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214. 고인물들의 세계(3)
느긋하게 지켜보는 세한과 달리 린은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설마 이런 다 똑같이 생긴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왜 경비병에게 덤비면 안 된다고 했는지 알 거 같아.’
적당히 휘두른 건 맞지만 저렇게 가볍게 막을 줄이야.
아무래도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선 보다 강한 힘을 사용해야 할 것만 같았다.
“사자왕의 도시를 지키는 경비병들을 얕보지 마라!”
거친 외침과 함께 경비병들이 린을 향해 덤벼들었다.
방금 린의 공격을 본 이후인지라 그들의 행동은 기민했고 방심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건……!’
덤벼드는 경비병들을 바라보던 린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들의 신력이 하나로 얽히며 크게 증폭되고 있었다.
열다섯 명의 경비병들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며 린의 빈틈을 노려 무기를 휘둘렀다.
카가가강!!
다섯 개의 무기는 그대로 튕겨나갔고, 나머지 열 개의 무기는 허공을 갈랐다.
무기가 튕겨나가며 자세가 무너진 경비병들을 향해 린은 대각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어딜!”
하지만 다른 경비병들이 그것을 받아쳤다.
그들은 서로의 빈틈을 보완하며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거기다 하나로 합쳐진 신격의 양은 상당해서 그들이 본디 보유한 신체능력보다도 훨씬 뛰어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놀라워.’
린은 그런 경비병들을 보며 감탄했다.
세한의 말이 맞았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놀랍도록 강했다.
경비병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7영웅이라 불리는 자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검성 아저씨도 엄청 강했었지.’
그렇게 무력하게 패배한 건 린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경비병들과 싸우며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힘으로 찍어 누른다면…….’
하지만 그래선 의미가 없었다.
세한이 먼저 나서서 싸우라고 한 건 단순히 쓰러트리는 것만을 바라서가 아니다.
‘어떻게 하더라…….’
몇 번이고 병사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피하며 린은 생각했다.
검성 가일이 했던 행동. 그리고 세한이 보여줬던 것들.
신격을 퍼트리고,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다.
“이렇게.”
카앙!
“……!!”
린의 금색 눈동자가 번쩍인 순간, 경비병들의 무기가 일제히 튕겨나갔다.
검성 가일이 보여줬던 자신만의 영역을 통제하는 힘.
린은 방금 그것을 완벽히 깨달았다.
‘역시.’
가일처럼 검집에 검을 넣은 채 할 수는 없었다.
린의 신체능력은 아직 그보다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사용했던 걸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카앙! 카앙! 카앙!
마치 하나의 연극 같았다.
한 몸이 되어 움직이며 무기를 휘두르는 경비병들의 공격은 강맹했다.
종류도 전부 달랐다.
누구는 검, 누구는 창. 누구는 도끼.
그만큼 공격은 변칙적이었지만 그 무기들은 린의 머리카락 하나도 스치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움직이던 린은 어느 순간부터 제자리에 똑바로 선 채,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이제야.”
카앙!
“완벽히 익혔네요.”
카앙!!
이쯤 되자 경비병들에게 처음의 여유 따위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처음에 분노라는 감정을 담고 있던 금색의 눈동자에는 점차 즐거움이 나타나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하고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경비병들이 이 아이의 눈에는 마치 즐거운 놀잇감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괴, 괴물이다.’
그제야 경비병들은 눈앞의 어린소녀가 진짜배기 괴물임을 깨달았다.
이대로 싸워봐야 자신들에게 승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력도 아니야.’
금색으로 변한 눈동자는 은은하게 빛을 흘리고 있다.
경비병들도 엄연히 하급 신격을 가진 강자다.
그 속에 담겨있는 그릇의 크기 정도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세한은 점차 공포가 깃드는 경비병들의 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역시 빠르네.’
실제로 보여준 건 한번 뿐인데 완성시켜 버렸다.
자신의 영역을 완전히 통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회차의 세한도 이것을 혈마에게 배우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하지만 린의 재능 앞에서는 다른 기술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플레이어를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만…….”
린과 경비병들의 싸움을 보던 모험가 사내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두려워하던 경비병들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린의 모습은 공포에 가까웠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됐는데.”
세한은 린과 경비병들을 바라보며 성벽 위를 응시했다.
입구에서 이정도로 난리를 폈으니 사자왕 쯤 되는 인물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린이 신격을 억제하고 있다고 한들 본질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슬슬 끝을 낼게요.”
