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215. 영웅포식(1)
“그런 게 가능하다고?”
사자왕은 내가 꺼낸 물건을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하기야 이걸 만들 수 있는 건 지구에서 민아뿐이다.
내가 알기로 페트로이아는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물품이 워낙 많아, 연금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네, 네. 정말이에요.”
상당히 위압감이 있는 사자왕 딜런 때문인지 린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의 감투를 쓴 린의 말은 불필요한 설명을 생략하게 만들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딜런은 미심쩍은 눈이었지만 가일의 생존여부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퀘스트를 발생시킨 것도 그대들이겠군.”
그 퀘스트란 검성 가일의 가족을 지키는 퀘스트를 말하는 것이리라.
“맞아. 가일이 죽었으니 가치가 사라진 그의 가족들을 반고가 살려둘 리가 없잖아?”
딜런은 그런 내말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는 묵묵히 나를 응시하며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게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단아가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보게 되니 신기한 기분이야.”
“운이 좋았지.”
“퍼블리셔로부터 자신의 별을 되찾는 건 단순히 운으로 되는 일이 아니야. 그 어떤 이들도 할 수 없는 업적이다. 그리고 또 하나 소문을 들었는데…….”
“소문?”
“외신을 자신의 아바타로 삼았다는 게 정말인가? 그리고 그 신이 현재 지구를 관리하고 있는 신이라는 것도?”
감추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페트로이아까지 퍼져 있을 줄은 몰랐다.
“전부 사실이야.”
“놀랍군, 놀라워. 자네도 그렇고, 자네의 곁에 있는 여자아이도 그렇고 지구라는 곳은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하군.”
딜런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그 눈 속에는 묘한 호승심도 담겨있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자네가 이곳에 온 건 반고를 죽이기 위해 왔다는 거겠지?”
“맞아.”
“이 일을 꾸민 게 반고라는 건 어떻게 안 건가?”
“이미르는 거인왕이라는 위치에 있으니 쉽게 움직이지 않을 테니, 이제 나를 견제할 수 있는 건 반고뿐일 테니까.”
“반고뿐이라…….”
그는 내 말에서 어폐를 느꼈는지 말을 늘어트렸다.
어찌 들으면 오만할 수도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가타부터 변명을 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 설명을 하는 건 한마디로 충분했다.
“나는 외신을 죽였다.”
“뭐?”
“외신, 기어오는 혼돈을 죽였으니 퍼블리셔측에서도 나설 수 있는 강자는 반고 정도밖에 없잖아?”
“그게 무슨…….”
여태 무뚝뚝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던 딜런의 눈에 처음으로 경악이 서렸다.
우리를 처음 보았을 때도 약간의 경계심만 보이던 그가 딱딱하게 굳어 석상이 되어버렸다.
‘외신을 죽인 거니 이정도면 당연한 반응이지.’
오히려 딜런 정도면 굉장히 감정을 감추는 게 능숙한 거다.
“이해, 이해할 수 없군. 불멸의 존재를 어떻게 죽였다는 말인가?”
“잘.”
“하, 하하. 이 말이 정말인가? 어린 여신이여.”
“네, 맞아요. 저, 정말이에요.”
린에게서 확답이 나오자 딜런은 허탈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야 퍼블리셔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네를 죽이려한 건지 알겠군. 외신을 죽였다는 건 거인왕도 같은 방법으로 죽일 수 있다는 거니.”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닫고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정말 놀라움에 연속이야. 외신을 죽일 정도의 힘을 지녔다면 이대로 곧장 제국의 중심으로 가서 반고를 쓰러트리면 되지 않나?”
“반고와 협력한 영웅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러겠어?”
피식 웃으며 말하는 나와 달리 딜런은 얼굴이 굳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요즘 영웅들의 도시 사이에서 분쟁이 많다며? 반고의 편에 붙은 녀석들은 다른 영웅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잖아. 거기다 가일이 사는 황궁에 숨어들려면 아무리 반고라도 협력자가 없는 이상 불가능해.”
“맞는 말이다.”
딜런은 푹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가일의 위치를 탐내던 놈들이 있어. 무려 넷이나. 실력도 나와 비등한 터라 섣불리 덤빌 수도 없다. 뭐 외신을 죽인 자네라면 그런 놈들 정도는 가볍게 이기겠다만…….”
“아니. 나는 인간을 상대로는 오히려 약해. 내 스킬은 신을 죽이는데 특화되어 있어. 그래서 이 아이를 여기에 데려온 거야.”
“정의의 여신을? 왜?”
