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211. 검성(劍聖)(3)
말 그대로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 서울역이 반토막 났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에서 세한은 가일의 모습을 찾았다.
“백설이는 민아를 데리고 피해!”
“알겠습니다.”
세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아와 백설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마 마법을 사용하여 단거리 이동을 한 모양이다.
‘다행히 다른 녀석들에게 해코지할 생각은 없나.’
만약 가일이 자신뿐만이 아니라 디어사이드 길드원들 전원을 목표로 삼았다면 상황은 더 성가셨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정면 전투에 약한 민아나 백설이를 지키면서 싸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일은 내 말을 들었을 텐데도 백설이와 민아를 막지 않았다.
카가가각!!
지면에 선이 그어지며 날카로운 참격이 스치고 지나갔다.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참격이 세한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세한은 그것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피해봤자 참격은 계속해서 따라붙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모두 막아내는 수밖에.
인벤토리에서 꺼낸 두 개의 검을 쥐고 신력과 마력을 불어넣었다.
금색과 적색으로 눈동자가 빛나며 양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캉캉캉캉!!
1회차의 세한이라면 정면에서 가일과 싸우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혈천수라공을 극성으로 익혔기에 가일의 감격을 어렵게나마 쫓아갈 수 있었다.
‘진천백보다 훨씬 빨라!’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세한조차 검의 궤적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세한은 모조리 막아냈다.
양손에 든 검을 휘두르고, 미처 막지 못할 것 같은 건 허수공간에서 튀어나온 프라가라흐가 튕겨냈다.
겉모습만 보자면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이었지만, 가일은 조금씩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구의 게임이 시작한지는 기껏해야 2년.
반면에 페트로이아는 수백 년이 넘었다.
가일이 태어난 순간부터 페트로이아는 계속 게임이 진행된 상태였고 수많은 고인물 신들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게임을 접고 싶어도 투자한 게 아까워서 접지 못하는 신도 많았고, 그만큼 강자와 약자의 격차가 컸다. 가일은 그런 페트로이아에서 신의 도움 없이 초월자의 경지에 올랐다.
그만큼 가일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컸지만, 이곳에 온 뒤로 그 자부심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죄다 괴물뿐이군.’
2년으로 이 정도다.
시간이 더욱 흐른다면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꽤나…… 여유가 있는 모습이군요.”
공격을 막으며 빈틈을 노리던 세한은 가일이 생각에 잠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옆과 뒤에서 허수공간이 열리며 프라가라흐가 그의 등 뒤를 노렸다.
‘이런, 방심했나.’
그래도 문제는 없다.
자신에게 사각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음속을 넘는 속도로 날아든 프라가라흐는 가일의 몸에 닿기 전도로 튕겨나갔다.
“하아앗!!”
허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프라가라흐가 튕겨나가는 동시에 그것을 잡아챈 린이 가일의 허리춤을 노렸다.
카가강!!
“칫!”
연속해서 붉은 불꽃이 허공에서 튀었다.
단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는 경이적인 검술에 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해하지 마.”
“네?”
뒤로 훌쩍 뛰어 옆에 내려선 린에게 세한은 말했다.
“단순히 검술이나 신체능력만 따지면 너와 큰 차이도 없어. 중요한 건 신력의 컨트롤이지.”
“신력의 컨트롤이요?”
“그래, 잘 봐봐. 너라면 분명 알 수 있을 테니까.”
혈천수라공을 재차 극성으로 운용하며 뒤통수를 향해 날아오는 검기를 살짝 고개를 까딱이는 것만으로 피했다. 그 모습은 가일이 린의 공격을 막아내던 모습과 상당히 흡사했다.
굳이 시야에 의지하지 않고 공격을 방어하는 것.
“후우.”
세한은 호흡을 정돈하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주위에 묘한 기운이 원을 그리며 느릿하게 회전했다.
‘신격을 컨트롤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적의 힘을 이용한 제3의 눈.
자신이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필승의 영역.