“큭!!”
아무리 페트로이아의 경비병들이 ‘신의 병사’라고 부를 정도로 강하다고 해도, 진짜 ‘신’에 비하면 부족하다.
신격을 완전히 해방한다면 경비병 정도로는 린의 일검도 막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신이 지상에 강림했는데 시스템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인가!”
“그건 아직 제가 플레이어이기 때문이죠.”
린의 가장 큰 장점.
아스트라이아와 한 몸이 되어 ‘정의의 여신’의 자리와 황도 12궁 중 처녀궁의 좌를 계승했음에도 플레이어라는 점이다.
시스템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신격과 신의 권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세계의 버그.
콰콰콰쾅!!
바로 그때, 하늘에서 하얀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린은 경비병들에게 달려드는 것을 멈추고 크게 뒤로 뛰며 그것을 피했다.
“이제야 오셨군.”
빛의 기둥이 떨어진 장소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장신의 남자를 보며 세한은 팔짱을 꼈다.
‘저것이 사자왕인가.’
거대한 대검과 묵빛의 갑옷을 입은 야수와도 같은 사내.
저것이 이 도시를 통치하는 영웅, 사자왕이다.
‘검성보다는 약하다지만 확실히 괴물은 괴물인걸.’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세한은 내심 당황했다.
사자왕의 몸에서 흐르는 신격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 ‘초월자’라고 부를 수 있는 플레이어는 검성 가일 하나다.
그렇지만 사자왕이 약한 건 아니었다.
1회차에서 보았던 혈마와 비교를 하더라도 크게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준초월자급.
‘이래서 커뮤니티에서 고인물들을 이길 수 없다고 한 거구만.’
이런 게 무려 일곱 명.
세한이라도 저 정도의 인물이 두 명이면 간신히 동수를 이루고 세 명이 되면 패할 것이다.
‘나는 인간보다 신을 사냥하는데 특화되어 있으니.’
초월의 증명도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으며, 1회차 이드라가 준 파일 벙커도 불멸자를 상대하기 위한 병기지 인간에게는 쓸모가 없다.
아니, 애초에 파일벙커 자체가 인간에게 사용하기엔 부적절한 무기다.
‘7영웅 중 최대한 아군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초조함을 숨기며 세한은 린과 대치한 사자왕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그는 당황한 얼굴로 린을 응시했다.
“강렬한 힘이 느껴지기에 바로 왔건만, 설마 이런 어린아이가 이토록 강한 신격을 지녔을 줄이야.”
“…….”
경비병들과 싸울 때와 달리 린은 긴장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누구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위장한 신인가?”
“아니, 그 아이는 보이는 것처럼 아이가 맞다.”
사자왕의 질문에 세한은 재빨리 답했다.
린에게 향했던 그의 시선이 세한에게로 움직였다.
“……거기에 일행이 있었나. 조금 위험한 건지도 모르겠군.”
낯빛을 굳힌 사자왕의 모습에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도 마른 침을 삼켰다.
“잠깐, 우리는 당신과 싸우러온 게 아니야.”
“이 난리를 치고 그런 말이 나오는 건가?”
“그건 저 아이가 불의를 참지 못하기 때문이지. 난민들이 그대로 쫓겨나는 걸 지켜볼 수 없었거든.”
“난민들 중에 간자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 너도 플레이어라면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 텐데?”
“그건 당신 말이 맞아. 하지만 저 아이는 그런 것까지 완벽하게 꿰뚫어볼 수 있어.”
사자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믿을 수밖에 없을 걸? 당신도 알 거라 생각하는데. 황도 12궁의 제 6궁. 처녀궁의 주인이 최근 바뀌었다는 것을.”
“……정의의 여신.”
“그래, 맞아. 당신 앞에 있는 아이가 그 신참이지.”
세한의 말에 굳어있던 사자왕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리곤 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확실히 익숙한 신격이로군. 자세히 보니 아스트라이아의 것이 확실해.”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린은 세한과 사자왕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좋다. 그것이라면 들은 바가 있긴 하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성에 들어와도 좋다.”
사자왕은 등에 거대한 대검을 매었다.
우리를 의심하던 시선도 옅어졌다. 그야 다른 신도 아닌 ‘아스트라이아’니까.
정의의 여신이라는 존재는 선함의 보증수표.
준초월자의 영역에 있는 사자왕 딜런이라면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이야기가 쉽게 풀리는 것도 당연했다.
