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213. 고인물들의 세계(2)
“어우, 말은 들었지만 요즘 분위기가 정말 살벌하네.”
우리 앞에 서 있던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이야기를 나눴다.
전형적인 판타지 모험가 복장을 한 그들은 다섯 명으로 구성된 플레이어들이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인데…….”
“하지만 요즘 바룬다르크 쪽 소문을 들어보면 이상한 건 아니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던 린은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룬다르크라면 검성이 다스리는 나라 맞죠?”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린도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그래, 맞아. 아가씨 혹시 플레이어야?”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플레이어 중 하나가 린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며 말했다.
일행 중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작은 소리에도 반응한 걸 보면 상당히 귀가 좋은 것 같았다.
“아, 네에.”
“복장을 보면 여행자 같은데…… 요즘 플레이어로 소속 없이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않니?”
“네?”
린은 여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페트로이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니 당연한 일이다.
“보호자가 곁에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아, 당신이 이 아이의 보호자인가요? 흐음, 확실히 실력은 있어 보이네요.”
여성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 린은 겉으로만 보자면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신격도 최대한 갈무리한 터라 겉으로만 보자면 평범한 플레이어처럼 보이리라.
“지금 상당히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이 도시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일은요. 아무래도 바룬다르크가 움직이니 7영웅이 다스리는 도시들이 영향을 받는 거죠. 하지만 의외이긴 하네요. 딜런 님은 가일 님과 절친한 친우로 알려져 있는데 말이죠.”
7영웅? 나는 여성이 말에 머릿속을 뒤졌다.
이곳에 오기 전 예습한 페트로이아에 대한 정보들 중 7영웅에 대한 정보는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딜런이라면 그 사자왕? 여기가 딜런 님이 다스리는 도시입니까?”
“설마 모르고 온 거예요?”
“예, 우연히 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쪽의 길을 잘 모르는 터라.”
“하긴 외모부터 먼 타국에서 온 것 같네요.”
기본적으로 이 근방은 서양인들의 외모를 하고 있으니 동양인인 내가 눈에 띄는 건 당연했다.
“뭘 둘이 그리 속닥속닥 이야기하고 있어?”
우리의 대화가 신경 쓰였는지 여성의 일행들로 보이는 모험가들이 다가왔다.
제법 낯을 가리는 린은 모험가들의 모습에 조금 긴장한 눈치였지만 이전처럼 겁을 먹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린을 보고 피식 웃은 후, 방금 전 말을 걸었던 덩치 큰 사내에게 말했다.
“먼 곳에서 온 여행자라 최근 근방의 소식을 몰라서 말입니다. 도시에 들어가기 전에 알아두려고 했죠.”
“흠, 그렇다면 우선 도시에 들어가고 나서 걱정할 일이지. 들어갈 수도 없을 지도 모르거든.”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대충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만큼 이방인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다는 뜻이다.
‘분명 반고와 관련된 일이겠어.’
갑자기 바룬다르크 제국이 움직였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퀘스트도 보내뒀으니 내가 이곳에 오리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테니까.
‘난감하긴 하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드라가 우리를 이쪽으로 전송시켰다는 건 근방에 큰 위협이 없다는 거니까.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자왕 딜런은 바룬다르크 제국과 묘한 마찰 중인 걸로 보였다.
“수상하군! 너희들은 들어갈 수 없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그냥 돌아가면 저희는 모두 망해요!”
“그건 너희 사정이다.”
경비병의 차가운 말에 상인들의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특히 사자왕 측은 바룬다르크에서 오는 모든 걸 끊어버렸다. 플레이어는 물론 상인과 같은 이들도 도시로 들어갈 수 없지. 당신들 같이 타지에서 온 여행자라면 들어갈 수 없을 확률이 높다.”
“과연 그렇군요.”
확실히 검문은 보통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쫓겼다.
“하지만 생각보다 순순히 다들 돌아서네요. 분위기만 봐서는 경비병에게 덤벼들 줄 알았거든요.”
린은 상인들을 바라보며 상당히 의아한 모양이었다.