“이 아이에게 부족한 걸 마지막으로 채워주기 위해서.”
퀘스트의 기간은 2주.
나는 그동안 페트로이아에서 뽕을 뽑고 갈 생각이다.
반고는 내가 바로 찾아오지 않는 게 의심스러울 테지만, 속이나 태우고 있으라지.
“언제 이곳에 또 올지 모르잖아? 기왕 온 거,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고 갈 거다.”
“이곳이라고 특별한 건 없다만.”
“여기엔 강자가 많잖아.”
나는 옆에 앉아있는 린을 조용히 응시했다.
긴장된 얼굴로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린은 내 시선에 움찔했다.
강한 힘을 얻으며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린은 여전히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이런 좋은 식당에 왔는데 메뉴 하나 시켜보지 않고 나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
현재 린에게 부족한 건 무엇인가.
어떤 것이든 바로바로 익힐 수 있는 린에게 배움의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격을 다루는 것도 이미 상당히 능숙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경험은 다르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모른다.
물론 그 경험조차 다른 평범한 이들보다는 빠르게 익히겠지만, 지금은 거의 백지에 가까운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페트로이아는 린에게 다양한 경험을 겪게 해줄 적절한 장소였다.
「아마 반고와 협력한 네 명은 자네들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조심하도록.」
헤어지기 전 딜런은 그런 말을 하며 보라색 구슬이 달려있는 목걸이를 줬다.
그가 말하길 네 명의 영웅들을 비롯해, 일정 이상의 신격을 가진 자가 근처에 있으면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거기에 페트로이아의 지도를 준 덕에 우리는 헤매지 않고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고로 이제부터 습격해올 적들은 린이 모두 상대하는 걸로.”
“저, 저 혼자요?!”
“이런 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하자.”
하늘에 날아다니는 까마귀의 눈을 통해 계속 주변을 살폈다.
현재 우리가 이동하는 장소는 인적이 드믄 숲이니 언제 습격자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여,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습격해도 저 혼자 싸워요?”
“걔네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거야.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인데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겠냐.”
“그……렇죠?”
“물론 오더라도 너 혼자 싸울 거다. 위험하면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냉정한 내 말에 린은 울상이 되었다.
어린 린에게는 가혹한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고까지 움직였다면 이미르가 직접 나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니.’
그때가 되면 사실상 전면전이다.
1회차에 비하면 수십 년이 앞당겨진 일이니 한시라도 빨리 린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올려야만 했다.
이미 몽상의 던전에서 싸웠던 린을 넘어선 상태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알데바란을 쓰러트렸던 린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차라리 몽상의 신전에 린을 집어넣어서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를 하나 더 가져오는 게 좋았을까? 아니지, 그건 위험해. 지속시간이 끝나면 말짱 꽝이니 역시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편이 낫다.
‘음?’
까마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접근하는 것이 신격의 그물에 걸렸다.
아마 은신을 하고 이동하는 존재가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딱 좋네.’
린은 아직 알아차린 기색이 없었다.
살의마저 숨긴 암살자들.
실력도 하나 같이 보통이 아니었다. 린은 이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숫자는 스물인가?’
놈들은 포위망을 조금씩 좁혀오고 있었지만 쉽사리 덤벼들지 않았다.
아마 우리가 틈을 보이기를 기다리는 거겠지.
하지만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도 지루하기에 나는 린을 향해 말했다.
“나는 잠시 볼일 좀 보고 올 테니 여기서 쉬고 있어.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노숙하고 가자.”
“아, 네!”
“금방 다녀올게.”
한참을 이동한 탓에 린은 피로한 안색으로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퍽 안쓰러웠지만 나는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루크가 알면 나를 죽이려고 하겠군.
‘나를 쫓아오는 건 하나……. 나머지는 모두 린인가. 나보다 린을 먼저 처리할 생각이야.’
딱 예상한 대로다.
나는 비교적 쌩쌩했고, 린은 어디로 봐도 피로해 보였으니까.
사실 린도 육체가 피로하다기 보단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거다. 어린애라 더 지쳐 보일 뿐이지.
아무튼 나는 느긋하게 서서 까마귀의 눈을 통해 상황을 관찰했다.
***
세한이 사라지자 린은 인벤토리에서 돗자리를 꺼내 바닥에 앉았다.
간이 텐트도 인벤토리에 들어 있었지만, 그건 설치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세한이 오면 부탁할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정말 나 혼자 싸워야 하는 걸까?’
