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19. 자각(自覺)(2)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패왕과 광왕에게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오직 린만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나는 신격과 마력을 모은 후, 지면에 손을 댔다.
신격과 마력을 최저한을 제한하며 은밀하게 황성방향으로 신격을 퍼트렸다.
“아.”
작은 신음소리들이 들렸다.
물감처럼 퍼져나가는 내 신격에 닿은 경비병들은 마취총에 맞은 동물처럼 몸을 부르르 떤 뒤, 공허한 눈이 되었다.
이드라의 전승스킬로 그들의 의식을 붙잡은 거다.
아마 놈들은 서 있는 상태 그대로 환상을 보고 있을 테지.
여기서 마력을 더 사용하면 환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숫자가 숫자인지라 낭비에 불과했다.
내 목적은 이들을 서 있는 그대로 잠재우는 거니까.
마치 몽유병처럼.
“…….”
경비병들이 석상처럼 굳어버리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겉모습만 보면 마치 살아 있는 좀비다.
“다 된 거 같으니 들어가죠.”
천천히 손을 떼며 돌아보자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패왕 지너프가 있었다.
“듣기는 했지만 힘을 다루는 정밀도가 말이 안 나올 정도네. 대체 지구는 어떤 곳이기에 이런 놈들이 둘이나 있어?”
“동감이다.”
광왕 알데온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좀 부끄러운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2년만에 신격을 제 수족처럼 다루는 내가 이상한 거겠지.
솔직히 나도 신기하긴 마찬가지다.
1회차의 경험에 득을 보는 점이 있긴 하겠지만 나는 1회차에 신격을 얻지 못했다.
신격이 강함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한계가 낮기에 아마 나는 페트로이아로 치면 칠 영웅의 수준에서 한 단계 낮은 정도였으리라.
그런 내가 이렇게 신격을 능숙하게 다르며 상급 신격을 지닌 준초월자들을 놀라게 하다니.
조금 감개무량하군.
“아마 놈들도 눈치챘을 테니 서둘러 들어가도록 하지.”
아무리 은밀하게 힘을 사용했다지만 반고가 모를 리가 없다.
놈이 허튼 수작을 부리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녀석에게 접근해 결판을 낼 필요가 있었다.
“반고의 위치는 어딘지 알겠나?”
황성 안을 달리며 지너프가 입을 열었다.
“아마 황성의 꼭대기인 것 같다.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신격이 느껴졌어.”
“꼭대기라면 왕좌가 있는 곳이로군.”
얼굴을 찌푸리며 답하는 알데온의 말에 지너프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반고는 왕좌가 있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나는 지너프와 알데온의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가일의 가족은?”
“지금 바로 찾아보겠다.”
전부터 느꼈지만 사자왕을 비롯해 가일과, 이 두 명은 상당히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걱정스런 얼굴로 가일의 가족부터 찾는 걸 보면 분명하다.
‘반고가 가일의 가족을 인질로 무슨 짓을 벌일 수도 있으니 서둘러 찾을 필요가 있긴 해.’
그럼 나는 몰라도 나머지 일행들은 크게 흔들릴 수도 있었다.
“후우.”
알데온이 크게 숨을 내쉬자, 그의 주변에 밝은 빛덩이가 생겼다.
마치 반딧불처럼 알데온의 주위를 날아다니던 그것은 빠른 속도로 퍼졌다.
아마 내 까마귀의 눈처럼 주변에 시야를 퍼트리는 능력인 것 같았다.
다만 본질이 빛이라 그런지 까마귀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편리한 능력인데?”
“위습이다. 정령이지. 시야를 공유해줘서 편리하지만 가까이 가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다.”
먼 곳에서도 관찰할 수는 없는 건가.
까마귀의 눈과 비교하면 일장일단이 있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던 알데온의 눈이 떠진 건 1분 후였다.
“찾았다.”
“벌써?”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무덤덤한 얼굴에 불쾌함이 스쳐지나갔다.
“두 배신자가 가일의 가족과 함께 있는 것 같군.”