린은 그대로 등을 돌리려는 사자왕에게 황급히 말을 걸었다.
“잠, 잠깐만요! 그럼 여기 있는 난민들은…….”
“난민? 그렇군, 정말로 그것 때문에 나섰다는 건가.”
“네, 네. 그러니 제대로 답해주셨으면 해요.”
“정의의 여신의 능력을 지녔다면 확실할 테지. 그대가 확인한 이들 중 수상하거나 악인이 아닌 자는 경비병에게 말해 들여보내도 좋다.”
“……감사해요!”
무뚝뚝한 얼굴로 흔쾌히 승낙하는 사자왕에게 린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설마 이렇게 간단히 허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린은 아마 모를 테지. 아스트라이아도 그런 걸로 자랑을 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는 여러모로 유명한 신이다.
신답지 않게 필멸자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신이기에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긍정적으로 대해줄 수밖에 없었다.
“검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볼일이 전부 해결된다면 내 저택으로 오도록. 경비병에게 말하면 안내해줄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모습은 백색의 광체로 화하며 사라졌다.
묵빛의 갑옷과 무거운 대검을 들고 있는 것과 달리 그의 움직임은 가히 빛과 같았다.
“어때, 이길 수 있겠냐?”
세한은 그가 사라진 장소를 보며 린에게 물었다.
린 역시 방금 보았던 사자왕의 모습을 되새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기회가 되면 한번 싸워보고 싶어요.”
내성적인 린이 이렇게 싸우고 싶다고 말할 정도라면 그만큼 사자왕의 기술이 탐난다는 거다.
린은 한번 손을 섞는 것만으로 상대의 기술을 가져올 수 있으니 싸움이란 린에게 있어 ‘식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자왕이란 린의 앞에 차려진 만찬이었다.
린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검성과 달리, 사자왕은 린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정말 괴물이야.’
실소가 나올 만큼.
하지만 세한은 부럽지 않았다.
강함이란 반드시 재능과 직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그대들은 아마 ‘지구’ 출신의 플레이어들이겠군.”
경비병이 안내에 따라 찾아온 사자왕 딜런의 저택은 도시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우리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식당에 음식을 차리고 앉아있었다.
“가일이 내게 말하고 향했던 장소가 지구였으니까. 거기에 정의의 여신과 함께 있다면 그대가 바로 그 유명한 ‘까마귀’인가?”
“그래.”
“지구의 플레이어가 이곳에 있다는 건 가일이 실패했다는 거군. 설마 그런 신생 별에서 검성이 죽을 줄이야.”
딜런은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커뮤니티의 정보에 따르면 사자왕 딜런은 검성과 막역한 사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조용히 입을 닫고 있던 딜런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입을 열었다.
“검성의 목표는 최근 정의의 여신이 된 존재와 까마귀 자리를 죽이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럼 조금 이상해.”
“이상하다니?”
“그대 둘은 모두 살아남았고, 퀘스트도 그대로 끝났을 터다. 그런데 왜 페트로이아로 온 건가?”
맞는 말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페트로이아에 올 일은 없었다.
“거기다 최근 우리에게도 콜라보 퀘스트가 발현했지. 검성 가일의 가족을 지키는 것. 혹시나 싶다만 그것도 너희들과 관련이 있나?”
“관련이 있고말고. 애초에 검성 가일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어.”
“뭐? 하.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기억하기로 지구에게 주어진 콜라보 퀘스트는 검성을 죽이는 내용이 될 거라고 가일이 말했다. 즉, 퀘스트가 클리어하기 위해선 가일이 죽어야 해.”
보통이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죽일 시 클리어’를 누구도 죽이지 않고 클리어하는 게 가능했다.
“가일은 죽지 않고 가사상태에 빠져있다. 바로 이 독으로.”
나는 인벤토리에서 작은 약병과 단검을 꺼냈다.
약병에는 독이, 그리고 단검에는 그 독이 소량 묻어있었다.
“이 독에 중독되면 가상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것도 시스템이 ‘죽었다’라고 판단하는 상태가 되지. 우리는 이걸로 가일을 혼수상태로 만든 이후 이곳에 온 거다.”
몽상의 던전에서 사용했던 독.
그것을 이제는 민아가 능숙하게 제조를 할 수 있었다.
이미 몇 번 사용했던 물건이지만 내가 가진 최고의 히든카드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