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209. 검성(劍聖)(1)
올림포스의 영역.
제우스는 자신이 앉아있는 왕좌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두 명의 신이 서 있었다.
올림포스를 대표하는 최상급 신격을 지닌 신 중 하나, 태양신 아폴론.
그리고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와 하나가 된 린 테일러.
두 명의 신의 손에는 각각 무기가 들려 있었으며,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하지마세요, 린.]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린의 머릿속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이제 완전히 한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트라이아의 목소리였다.
[아폴론님은 강한 신이지만, 지금의 린이라면 충분히 방어전을 펼칠 수 있습니다. 아뇨,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린의 신격은 아직 상급이다.
최상급 신격까지 한 걸음 남아있었지만 그 한걸음을 영원히 내디딜 수 없는 신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니 아스트라이아의 말은 무책임한 응원에 불과했다.
그것을 듣는 당사자가 린이 아니었다면.
‘알겠어요, 여신님.’
린의 나이는 이제 곧 열다섯.
게임이 시작하고 2년을 향해가며 그녀도 상당히 변해 있었다.
양 갈래로 묶던 머리카락도 이젠 한쪽만 가볍게 묶었으며, 신장도 전보다 커졌고 젖살도 거의 사라졌다.
예전에는 리브라를 쥐고 있을 때 어색해보이곤 했지만, 이젠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 되고는 했다.
‘정말 놀라울 따름이군.’
아폴론은 그런 린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했다.
그녀와 올림포스에서 만난 지도 곧 1년이 되어간다.
그때만 하더라도 제법 어린 티가 났었지만 역시 인간의 성장은 빠르다.
신격을 지닌 신에 가까운 존재라지만 그녀의 본질은 아직 인간이었으니까.
1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동안 린은 아스트라이아의 신격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건 물론, 한 단계 위인 상급 신격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아마 약간의 계기만 더 있다면 최상급 신격에 도달할 수 있겠지.
긴 세월을 살아온 아폴론의 입장에서도 놀랄만한 성과다.
이 우주에서 지구는 본래부터 유독 ‘최상급 신격’이 많은 별이었다.
다른 별에서 ‘신’이라 불리는 이들 중에 최상급 신격에 도달하는 이가 고작 1~2명 정도라고 생각하면 수십 명이 넘는 지구는 마경에 가깝다.
그만큼 놀라운 재능을 가진 영웅이나 신이 많았지만 린은 그중에서도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연 세한의 생각대로 되어가는 구나.’
둘의 대치를 보고 있던 제우스는 인자하게 웃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우주의 판도는 전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저 아이가 어디까지 성장하게 될 것인가.
10년의 세월만 지나더라도 이미르를 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실은 놈도 짐작하고 있을 테지.’
분명 빠른 시일 내에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은 놈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갈게요, 태양신님.”
“그래.”
리브라를 쥔 린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올림포스에 머물며 린은 많은 걸 배웠다. 신격을 다루는 법, 그리고 아스트라이아의 전승스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신들에게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세한에게 배운 것도 있었다.
중원에서 세한을 도우며 자신만의 검술을 확립한 것이다.
‘아직 이름 같은 건 붙이지 않았으니 오늘은 그의 것을 사용해 봐야겠어.’
알데바란이 떠올랐다.
그가 가진 무의 정수는 린의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다른 기억은 뿌연 안개 속에 있었지만 그것만은 선명했다.
쿵!
린의 발이 대지를 박찼다. 황소의 돌진과 같은 강한 충격이 신전의 안에 울려 퍼졌다.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그건 말 그대로 황소의 그것과 같았다.
‘설마.’
아폴론은 활의 시위를 당기며 린을 응시했다.
열아홉 개의 별이 빛나며 그녀의 검이 움직였다.
금우궁의 지배자라 불리던 알데바란, 그가 수천 년간 익혔던 ‘금우파성권’.
지금 린의 움직임은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아니, 달라.’
비슷하지만 다르다.
알데바란이 사용하던 건 ‘권법’이었고 지금 린이 사용하는 건 검법이다.
거기다 호흡도, 보법도 검의 움직임도 분명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좀 더 완성된 것 같은 모습.
지척까지 접근한 린의 검이 열아홉 개의 별과 함께 휘둘러졌다.
“창성(昌星).”
금우파성권, 최후의 초식.
그것이 검으로 다시 한번 재현되었다.
***
“올림포스의 시험에 린이 통과한 모양이더구나.”
