돌파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르는 린의 특성을 모른다.

아마 반고도 모를 테지.

“그럼 승산은 충분해.”

이미르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정답도 아니었으니까.

***

린은 선과 악에 대해서 여태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아스트라이아가 선택한 정의의 여신이며, 그 역할을 수행해야 된다는 막연한 생각만 가졌을 뿐이다.

“세계의 섭리를 반하는 것이 네가 선택한 정의인가? 분명 많은 희생이 있겠지만 그건 필요한 일이다.”

반고의 말에 린은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손에 쥔 천칭이 반고를 대변해 주고 있었으니까.

천칭검 리브라는 상대가 악이라 판단되지 않으면 검으로 변하지 않는다.

심판을 내릴 수 없다.

린의 인벤토리에는 시우가 만들어준 예비용 검이 있었지만, 그걸로 싸워봐야 반고의 손에 금방 부러지고 말 것이다. 리브라를 사용하지 못하면 반고와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었다.

‘만약 리브라를 쥔다면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었다.

시간을 역행하는 능력만으로도 린의 자신감은 깔끔하게 부서졌다.

그건 사기다. 멋대로 시간을 감아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니.

그래서야 어떤 기술을 익히든 전혀 소용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쪽으로 와라, 린 테일러. 정의의 여신이라면 사사로운 인간의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가 말하는 말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약간의 악의라도 담겨있다면 부정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고, 세계를 지키는 선의였다.

그는 정말로 세상을 위하고 있는 것이다.

‘여신님, 저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계속해서 아스트라이아를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듣고 있을 텐데 어째서.

“어리석은 정의만큼이나 무서운 건 없지. 너는 아직 어리며 모르는 것이 많다. 우리가 가르쳐주마. 무엇이 올바르며 세계를 위하는 건지 알아야만 한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린은 그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스트라이아가 내어준 정의의 여신에 걸맞은 이가 되려면 저 손을 잡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린은 차마 저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반고의 말과 생각을 부정했다.

“싫어요! 저는 결코 당신들을 따라가지 않아요!”

“그 이유는 무어냐.”

대답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거절했을 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반고는 그런 린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거뒀다.

“역시 인간이라 그런가. 감정적인 존재에게 정의의 여신이라는 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얼어붙은 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반고는 또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저 소녀는 대단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인간의 감성을 버리지 못했다. 정의의 여신이면서도 세계의 섭리에 따르길 거부하고 있었다.

그건 올바르지 않다.

정의의 여신이라는 직함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새로운 정의의 여신이 필요하겠군.”

“……!!”

고요하게 서 있던 반고의 신형이 사라졌다.

린은 반사적으로 우측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할 뿐이다.”

뜻이 맞지 않는다면 죽일 수밖에 없지.

린의 발차기를 잡아챈 반고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황해선 안 돼!’

반고의 손에 잡힌 발을 빼며 린은 인벤토리에서 예비용 검을 꺼내 왼손에 쥐었다.

리브라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한결 나았겠지만, 리브라는 여전히 천칭의 모습으로 린의 오른손에 쥐어져있었다.

복부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린은 이를 악물고 반고를 향해 덤벼들었다.

카앙!

가슴팍을 노리고 검을 찔렀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도리어 검이 부러지며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복부와 허리를 향해 반고의 공격이 가해졌고, 린은 이번에는 그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다시.’

분명 방금 전에도 시간이 역행했다.

린의 검은 분명 반고의 가슴팍에 닿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부러진 후였다.

‘다시. 다시하면 돼.’

아스트라이아와 하나가 된 이후, 린은 단 한 번도 무력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카앙!

또 검이 부러졌다.

어떤 공격을 해도 반고의 몸에는 작은 생체기도 입힐 수 없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안 되는 거지?

콰앙!!

“꺄악!!”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반고의 발에 밟혀 있었다.

린의 작은 머리를 짓밟고 꾹 눌렀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머리를 짓밟고 있는 발을 밀어낼 수 없었다.

“정의의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주제에 ‘정의의 여신’으로서 싸우려는 건가?”

