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212화 (212/332)

# 212

212. 고인물들의 세계(1)

디어사이드의 운영실.

운영실을 가득 채우는 기이한 문자열과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열쇠의 반쪽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비록 절반밖에 없는 열쇠지만 이것만으로도 콜라보 퀘스트를 진행하는데 큰 문제는 없겠지.

만약 반쪽만으로 부족하면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으니 마음 놓고 지켜볼 수 있었다.

“성공했도다.”

아니나 다를까 대략 1시간쯤 지나자 이드라가 지쳤다는 얼굴로 말했다.

녀석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의 말처럼 반고는 페트로이아의 플레이어로서 등록한 뒤 숨어든 모양이더군. 퀘스트를 발생시켰으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예상한 대로였다.

애초에 시스템의 눈을 속이고 초월자씩이나 되는 존재가 숨어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하려다 본인이 당한 꼴이다.

이제 반고는 우리가 갈 때까지 페트로이아에서 얌전히 기다려야 할 것이다.

“가일은?”

“우선 그대가 말한 것처럼 옆방에 숨겨뒀다. 이미르나 반고는 물론, 시스템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게야.”

“딱 좋네.”

이제 페트로이아로 가서 반고만 해결하면 끝이다.

“하지만 이렇게 할 거였다면 굳이 그렇게 싸울 필요도 없었잖느냐?”

“싸우지 않았다면 가일이 우리를 믿지 않았을 거다.”

“왜?”

“우리가 반고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하니까.”

가일이 순순히 우리의 말을 들은 건, 우리가 보인 힘이 반고를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번 도박은 우리가 반고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끝이나 마찬가지.

우리가 죽는 건 물론 가일의 가족도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담한 남자군. 설령 그렇게 판단했다고 해도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순순히 잠드는 걸 선택할 줄이야.”

확실히 그렇다.

만약 나였다면 이렇게 간단히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상대를 파악하고 승리의 가능성을 산정하고 나서야 움직였을 테니까.

하지만 가일은 놀랍도록 간단하게 우리의 말을 따랐다.

그런 그의 성격을 알기에 이런 행동을 취한 거긴 했지만, 솔직히 놀라울 정도였다.

“그럼 퀘스트도 발현됐으니 나는 바로 페트로이아로 갈게. 혹시 가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봐줘.”

“맡겨두거라. 근데 혼자 갈 생각이냐?”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나는 운영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소녀를 떠올렸다.

이번 가일과의 싸움에서 충격을 받은 가련한 천재를.

“린에게 경험도 좀 쌓게 해주려고.”

***

페트로이아에 가는 것으로 결정된 사람은 나와 린, 단둘이었다.

기왕 가는 김에 지수도 함께 갈까 물어봤지만, 예상외로 지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오빠. 제가 할 일이 좀 있거든요.”

녀석은 진심으로 따라가지 못해 아쉽다는 눈치였지만, 정말로 할 일이 있는 모양인지 따라올 생각은 없어보였다.

‘대체 뭘 하고 있기에.’

평상시라면 제일 먼저 따라붙을 녀석이 거절하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하긴, 지수도 지수의 일이 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지수라면 내 부탁을 항상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미안해져서 더 이상 지수에게 무슨 일인지 캐물을 수 없었다.

거기다 착한아이 특성이 있는 지수가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챙길 건 다 챙겼어?”

“네, 무기도 시우 오빠가 새로 만들어주셨어요.”

린은 긴장된 어조로 옷을 정돈했다.

자세히 보면 린이 입고 있는 장비는 하나하나가 S급 이상의 신기급이었다.

“이런 것도 다 시우가 만들어준 거냐?”

“아, 그건…… 제우스 할아버지가 주셨어요. 페트로이아는 위험하다고 조심하라고 하면서.”

린은 부끄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긴 올림포스는 이제 린에게 두 번째 고향이나 마찬가지지.

특히 제우스는 린을 거의 손녀처럼 대했다.

린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린을 페트로이아에 데리고 가는 걸 가장 반대한 건 바로 제우스였다.

‘쪽지로 얼마나 뭐라 하던지.’

페트로이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나도 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신격을 가진 상대와 많이 싸워본 적 없는 린에게 페트로이아는 기회의 땅이었다.

검성 가일이 독보적이라지만 그곳은 고인물들의 땅.

아무리 지구가 발전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페트로이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곳에는 신격을 가진 존재가 말 그대로 넘쳐나니까.

***

‘따라가고 싶었는데.’

지수는 린과 함께 페트로이아로 떠나는 세한을 애써 외면했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쫓아가게 될 것 같았으니까.

정말 함께 가고 싶었다.

하지만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그가 지구에 없는 2주 동안 지수는 정말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서와. 까마귀가 오늘 떠났다며?”

하얀 고딕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

아자젤이 지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겉으로만 보자면 아자젤은 천상 소녀다.

싸움 같은 것과는 동떨어진 외모였지만 그녀가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그래, 갔구나.”

아자젤은 천천히 지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당겼다.

“내 아이들도 2주간 돌아오지 않을 거야. 까마귀에게 너무 뒤처지는 것 같아서 쫓아냈거든.”

“어디로요?”

“글쎄, 어딜 것 같아?”

아자젤의 성격을 생각하면 마계로 보냈을 수도 있지만 굳이 까마귀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페트로이아로 보냈을 확률이 컸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우리에게 중요한 건 2주의 시간을 얻었다는 거야.”

“……맞아요.”

세한에게는 비밀로 했다.

만약 세한이 안다면 말릴 것 같았으니까.

다른 디어사이드의 길드원들에게도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단순히 자신이 하는 행동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그럼 여기로 앉아. 바로 시작할 테니까.”