점심을 먹던 와중, 이드라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해왔다.
“올림포스의 시험? 벌써?”
“아직 최상급 신격은 아니다만, 그건 거기서 가르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거겠지.”
달그락.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올림포스의 시험에 통과했다는 건 사실상 ‘신’의 자리를 약속 받은 거다.
반쯤은 확정되어 있던 자리이긴 했지만, 그것과 이건 다르다.
지금까지 신에 가까운 인간이었다면, 지금은 ‘신’으로 자칭을 하더라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너무 빠른데…….”
“정말 괴물 같은 아이로구나. 그러니 고 싸이코 같은 계집애가 안달이 나는 것도 당연하겠어.”
싸이코 같은 계집애는 지수를 말하는 건가.
최근 이드라와 지수가 티격태격하는 건 알지만 이젠 호칭도 장난이 아니구만.
‘린이 빠르게 시험을 통과한 건 나쁜 일이 아니야. 린이 지구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니.’
언제 이미르가 수를 쓸지 모르니 지구에 린이 있다는 건 반길 일이다.
아무래도 현재 신격을 지닌 존재는 나와 린뿐이었으니까.
지수는…… 모르겠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라 캐물을 수도 없고.
‘10년 후의 린은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거지?’
올림포스 교육을 받고 1년이 좀 안 되는 시점에서 상급 신격에 도달했다.
알데바란과 싸우던 린은 그럼 어느 정도였던 걸까.
‘미래가 바뀌지 않았으니 지금 린의 성장속도는 이상한 게 아니야.’
저런 린이 있음에도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건가?
거기다 나는 외신조차 죽일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미래를 보는 소녀, 민수아에게 몇 번을 물어봐도 엔딩은 달라지지 않았다.
트루엔딩, 광기의 마왕.
대체 어떻게 해야 엔딩을 바꿀 수 있는 거지?
“그리고 하나 더 말할 것이 있다.”
“린 말고도?”
“그래, 퍼블리셔로부터 콜라보 퀘스트 제의가 들어왔다.”
말이 제의지 곧 시작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미르는 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열쇠의 반쪽을 지녔으니까.
“……어디와 하는데?”
“페트로이아.”
역시.
예상한 그대로다.
현재 비정상적인 성장속도를 보이는 지구와 콜라보를 할 만한 곳은 페트로이아 정도밖에 없으니까. 단순히 플레이어의 평균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나나 린, 그리고 지수와 같이 특별한 플레이어를 상대할 존재가 거기에밖에 없다.
“그래서 언제부터 시작하는데?”
“음, 오늘부터라더군.”
“그래, 오늘……. 아니, 뭐라고? 오늘?!”
워낙 태연하게 말해서 순간 잘못들은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자기 콜라보 퀘스트를 진행한다고?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으로 조작하지 못하게 한 거겠지. 꽤 강수를 뒀구나.”
“콜라보 퀘스트가 그렇게 빠르게 되는 건가? 세계와 세계를 연결해야 하니 차원문도 열어야 하고 동기화도 진행해야 될 텐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간단하다고?”
“한 명만 이곳으로 보냈으니까.”
단 한 사람만을 이곳으로 보냈다면 동기화고 뭐고 할 필요가 없다.
그때 중원에서 온 습격자들이 그러했듯, 단순히 넘어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
잠깐만, 그렇다는 이야기는…….
“설마, 이미 와 있는 거냐?”
서울 전역에는 내 까마귀들이 감시하고 있었지만 특별한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내가 놓친 게 아니다.
느낄 수 없었을 뿐이다.
“검성(劍星)이.”
***
“백설아!”
금발머리의 소녀, 린 테일러가 도도도 달려가 자신의 친구를 와락 안았다.
거의 몇 달 만에 만나는 친구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린.”
“응, 오랜만이야. 민아 언니도 나와주셔서 기뻐요.”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서울역이었다.
올림포스에서 지구로 이동하며 서울역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예전이라면 이드라가 머무는 운영실로 이동되었겠지만, 번거롭다는 이유로 다양한 차원문들도 서울역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올림포스로 이동하는 차원문을 이용하는 건 린뿐이었지만 말이다.
“근데 정말 시험 통과한 거야?”
“네. 이기진 못했지만요.”
“그 정도로도 대단한 거지.”
민아의 말에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던 어릿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아폴론의 반반한 면상을 날려줬으면 좋았겠지만, 어린 신에겐 어려운 일이긴 해.”
