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208. 나아가는 세계(2)
“둘이 언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홍가은의 연애상담은 그리 길지 않았다.
머리가 청순한 그녀답게 요구사항이 지극히 단순했기 때문이다.
‘창우 씨와 만나고 싶은데 만남을 주선해 주실 수 있나요?’
보통 연애상담이라고 했으면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 혹은 취미가 뭔지 이런 식으로 물어보리라 생각했건만 다짜고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내 입장에서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바로 창우에게 말했고, 창우의 대답도 의외로 심플했다.
“그러죠.”
“……다시 말하지만 제네시스의 홍가은입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혹시 만나면 세한 씨에게 곤란한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여태 접점도 없던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가은 씨의 검기는 눈이 보이지 않는 제게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검을 주무기로 삼으니 교류나 대련을 하다보면 서로 발전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생각도 들고요.”
그렇게 말한 창우는 손에든 바르자이의 언월도를 높이 올렸다.
“당장 이 무기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으니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실용적인 이유였다.
근데 홍가은이 생각한 이유와는 좀 다른 것 같은데.
기껏 만나서 한다는 게 대련이라면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아니지. 홍가은이라면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데이트에 대한 지식이 몹시 희박해 보이는 그녀라면 오히려 옳다구나 덤빌지도 모른다.
그런 대화가 있은 후, 창우는 간간히 홍가은을 만나러가곤 했고 그럴 때마다 어째서인지 지수가 내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
딱히 뭐라 말을 거는 건 아니다.
그냥 내 옆에 조용히 앉아 빤히 나를 보았다.
‘르뤼에에 다녀온 후에 더 심해진 것 같은 느낌이.’
정확히는 나와 이드라의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것 같았다.
예전보다 벽이 없어졌다고 해야 할지.
1회차의 이드라가 했던 일을 들은 이후론 내가 이드라에게 가지던 미약한 벽마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나뿐이었는데.”
아주 미약한 소리였지만 내가 그 말을 놓칠 리가 없었다.
물론 지수도 내가 그 말을 못 들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건 압박인 셈이다.
대체 르뤼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드라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달라는 뜻이었다.
참고로 현재 지수의 눈동자는 몹시 빨갛게 변해 있었다.
‘신호등이냐.’
빨간불이 들어와서 상당히 무섭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착한아이’ 특성을 보유한 탓에 지수가 선을 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이드라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할 수 있는 반항이란 이렇게 내 옆에서 빤히 바라보는 정도였다.
‘그게 제일 무섭지만.’
차라리 이드라를 칼로 찔러라. 죽지도 않는데.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창우와 가은의 관계를 본 이후에는 나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수나 이드라가 내게 지닌 호감에 대해 답을 내릴 틈이 없었다.
적어도 답을 낸다면 모든 상황이 종결된 이후에 하리라 생각했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적극적으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피하는 건 제 생각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가은과 만나러가던 창우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큰 의미 없이 한 말일 테지만 내게는 꽤나 날카롭게 다가왔다.
내게는 둘 다 소중한 이들이다.
둘 중 한명만 없었어도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목숨을 구해준 건 물론, 살아갈 길을 제시해 준 이였다.
“끄응.”
이드라도 처음에는 신이니 아무래도 좋다고 했지만, ‘질투심’이라는 감정을 느낀 이후에는 반응이 묘해졌다. 말하자면 내 의견을 존중은 하겠다고 하지만 시선이 곱지 않다.
‘이 몸은 신이니 인간의 도덕심은 아무래도 좋다만. 그래, 아무래도 좋다만. 그대의 입장에서 양다리를 걸친다면 주변에서 그대를 보는 시선은 쓰레기가 될 테지. 그 시선을 감내하는 모습도 나름 여흥이 되겠구나.’
생각해 보면 나는 어떻게 해도 쓰레기가 될 운명이다.
둘 다 선택하면 이드라의 말처럼 양다리를 걸친 쓰레기이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여성 중 하나를 버린 쓰레기가 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어영부영 넘어가게 내버려두면 둘의 감정을 이용할 뿐인 쓰레기이니…….
진짜 어떡하냐.
여태 연애 한번 해본 적도 없는데 처음부터 난이도가 너무 높다.