“예. 근데 이걸 한다고 당신에게 구속되거나 하는 건 정말 아니겠죠?”

“만약 아니라고 하면 너는 믿니?”

“네.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왜?”

“귀찮잖아요, 그런 데 머리 쓰는 거.”

지수의 말에 아자젤은 씩 웃었다.

“정답이야.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 너는 정말로 나와는 독립된 존재가 될 거야.”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아자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자아.”

슥.

아자젤은 자신의 하얀 손목을 손톱으로 가볍게 긁었다.

그러자 작은 실선이 생기며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마시렴. 이걸 마시고 자신의 것으로 한다면 분명 너는 악마가 될 수 있단다.”

지수는 악마의 힘을 다루는 법을 줄곧 아자젤에게 배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악마가 되는 건 아니다.

악마란 이 세계의 외신과도 같은 존재.

전 우주에 영향력을 가진 특별한 이들이다.

이드라나 니알라토텝처럼 막강한 불멸성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육체 또한 특별하다.

인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육신을 단련한 지수지만 악마의 그것과는 달랐다.

인간은 육신의 손상으로 사망하게 되지만 악마는 다르다.

그들은 강한 의지력을 지닌 존재이며, 정신력 덩어리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들을 상징하는 욕망이 ‘악마’라고 부를 수 있었고, 정신이 망가지지 않는 한 결코 죽지 않는다.

분노의 악마가 아흐리만에게 삼켜졌던 건, 그의 분노보다 아흐리만의 악의가 더욱 강했기 때문. 그가 가진 욕망이 다른 욕망에 짓눌려 사라진 것이다.

“물론 너는 플레이어라 특별해.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몰라. 아바돈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태까지와는 다른 악마가 될 테지.”

뚝, 뚝, 뚝.

아자젤이 준비한 와인잔에 붉은 피가 조금씩 쌓였다.

나태의 악마는 모든 악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악마가 차지하는 자리다.

당연히 그런 아자젤의 피는 어떤 악마보다 순도가 높았다.

“근데 당신은 어째서 신자운에게는 피를 먹이지 않는 건가요? 그렇다면 보다 완벽하게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지수는 아자젤의 피가 담긴 찻잔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상외의 질문이었는지 아자젤의 눈은 동그랗게 떠졌다.

“이 상황에 그게 궁금해?”

“네.”

지수는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다.

그러니 아자젤이 신자운에게 가진 묘한 감정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정작 아자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걔가 싫어해. 그 아이는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서 강해지고 싶어하거든.”

“……그렇군요.”

“너는 다르지?”

“네.”

인간이든 악마든 지수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녀가 바라는 건 그저 하나.

세한의 곁에서 뒤처지지 않고 쫓아가고 싶을 뿐.

지켜지는 존재가 아니라 지켜주는 존재가 되고 싶을 뿐이다.

붉은 피가 담긴 찻잔을 바라보던 지수는 천천히 그것을 자신의 입에 대었다.

***

페트로이아는 다섯 개의 대륙으로 구성된 별이다.

인간은 물론 엘프나 드워프가 존재했고, 검과 마법이 주를 이루는 판타지 세계였다.

“신격이…… 넘쳐흐르네요.”

그 땅에 첫발을 내디딘 린의 첫마디였다.

신격이 넘쳐흐른다. 그 말이 딱 맞았다.

“이곳은 신들의 영향력이 큰 장소야. 종교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신도를 거느린 신도 있고 아바타라 불리는 플레이어들이 있는 것도 똑같지.”

다만 워낙 많은 신들이 있는데다, 지상에 강림한 이들도 많아 지맥에 신격이 대놓고 흐르고 있었다.

계속된 인플레이션의 결과물이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는 숲속이었다.

자연의 마력이 풍부했고 옅은 신격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분명 이 산을 다스리는 신의 힘일 테지.

또한 나무 사이에 숨어 우리를 바라보는 작은 요정들도 있었다.

린은 그런 요정들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저런 모습을 보면 아직 애는 애라니까.’

요즘 제법 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열네 살이다.

어린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대신 그만큼 약자는 살기 힘든 곳이야.”

“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거든.”

린은 내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두 눈을 깜박였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될 일이다.

페트로이아는 겉으로 보자면 환상적인 장소지만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기엔 무척 힘든 곳이었다.

“근데 근처 도시로 전이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가끔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건 그래요. 이렇게 숲속을 거닐어본 게 대체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애초에 전이 위치는 이드라가 결정하는 거라 내게 힘은 없었다.

도시로 하면 여러 가지로 눈에 띌 테니 숲으로 결정한 걸 테지.

“다행히 도시는 근처에 있네.”

까마귀의 눈을 통해 주변을 살펴보니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작은 도시가 있었다.

중세의 성처럼 성벽을 높이 쌓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보자 세삼 다른 세계라는 인식이 들었다.

“성이에요!”

그렇게 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린은 성을 본 것만으로 놀랐는지 함박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 성의 입구를 보는 순간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사람이 줄지어 있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글쎄…….”

대략 짐작이 가기는 했지만 린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아이고, 나으리. 저는 정말 난민이 아니라 상인입니다. 옆 동네 전쟁과는 상관이 없어요!”

“도시와 무역을 하는 상인이라면 교역허가증을 보여라! 말로만 떠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법이지.”

“그, 그게 상행 중에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거짓말 마라!”

입구를 지키는 병사의 말에 상인이라 자칭한 남성은 어두워진 얼굴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린은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나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빠, 뭔가 경계가 삼엄하네요. 저희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마.”

페트로이아에 대한 정보는 이미 커뮤니티를 통해 찾아보고 온 상태였다.

이곳에서 약한 자는 죄인이다.

특히 갈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난민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반대로 말하면.’

힘만 있다면 이곳보다 자유로운 장소도 없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