그렇게 말한 그녀는 빤히 민아를 보았다.
마치 넌 저렇게 못하냐는 눈빛이다.
“저도 대단하거든요? 아직 신격 같은 건 얻지 못했지만…….”
“그래, 그래. 대단해. 근데 지구에 있는 애들이 좀 특별하니.”
“저렇게 특별한 사람은 네 명 정도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저도 상당히 특별하고 대단한 플레이어에요. 얼마나 유명한 줄 알아요?”
대부분 디어사이드 길드의 소속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 명은 악마의 계약자이지만 그쪽도 디어사이드와 상당히 얽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디어사이드는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길드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특히 르뤼에에서 다녀온 이후로는 민아를 알아보는 사람도 늘었다.
“저기…….”
봐라, 벌써 이렇게 말을 거는 사람까지 있지 않은가.
민아는 힐끗 어릿광대를 본 뒤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특별히 할 말은 없었다.
사인을 해달라고 하면 거절하려고 돌아봤을 뿐이다.
‘응?’
굉장히 특이한 행색을 한 남자였다.
나이는 대략 삼십 대 후반 정도? 얼굴은 그 정도로 보였지만 머리색이 회색에 가까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복장도 특이했다.
마치 판타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죽갑옷에 허리에 차고 있는 길쭉한 장검. 마치 내가 기사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복장이었다.
거기다 한국인이 아니다. 어디로 봐도 외국인이었다.
“하, 하하. 그렇게 빤히 보니 부끄럽구만. 아가씨, 미안한데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아?”
목소리는 지극히 가벼워서 한량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면 턱의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았다.
“아, 네네. 뭔가요?”
사내의 모습을 바르게 훑은 민아는 능숙하게 답했다.
그녀의 감이 이 남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혹시 말이야. ‘디어사이드’라는 길드의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의 눈은 굉장히 부드러웠고 어디로 봐도 나쁜 의도는 없어보였다.
질문이 수상했지만 ‘디어사이드’에 대해 묻는 플레이어는 이 남자 말고도 많았다.
해외의 플레이어들이나 기자들이 디어사이드의 정보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민아는 이 남자가 수상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은 긴장으로 가득 찰 만큼.
“죄송해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민아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넘어갈 만한 행동이었다.
“그래?”
사내는 싱긋 웃었다.
“네,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다만 그 시선은 민아가 아닌 다른 둘에게 향해 있었다.
린과 백설이에게.
“어린아이들은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하지 않거든.”
그의 말에 린과 백설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서있었지만 이 남자는 그것을 단번에 간파했다.
적대적인 시선을 보낸 것도, 무기에 손을 올린 것도 아니었는데.
“에이, 아저씨.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
민아는 반사적으로 둘의 앞을 막아서며 생긋 웃으며 말을 하려했지만 사내는 그 말을 끝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미안해, 아가씨. 내가 지금 좀 급해서 말이야.”
칭.
그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어느새 뽑혀있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가공할 속도의 발검(拔劍)이었다.
“손대중은 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검이 움직인다.
금빛의 빛이 민아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처음 발검은 놓쳤지만 그것이 휘둘러지는 걸 지켜볼 수는 없었다.
린은 사내의 손목을 움켜쥐고 강하게 노려보았다.
선명하게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가 사내에게 닿았다.
“……오호, 과연 그렇구만. 아저씨 놀랐는걸.”
사내는 진심으로 놀랐다.
뭔가를 알고 있나 싶어서 가볍게 제압하려 했지만, 설마 이 세 소녀들이 자신이 찾던 ‘디어사이드’의 인물들일 줄이야.
특히 지금 자신을 막아선 소녀는, 현재 전 우주에서 가장 어린 신.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는 괴물.
시간이 지나면 아마 자신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네?”
“아직 경험이 부족해.”
슥, 하는 천이 미끄러지는 감각과 함께 사내의 팔이 린에게서 가볍게 빠져나갔다.
그것을 재차 방어하기 직전, 린의 목에 두 번의 충격이 가해졌다.
“……!”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눈으로는 볼 수 있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한번 보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이라면, 초견에 끝내면 되는 거다.”
아주 간단하다는 듯 말하지만 현재 그런 것이 가능한 존재는 전 우주에서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린!”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린을 안아든 민아는 사내를 긴장된 눈으로 응시했다.
그제야 아까부터 민아의 본능이 경고신호를 보내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는 이 사내는, 민아가 만난 어떤 적보다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