“그럼 반고와는 멀리 떨어져있다는 건가?”
“그런 것 같다.”
반고와 함께 싸우지 않는다면 다른 두 영웅은 린의 먹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반고를 도와 협공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다.
‘이럼 계획이 달라지는데…….’
나는 린과 패왕, 광왕이 싸우는 동안 셋을 서포트할 생각이었다.
더불어 보험과 함께 반고를 최대한 압박하려했지만 이러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애초에 반고는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는 건가?
얌전히 가일의 가족을 내어줄 생각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굳이 가일의 가족을 외면한 채, 반고에게 덤빈다면 놈도 싸울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건 우리에게도 위험부담이 컸다.
이곳에서 놈을 끝내느냐, 아니면 가일의 가족만 구출하느냐.
어느 쪽도 중요한 일이었다.
쿠구구궁.
“……방금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나도 들었어.”
“저도 들었어요.”
무언가가 크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우리와 달리 알데온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위습들의 위치가 갈렸다.”
“위치가 갈렸다고?”
“황성의 구조자체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상하군, 가일의 성에는 이런 기능 따위는 없었을…….”
쿠구구궁!!
알데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가 딛고 있던 땅이 크게 흔들렸다.
특별한 신격도 마력도 느껴지지 못한 탓에 나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대체?!’
마력이나 신격을 이용하지 않고 대규모로 지형을 변경하다니,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에 가깝지만, 마법과는 좀 다르다.
드드드드!
갑작스런 사태에 대응하려는 순간, 땅이 크게 흔들리며 움직였다.
“아, 아저씨!”
당황한 린이 균형을 잡기 위해 내게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땅이 엄청난 속도로 치솟았다. 그것이 얼마나 빠른지 눈을 한번 깜박한 사이에 린은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젠장!”
치솟은 땅과 함께 사라진 린을 쫓아가기 위해 날개를 펼쳤지만, 황성이 복도도 흔들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내 바로 옆에 있던 벽이 움직이며 내 몸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앙!!
“큭!!”
충격은 크게 없었지만 균형을 잃은 게 문제였다.
시야가 빙글 회전하더니, 어린아이가 마구잡이로 큐브를 비트는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주변의 구조가 변하기 시작했다.
‘랜덤하게 건물의 구조가 변하는 건가! 반고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고 들은 적은 없는데?!’
놈은 접근전을 위주로 싸우는 전사와 같은 자다.
이렇게 대규모로 사물을 조작할 정도의 능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녀석이 가진 힘은 전부 개인의 강함에 직결된 것이었으니까.
쿠궁!
위로 치솟은 린의 기척은 순식간에 대각선으로 꺾였다.
내 곁에 있던 알데온과 지너프의 기척은 그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둘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나는 우선 린을 찾는다.’
나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땅에서 균형을 잡은 후, 검은 날개를 펼쳤다.
벽은 계속 움직이지만 강도가 강해진 건 아니다.
일직선으로 뚫고 간다면 린을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콰쾅!!
바닥을 박차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린이 이동하고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눈앞의 벽이 있으면 주먹으로 부쉈고, 뒤바뀌는 지형에 휩쓸리지 않도록 전신을 강한 마력으로 둘렀다. 일종의 호신강기다.
‘우측에서 아래로 내려갔어. 아니, 다시 대각선인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린의 신격에 방향을 종잡기 힘들었다.
‘반고는 어디지?’
거기다 본래 황성의 정상에 있었을 반고의 신격이 사라졌다.
이 또한 무슨 스킬을 사용한 건지도 모른다.
황성의 지형을 바꿔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건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날아가는 내 옆에 작은 허수공간이 열렸다.
허수공간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빠져나오며 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바로 프라가라흐다.
내가 린을 쫓는 사이 프라가라흐를 이용해 반고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반고가 일으켰다면 프라가라흐로 기습을 가해 멈출 생각이었다.
카아앙!!
“……윽?!”
하지만 프라가라흐는 얼마 날아가지도 못한 채 튕겨졌다.