상인들은 쪽수도 많고 험악한 인상의 용병들도 상당히 거느리고 있었다.
어딜 봐도 잡상인은 아니었다.
“경비병에게 덤벼? 하하하! 아가씨도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만!”
“……네?”
“정말 먼 땅에서 왔나보군, 경비병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다니.”
쯧쯧, 혀를 차는 사내의 모습에 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경비병들의 모습은 어딜 봐도 깡통 같은 갑옷을 입고 있는 터라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빠, 여긴 공권력이 상당히 강한 곳인가 봐요.”
평소 린은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지만 페트로이아에서는 오빠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주변에 보는 눈이 있으니 그런 모양이다.
“보통은 그게 정상이지.”
“정상, 정상이기는 하죠……. 제가 이상해졌나 봐요. 이걸 이상하게 느끼다니.”
지구의 경우 플레이어들이 생겨난 이후 경찰이나 군대와 같은 집단은 무용해졌다.
그러니 린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굳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으려나.’
알려준다면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었지만, 직접 겪어보는 게 훨씬 낫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린이 나설 만한 일이 생길 것 같았으니까.
“나으리, 저희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도시로 들여보내주세요. 이 도시가 아니면 저희는 다 죽어요!”
비교적 순순히 물러난 상인들과는 달리 정말 문제는 난민들이었다.
처음에 거절당했던 이들보다 한층 절박한 모습으로 무릎까지 꿇는 그들이 모습은 비참했다.
‘항상 피해를 받는 건 약자들이니.’
7영웅들은 각자 자신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
말이 도시지 족히 수십 만 명이 사는 작은 국가와도 같다.
중앙도시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런 난민들은 보통 작은 도시에서 도망쳐오는 경우가 많다.
작은 도시들은 스스로 방어를 할 수 있는 병력이 많이 없기에 가장 안전한 중앙도시로 피신한다. 그러니 저런 난민들의 반응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정보를 읽었지만 예상외인 걸. 보통은 다 받아준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일이 복잡하게 된 모양이야.’
저런 난민들조차 경계를 해야 할 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 거다.
가일을 떠올리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들어올 수 없다. 이번만큼은 함부로 중앙도시에 들여보내줄 수 없다. 너희들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걸 보인다면 들여보내 주마!”
“분명 시청에 저희의 정보가 있을 겁니다! 저번에 호구조사를 통해 전부 적어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로는 안 된다. 너희의 모습으로 위장한 간자가 있을지 어찌 아는가.”
“저희는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입니다! 그런 것을 스스로 증명할 방법 따위는 없다고요!”
난민들의 외침에도 경비병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당연히 난민들은 속이 타는 얼굴이었다. 그건 주변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린의 경우엔 순둥하던 얼굴이 날카로워지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냐?”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네요. 하지만 제멋대로 할 수는 없죠.”
린은 ‘정의의 여신’이다.
인간이지만 그녀의 본질은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저런 불합리함을 보고 있으면 속이 끓을 수밖에 없다.
그야 린의 눈에는 난민들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으니까.
그뿐이 아니다.
그녀는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기에 저들이 설령 변장을 한 간자라고 할지라도 간파할 수 있다.
악의를 가지고 있는지 숨기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정의를 심판하기 위한 신의 권능.
아스트라이아의 전승스킬이 있기에.
그러니 린의 입장에서 난민들은 누구보다 결백한 자였기에 경비병에게 당장이라도 덤벼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건 내게 민폐가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 기특하기도 하지.
“하고 싶으면 해도 돼.”
“네?”
“난민들 돕고 싶잖아. 경비병들이 마음에도 안 들고.”
“그, 그건 그렇지만…….”
마치 그래도 되냐는 눈치였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말라고 만류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사자왕을 만나려면 적당히 난리를 치는 게 가장 빠를 테지.”
“아.”
그제야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모양이다.
“이봐,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사자왕을 만나다니? 그리고 난리를 펴?”
방금 전까지 우리와 대화를 나누던 덩치 큰 사내의 얼굴이 단번에 아연실색해졌다.