애초에 살아온 시간부터 다르다.

종족도 거인과 단순한 인간.

본래라면 싸우는 것조차 성립되지 않는 상대다.

“역시 너는 정의의 여신을 자처해서는 안 된다. 너는 신이 아니다. 인간이다. 인간 따위가 ‘정의’를 자처하는가!”

콰앙! 쾅!!

반고의 발이 린의 뒤통수를 강하게 짓밟았다.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리며 몇 번이고 내리쳤다.

신격과 마력으로 이루어진 린의 방벽이 천천히 부서졌다.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계속해서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에 정신이 점차 아득해졌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렇기에 저는 지금까지 제가 간직해 온 것을 그대들에게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아니다. 말을 건 게 아니다.

어두워진 머릿속이 밝아지며 과거의 기억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래, 이건 주마등이다.

「제가 지금까지 지켜온, 인류의 정의를.」

지상에 강림했던 아스트라이아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건 그때다.

알데바란과 싸우던 날.

린과 아스트라이아가 하나가 되었던 그날이다.

떨고 있는 린의 앞에, 아스트라이는 조용히 다가와 미소 지었다.

손을 뻗으며 이렇게 말했다.

「린 테일러. 이제부터, 당신이 인류의 정의입니다.」

인류의 정의.

어째서 아스트라이아는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

──정의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문득, 반고의 말이 떠올랐다.

정의에는 기준이 필요하며 정의의 여신이란 세상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고.

‘그렇, 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아스트라이아는 린에게 이미 정의의 기준을 말해줬다.

그건 세상이나 우주를 위한 정의가 아니다.

인류다.

아스트라이아가 린에게 주었던 건 인류를 위한 정의였다.

세상의 섭리? 우주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을 위해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좋았다.

그 단순한 걸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다.

쿠우웅!!

“음?”

린의 머리를 짓밟던 반고는 발에서 느껴진 이질적인 감촉에 눈을 찌푸렸다.

분명 힘없이 밟히고 있던 린의 머리가 조금이지만 들렸다.

“이제 와서 저항하는 건가? 만신창이인 몸으로 무얼 할 수 있다고.”

린의 몸을 보호하는 방벽은 이미 거의 사라졌다.

이제 두어 번이면 더 이상 방벽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

‘뭐지? 이 힘은?’

머리를 짓밟은 반고의 발이 천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힘을 더욱 강하게 넣어도 미동도하지 않았다.

거기다 린의 머리 위에서 다시 둥근 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정의의 여신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저건 열쇠를 보유한 관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왕관의 형상이다.

지금까지는 고작 둥근 띠에서 그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콱, 반고의 발목을 잡은 린은 그것을 옆으로 밀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금색의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린의 머리 위에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둥근 띠가 변모하기 시작했다.

여태 린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정의의 여신이기에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의의 여신이라면 응당 당신을 따랐어야 하는 게 옳았겠죠.”

세상을 위해서라면 시스템을 유지하고 퍼블리셔를 따르는 게 올바를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린은 인간이었으니까.

“저는 착각하고 있었어요. 정의의 여신이 되었기에 제가 생각하던 걸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좀 더 큰 의미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막아서는 반고의 몸이 비틀거리며 밀려난다.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오른손에 쥐고 있던 리브라를 재차 겨눈다.

끼긱.

그러자 이전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던 천칭이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끼기기긱!!

심판의 천칭이 완벽히 기울어졌다.

──악으로.

웅웅웅.

둥근 띠에 금색의 빛이 모여들며 진동했다.

조금씩 모여든 빛무리들은 둥근 띠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둥근 띠가 아닌, 왕관의 형태로.

알데바란과 싸우던 미래의 린의 머리 위에 있던 그것이 지금 린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지키는 건 세상의 섭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류의 존속.

“저는 정의의 여신이 아니에요.”

언제나 세한은 말했다.

자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정의입니다.”

신들의 기준 따위는 상관없다.

애초에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 따위는 없었다.

린 테일러는 인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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