세한은 대략 반경 10미터내의 공격을 완벽히 인지하고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일은 대략 100미터쯤 되겠지.’
간단 계산만 하더라도 세한의 열배는 된다.
그만큼 그의 기감은 발달해있었고, 신격의 운영도 린이나 세한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공권이 넓다고 반드시 유리한 건 아니다.
결국 서로의 제공권에 내에 있다면 동일한 조건이라는 거니까.
즉, 그가 10미터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충분히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너는…….”
검과 검이 허공에서 몇 번이나 교차했다.
분명 가일의 검술은 세한보다 한참 윗줄의 실력이었다.
그런데도 가일의 검은 세한의 몸에 닿지 않았다.
“이상한 녀석이야.”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을 지닌 린보다 가일에겐 세한이 더 이질적이었다.
들리는 정보나 소문만 들었을 때는 비슷한 부류의 천재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 검을 부딪치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너는 제법 재능이 있어. 그런데 이 아저씨가 느끼기엔 어마어마한 천재는 아니거든. 너 정도 되는 재능은 꽤 많지.”
그런데 세한은 자신과 정면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가일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손대중을 하고 있는 거겠죠.”
손대중이라.
부정할 수는 없다. 가일은 지금 세한을 죽이기 위해 모든 실력을 내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지. 내가 실력을 모두 내보인다고 해서 너를 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알 수 없는 점이 너무 많았다.
재능에 비해 그가 가진 힘은 지나치게 강했다.
상급 신격이 문제가 아니다. 신격의 컨트롤과 전투경험이 결코 20대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수라장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감각이 그에게 있었다.
카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세한의 검이 부러져나갔다.
벌써 세 자루의 검이 부러졌지만, 세한은 능숙하게 허수공간에서 새로운 검을 꺼내며 가일의 검을 쳐냈다.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무기의 파손을 염두에 둔 싸움이다.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세한과 검을 나누는 건 제법 즐거웠지만, 즐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다.
그와 싸우는 동안 린의 눈은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녀가 가세하게 된다면 패배하게 되는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
‘슬슬 전력으로 해야겠어.’
가일은 훌쩍 뒤로 뛰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방금 전까지의 싸움은 장난이었다는 듯, 바닥을 타고 그의 신격이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일을 보며 세한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제대로 싸워보고 싶기는 하다만 더 이상 싸우는 건 무의미해.’
가일의 기술을 린이 충분히 봤고, 가일도 이쪽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면 서울역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 전체가 박살 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세한은 차분한 어조로 가일을 향해 말을 걸었다.
“잠시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
“예.”
긴장감이라곤 보이지 않는 세한의 얼굴에 가일은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제안이라는 게 있나?”
“그럼요.”
진정한 적은 가일이 아니다.
여기서 그와 계속해서 싸움을 벌이는 짓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가족을 구할 수 있게 도와드리죠.”
“……호오.”
뭐, 예상했던 말이다.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세한이 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말이야. 불가능해. 이미 콜라보 퀘스트 발현됐어. 이 퀘스트가 클리어되려면 내가 죽든 네가 죽어야 하지. 너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렇겠죠.”
거기다 시간제한도 있었다.
퀘스트가 기한이 끝나기 전까지 세한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가족의 목숨이 위험했다. 거기다 반고에게 자신의 위치도 지속적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따로 수를 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뭐?”
“할 수 있다면, 도와드릴 수 있다면 어쩔 거냐는 말입니다.”
허풍이라기엔 너무나 당당한 태도였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말을 꺼낸 건 다름 아닌 ‘까마귀’였으니까.
불과 2년 만에 전 우주의 이목을 모은 이단아.
“한번 들어볼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래.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주마.”
“약속한 겁니다.”
사실 가일은 이번 일의 피해자에 가까웠다.
세한 때문에 가족을 볼모로 붙잡히고 억지로 싸우게 된 상황이었으니.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이러면 이득이지.’
이 사건만 해결하면 합법적으로 검성을 부려먹을 수 있는 것이다.