“근데 제가 직접 해도 괜찮나요? 역시 세한 아저씨, 아니 세한 오빠가…….”
“괜찮아. 이번엔 네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니까.”
“알겠어요.”
고작 경비병이긴 하지만 페트로이아의 경비병은 좀 특별하니 제법 싸울 맛이 날 거다.
“이, 이봐요! 무슨 말이에요!”
처음 대화를 나눴던 여성까지 끼어들어 만류했지만 그보다 린의 행동이 빨랐다.
여성이 내게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 이미 린은 난민과 경비병 사이에 도착해 있었으니까.
“뭐, 뭐야? 언제 저기로 갔어?”
사내는 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린이 경비병이 있는 장소까지 이동하는 걸 완전히 놓친 모양이다.
“너는 누구냐.”
갑자기 자신의 앞을 막아선 어린 소녀, 린의 모습에 경비병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들은 정말 평범한 난민들이에요.”
“꼬마, 나는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차가운 경비병의 말에 린은 조금 주눅이 든 얼굴이었다.
하지만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 경비병을 노려보았다.
“저는 린 테일러예요.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있어요. 또한 사람의 숨겨진 악의나 본질도 알아차릴 수 있죠.”
“수상한 녀석이군. 그래서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는다면 힘을 사용할 수밖에요.”
“당돌한 계집이군.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야.”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에 좌중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경비병에게 저런 태도로 나오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건 최소 일정 한계를 넘은 최상급 플레이어들뿐이었고, 어린 린의 모습은 그런 최상급 플레이어라기엔 심히 부족해보였다.
착용한 장비나 무구도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수상해. 너는 잡아서 딜런 님에게 넘겨야겠다. 저항하지 마라.”
경비병이 창을 쥐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경비병들은 굳이 나서지 않았다.
한 명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좋아요. 그럼 실력으로 증명하죠.”
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가일을 통해 망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힐끗 내게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얼마든지 날뛰어도 전혀 상관없었다.
“흥, 어리석은 계집…….”
비웃던 경비병의 안색이 변하는 건 금방이었다.
천천히 검을 빼어드는 린의 푸른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신격을 다루지 못했을 때는 늘 금색이던 린의 눈이었지만, 완벽히 갈무리한 이후에는 푸른색으로 돌아온 눈이었다.
하지만 신격을 해방하자 다시 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이 어린 계집애가 신격을 가진 플레이어였을 줄이야!”
신격을 해방하자 린의 주위로 묘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차츰 부풀어가는 신격에 주변에 태연히 서있던 경비병들도 무기를 손에 쥐며 린을 포위했다.
“네년이 다른 도시에서 온 녀석이로구나!”
경비병의 외침과 함께 린의 몸이 움직였다.
가장 먼저 공격한 건 정면에 있던 경비병이었다.
카앙!
금색의 빛이 번쩍임과 함께 린의 검이 할버트와 부딪치며 튕겨졌다.
“크윽!!”
검을 맞부딪친 경비병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몸이 약간 밀리며 비틀거렸다.
린은 그 모습에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한 방에 기절시키려 했는데 밀려나는 걸로 그쳤으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도 내심 혀를 내둘렀다.
말을 들었지만 페트로이아의 경비병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페트로이아의 플레이어들은 너무나 강하기에 그들을 막을 법도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경비병이 생겨났다.
7영웅들의 중앙도시를 지키는 파수견.
신과 영웅들로부터 부여된 특성, ‘도시의 수호자’를 지닌 경비병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도시에 한정해서 모든 능력치가 200퍼센트 상승하며 하급 신격이 부여됐다.
온라인 RPG라면 흔히 볼 수 있는 마을 지키는 강력한 경비병들과 같은 개념이다.
‘굳이 말하자면 신의 병사라는 게 맞겠군.’
거기다 그뿐이 아니다.
저들은 개인보다 다수일 때 훨씬 강했다.
괜히 페트로이아의 플레이어들이 영웅들이 다스리는 중앙도시를 습격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