자칫하다간 지수가 나를 솔로몬의 판결처럼 반으로 쪼갤지도 모른다.
“…….”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조용히 내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최근 들어 지수가 어딘가로 사라지곤 했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까마귀의 눈으로 보려고 해도 까마귀를 귀신같이 모조리 죽여 버리는데다 스토커 스킬을 발휘하게 되면 나는 지수를 전혀 볼 수 없었다.
‘지수니까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내게 말을 하지 않고 움직인다는 점에서 섭섭했다.
지수나 이드라의 마음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내가 말하기엔 너무 뻔뻔한 말이라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
“후우, 후우……. 이 정도면 어때요?”
“대단한데? 너 정말 재능이 있네. 가르치는 입장에서 뿌듯할 정도야.”
현재 지수가 있는 장소는 아자젤과 신자운의 거처였다.
세한이 보면 대체 네가 왜 그곳에 있냐고 따지겠지만, 최근 지수는 아자젤을 자주 찾고는 했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안 돼요. 그동안 너무 뒤쳐졌으니까요.”
지수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막대한 살기는 멀리서 훈련을 하던 신자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신자운이라 그 정도지 민아의 친구인 지선과 혜미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저 악마 같은 여자는 왜 매일 여기에 오는 거야?’
‘민아에게 말해서 쫓아내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이미 지수는 둘에게 경고를 해둔 상태였다.
만약 이곳에 자신이 온다는 정보가 세어나간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고.
사실 말이 살벌해서 그렇지, 발설한다고 해도 지수는 둘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기껏해야 좀 노려보는 정도였겠지. 하지만 둘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보다 무서운 협박이었다.
그런 지수를 보며 아자젤은 지수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
르뤼에 탐사가 끝나고 한 달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도와주세요.”
다짜고짜 아자젤을 찾아간 지수는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자젤은 뭐라 말도 못하고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하얀 옷에 툭 떨어트렸다.
“……이게 뭔 일이래.”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자젤에게 지수는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신격을 얻지 못했어요. 이대로라면 분명 뒤쳐질 거예요.”
“뒤쳐져? 네가? 대체 누구에게?”
“전부예요.”
디어사이드의 길드원들은 세한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존재를 지수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지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제일 쓸모가 없었다.
잘하는 건 자신보다 약한 이를 죽이는 게 다였고. 막상 강적이 나오면 세한이 처리했다.
반면 민아는 대처자원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세한을 서포팅했고, 송시우는 현 인류 최고의 대장장이였다. 경매장 물품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대부분이 시우가 만든 거였고 세한의 무기를 개조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주는 것도 시우의 일이었다.
루크는 린의 아버지였으며, 린은 지수 정도는 ‘따위’로 생각할 재능을 지녔다.
거기다 이젠 창우도 바르자이의 언월도를 지니고 있으니 점점 더 자신은 쓸모가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참…….’
그런 지수를 바라보는 아자젤의 입장에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애를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두고 다니니까 이렇지.’
세한의 선택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녀가 보기에 세한의 잘못은 지수를 너무 사무적으로만 대한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세한이 지수를 소중히 생각하는 건 맞다.
그러니 위험한 일에는 데려가지 않는 거겠지.
안다, 알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특히 이렇게 마음이 아픈 아이라면 사소한 불씨만 생겨도 큰 불길이 되어 타버린다.
‘거기다 린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나.’
라이벌이라 생각하는 아이가 너무 강하다.
그녀의 재능은 아자젤과 거의 동급. 어쩌면 조금 위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아이가 있으니 지수의 마음속에서는 조금씩 초조함이 커지는 거겠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아이는 이미 최상급 신격을 목전에 뒀다.
올림포스의 집중과외가 있었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성과다.
그런 게 지상에 강림하게 된다면, 인류의 위협은 대부분 멸절한다고 봐도 됐다.
“너는 강해, 한지수.”
“아니에요, 저는…….”
“시일이 흐른다면 신격도 얻을 테지. 하지만 너는 빠르게 강해지고 싶은 거지?”
“맞아요.”
그녀의 본능이 이제 곧 더 큰 위험이 닥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세한처럼 신격을 가지고 싶었다.
“린은 아스트라이아를 흡수해서 신격을 얻는 과정을 건너뛰었어. 그리고 세한도 신격을 가진 놈들을 쓰러트려서 격을 상승한 거야.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신격을 얻는 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일이야.”