아까 세한이 말했던 걸 떠올리며 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강해졌다는 자각은 있지만 역시 직접 싸우는 건 아직 두려웠다.
더군다나 가일에게 패배를 겪고 온 시점이라 자신감도 상당히 줄었다.
“우선 아저씨가 오늘은 여기서 쉬자고 했으니…….”
거기까지 말하던 린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지 번쩍이는 빛이 방금 린의 목이 있던 장소를 스쳐지나갔다.
“꺅!”
설마 이렇게 갑자기 습격당할 줄은 몰랐기에 린은 비명을 질렀다.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뒤로 몸을 뺀 린을 향해 열 개가 넘는 검이 사방을 점하며 휘둘러졌다.
앉아 있던 린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나 마찬가지였지만, 린은 그것을 앉은 자세로 모조리 피해내며 몸을 굴러 피했다.
‘피했다고?’
비명을 지른 것치곤 너무 간단히 피해버린 터라 도리어 습격한 암살자들이 당황했다.
‘이 어린애가 신격을 가진 여신이라는 건 들었지만……!’
자신들이 누군가.
칠 영웅 중 하나. 질풍왕 슈레드의 최고정예 부대가 아닌가.
가장 빠르며 은밀한 습격자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플레이어.
이런 어린아이 정도는 순식간에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도 엄연히 중하급 신격을 가진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몸을 튕기듯 일어서는 린을 향해 암살자들은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으로 보아 숨겨뒀던 신격을 전신에 퍼트린 모양이었다.
‘아, 아주 신격 바겐세일이네!’
경비병에 이어 암살자들조차 신격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덤벼들자 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린의 눈에 훤히 보였지만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토록 지독한 살기를 자신에게 향하며 덤벼든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거기다 말이 중하급 신격이지, 중하급이면 웬만한 별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본 커트라인이다.
린은 이곳에 오며 세한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페트로이아에서 신이란 다른 별들과 위치가 달라.」
「왜요?」
「최상급 신이 아닌 이상, 감히 페트로이아의 플레이어들에게 경외를 받을 수 없거든. 좀 강하다 싶으면 중급까지 치고 올라오는 플레이어도 있고. 영웅쯤 되는 애들은 무려 상급의 신격을 지녔어. 그리고 너와 싸웠던 검성은 최상급 신격. 이 정도면 거의 상위 신이지」
권능이 없고, 기본 신체능력이 다른 탓에 진짜 신만큼 강하진 않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약한 건 아니다.
특히 별자리 수준에 그치는 신들은 황도 12궁 정도가 아닌 이상 페트로이아에서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포인트를 왕창 지를 수 있는 최상급 신격을 지닌 신이 아닌 이상, 아바타를 만드는 것도 어려워. 상위 신들은 이곳에서 종교를 만들고 인간들과 친근하게 지내. 마음먹고 투자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아바타로 이곳에서 상위 티어를 먹고 있는 플레이어를 이기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솔직히 린은 그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습격당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이드라는 이곳을 신대의 대지라 불렀다.
과연 그 말이 옳았다.
‘괜찮아. 내게는 아스트라이아 님이 있으니까.’
린의 푸른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한다.
덤벼드는 암살자들의 검은 무서웠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은신술, 보법, 검의 움직임을 간파한다.
‘그들이 강하다고 해도…….’
자신은 올림포스의 신들과 직접 싸우면서 단련했다.
겨우 이정도로 당할 리가 없지 않은가.
린의 금색안이 커지며 그들의 검이 코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들이 몸에 닿기 직전 손에 쥔 검을 뽑았다.
카앙!!
“……!!”
검성 가일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일검.
수십 개의 검이 부딪쳤지만 소리는 단 한 번만 들렸다.
동시에 린의 몸이 하얗게 빛나며 사라졌다.
“이, 이건!”
암살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사자왕 딜런, 그가 가장 애용하는 기술이 아닌가.
피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검이 튕겨진 반탄력으로 몇몇 암살자들의 발이 꼬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백색의 섬광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콰콰쾅!!
“끄아악!!”
원형의 범위로 떨어진 백색의 격류에 세 명의 암살자들이 코끼리에 짓밟힌 인간처럼 납작하게 눌려져 지면에 처박혔다. 죽지는 않았지만 전신의 뼈가 부러져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자왕의 성에 머문 건, 고작 하루라고 들었는데!’
설마 단 하루 만에 사자왕의 비기를 익혔을 줄이야!
암살자들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어린 괴물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 그건 암살자들의 착각에 불과했다.
린은 사자왕의 기술을 배운 게 아니다.
그저, 한번 보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