퍼블리셔의 입장에서는 꽤나 강수를 뒀다고 할 수 있었지만 세한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답은 간단합니다. 퀘스트가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난다면…….”
인벤토리에 손을 넣는다.
그의 손에 잡힌 건 작은 단검이었다.
‘어떤 독’이 발라져있는 단검.
“죽으면 되죠.”
***
페트로이아.
게임이 진행되는 별 중에 가장 장수한 별.
그곳은 단순히 신이 아바타를 삼는 걸 넘어 직접 지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세계였다.
그만큼 신들의 영향력이 강한 세계지만 유일하게 신들이 터치할 수 없는 나라가 있었다.
바로 바룬다르크 제국.
검성 가일이 통치하는 나라이자 페트로이아에서 유일하게 신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나라.
“……실패했나.”
평소라면 가일이 앉아 있어야할 왕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흑발에 갈색피부를 지닌 그는 반고.
가일에게 퀘스트를 부여한 후,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결판이 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검성마저 죽일 줄이야.’
외신보다는 약하지만 검성은 반고도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이가 아니다.
‘외신을 죽인 건 단순히 놈들을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녀서 가능한 거라 생각했건만.’
외신과 싸운 것치고는 주변에 피해가 없어 신에게 한정된 특별한 힘을 발휘해 죽였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신이 아닌 인간인 가일 바룬다르크라면 놈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놈은 예상외로 가일도 손쉽게 쓰러트렸다.
지구는 퍼블리셔의 영향력이 닿지 않기에 어떻게 쓰러트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퀘스트가 종료된 걸로 보아 죽은 건 확실했다.
‘바로 이미르님께 보고 해야겠어. 놈들을 죽일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니까.’
가일이 죽은 시점에서 더 이상 페트로이아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놈의 가족도 더 이상 살려둘 필요 없겠군.’
가일의 죽은 이상 더 이상 인질로서 가치는 없었다.
괜히 살려뒀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깔끔하게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천천히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던 찰나.
[새로운 콜라보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뭐라고?”
콜라보 퀘스트는 방금 끝났을 텐데?
당황한 반고가 알림창을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의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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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 퀘스트 : 침략자
페트로이아와 지구의 새로운 콜라보 퀘스트입니다.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이제부터 페트로이아를 침략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페트로이아의 최강자인 검성 가일의 가족.
무자비한 침략자들의 손에서 검성의 가족을 지켜내야만 합니다.
*검성 가일의 가족들이 죽을 경우 퀘스트가 실패합니다.
*퀘스트 실패시 당신은 사망하게 됩니다.
제한시간 : 14일
==
“……이게 뭐야.”
갑자기 퀘스트가 발현됐다.
내용 자체는 크게 문제될 것 없었다.
퀘스트 실패 시 사망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있는 패널티다.
다만 퀘스트가 발현된 것이 자신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설마, 까마귀의 짓인가?!”
반고는 시스템을 속이기 위해 ‘페트로이아 소속의 플레이어’로서 숨어든 상태였다.
상대는 그것을 노려 퀘스트를 발생시킨 것이다.
이미르가 그러하듯, 상대도 열쇠의 반쪽을 가지고 있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페트로이아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역으로 퀘스트를 걸어버리다니.’
이대로 별을 떠나거나 가족을 빼앗기게 되면 자신은 죽는다.
빼도 박도 못하고 이곳에서 상대를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거기다 가일의 가족들을 죽일 수도 없어졌다.
아마 콜라보 퀘스트는 별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발생했을 테니 이상함을 느낀 이들도 있을 터.
만약 페트로이아의 신들이 퍼블리셔에서 직접 간섭하여 가일을 빼돌렸다는 걸 눈치채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어쩔 수 없군.”
반고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신장은 좀 더 작아지고, 매끈한 얼굴선은 투박한 형태로 변했다.
이제부터 자신은 거인 반고가 아닌 검성 가일이 되어야만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