거기다 튕겨진 방향이 하필 내가 린을 쫓아가던 방향이었다.
콱!!
나는 날아오던 프라가라흐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상당한 상처를 입었을지도 몰랐다.
“대체 누가…….”
벽을 뚫지 못하고 튕긴 건 아니었다.
분명 프라가라흐는 내가 지시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두 개의 방을 꿰뚫는 순간, 무언가에 막혔고 튕겨서 나를 향해 돌아왔다.
쿠우웅!!
빙그르르 회전한 지형이 뿌연 연기를 뿜으며 멈췄다.
현재 내가 있는 장소는 꽤나 넓은 홀이었다. 연회에 사용하던 장소인지 고풍스런 장식들이 있었지만, 지형변화로 인해 잡동사니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멈춘……건가?”
린의 신격은 좌측 끝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멈춰 있을 때가 아니야.’
지형 변화가 멈췄다면 한시라도 빨리 린을 쫓아야했다.
그런 생각으로 발을 떼려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나, 까마귀.”
낯설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음성이었다.
쉬이익!!
“큭?!”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그것을 손에 쥔 프라가라흐로 쳐내자, 화살이라는 걸 깨달았다.
‘궁왕인가!’
반고의 편에 붙은 두 영웅 중에는 활을 특기로 사용하는 궁왕이 있었다.
그의 활은 결코 표적을 놓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들은 것보다 훨씬 강한 위력인데.’
화살을 튕겨낸 손이 저릿했다.
나는 날개를 접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화살이 날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프라가라흐를 튕겨낸 것도, 그리고 방금 화살을 날린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내가 두 영웅이 있는 장소에 도착한 거라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에 한 명이 더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검은 머리칼, 그리고 갈색빛이 도는 짙은 피부색.
이마에 박혀 있는 보석은 그가 거인족이라는 걸 알려준다.
분명 나는 그를 처음 봤다.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미르.”
신음처럼 내뱉는 내 말이 정답이라는 것처럼 녀석은 싱긋 웃었다.
***
“콜록, 콜록.”
지형이 멈추자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당황한 탓에 제대로 호흡하지 못한 린은 작게 기침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저씨는 안 보여.’
아무래도 방금 지형이 빠르게 움직이며 떨어진 모양이다.
혼자가 되었다는 불안감에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괜, 괜찮아. 나도 이제 강하니까.’
적의 진형에 홀로 남은 건 처음이다.
린이 싸울 때는 언제나 그녀를 지켜보는 아군이 있었으니까.
‘아저씨가 있는 방향으로 합류해야 해.’
린은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뿌연 연기가 반으로 갈라졌고, 빠른 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여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엉망으로 부서진 화려한 왕좌였다.
부서진 왕좌의 주변에는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물들이 널려있었다.
지금 린이 있는 장소가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왕좌? 잠깐, 왕좌라면.’
린은 아까 지너프와 알데온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마 황성의 꼭대기인 것 같다.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신격이 느껴졌어.」
「꼭대기라면 왕좌가 있는 곳이로군.」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다.
왕좌가 있는 장소에 반고가 있다고.
그리고 지금 린의 앞에는 부서진 왕좌가 있었다.
그렇다면…….
“얌전히 두 놈들에게 맡기고 지켜보려 했건만…… 일을 주시는군.”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계음처럼 높낮이가 없는 무미건조한 음성이다.
린은 황급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팔짱을 낀 잿빛 머리칼의 청년이 있었다.
이마에 박힌 보석은 거인족을 상징했고, 두 눈동자는 짙은 갈색으로 물들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예요?”
누군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지만, 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디 자신의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며.
“나는 반고다. 설마 이렇게 찾아와 놓고 모른 척할 생각인가?”
린의 희망은 부질없이 짓밟혔다.
반고. 태초의 거인 이미르와 자웅을 겨뤘던 자.
지금은 퍼블리셔의 부사장 자리에 있다고 신들이 말해줬다.
수억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으며 수많은 기술과 권능을 지녔다고 말해지는 절대강자.
그가 지금 린의 앞에 고고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