“…….”
알고 있다.
알기에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우습게도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 것이다.
“혈천수라공 극성에 도달한 것만 해도 대단해. 수년 내에 신격을 얻을 테지. 진천백이나 진천웅이 그러했듯. 너도 이미 조금 느끼고 있잖아?”
“그래선 늦어요. 너무 약해요.”
역시 아자젤이 예상한 답이다.
지수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아자젤이라면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재밌네. 나태의 악마에게 일을 시키러 오다니.”
그런 지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한없이 정답에 가까워져 있었다. 아자젤은 아주 특별한 악마였으니까.
“그럼 너는 내게 뭘 해줄 거니?”
“재미있게 해드릴 게요.”
“재미?”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강하게 하는 건, 아자젤에게 아주 재밌는 일일 테니까요.”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죠.
지수의 눈은 그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지수의 붉은 눈과 당당한 태도에 아자젤은 웃음이 나왔다.
어떤 대가를 준다고 해도 아자젤을 움직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재화나 힘도 그녀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니까.
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즐거움’뿐이다.
지수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재밌네, 너.”
만약 신자운이 아니었다면 정말 지수를 탐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이 아이는 놀랍도록 곧게 미쳐 있었다.
“좋아, 만들어줄게.”
한낱 아폴론의 그림자였던 아바돈을 7대 악마로 만들었던 것처럼.
“누구보다 강한 악마로.”
그렇게 지수는 아자젤에게서 ‘악마’로서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까지 쭉.
“악마는 감정을 마력으로 바꿔. 분노, 질투, 슬픔. 여태 네가 만나온 악마들을 생각하면 쉽게 알 테지. 나는 좀 다르지만.”
“악마는 신격을 지니지 않는 건가요?”
“그게 아니야. 악마가 감정을 마력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게 신격의 힘이지.”
신들의 경우 신격을 이용해 다양한 힘을 발휘한다.
“표현 방식도 기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게 많아. 하지만 악마는 심플하지. 이렇게…… 쾅.”
순수한 파워.
악마란 그런 것이다.
“감정과 신격을 더해 몇 배나 되는 마력을 생산한다. 그것이 증가하다보면 악마도 자연스럽게 본인에게 맞는 전승스킬을 지녀. 나의 한계돌파처럼 효과는 지극히 심플한 게 대부분이지만.”
아자젤은 악마가 힘을 다루는 방식을 지수에게 가르쳤다.
미약한 신격을 ‘감정’으로 움직여 순수한 힘. 마력으로 치환하는 것.
그렇게 되면 적은 신격으로도 큰 마력을 생산하고.
자신이 다루는 감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신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강제로 넓어진다.
그렇게 되면 다룰 수 있는 신격의 양이 급격히 늘어난다.
다른 단련이나, 신을 흡수할 필요 없이 계속해서 신격이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모은 신격은 직접 사용할 수는 없으며 오직 담아두는 것뿐이다.
그것이 사용되는 경우는 감정으로 신격을 움직여 마력으로 변환시킬 때뿐.
신격이란 마력보다 상위의 힘이기에 작은 신격으로도 대량의 마력을 만들 수 있다.
‘말이야 쉽지 의지가 보통 강하지 않으면 불가능해.’
몸에 쌓인 신격을 감정으로 발생한 에너지와 합쳐 마력으로 변환시키는 건 보통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수는 천살성이었고, 혈천수라공을 익혔으며 보통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력을 지녔다. 마치 악마로 태어날 존재가 인간이 된 것처럼.
아자젤은 그 사실을 믿고 지수에게 악마의 힘을 가르쳤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되겠어.”
아자젤은 지수의 몸속에 있는 신격의 그릇이 넓어진 걸 확인했다.
하루가 다르게 신격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만큼 강한 감정을 지닌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너는 대체 마력을 무슨 감정을 이용해 바꾸는 거니? 신기하네. 보통 분노도 슬픔도 혹은 질투도 계기가 필요해야 다룰 수 있는 거잖아? 대체 어떤 감정을 쓰기에 아무 때나 팍팍 늘리는 거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지수에게 물었지만, 지수는 어쩐지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대답할 수 없어요. 그냥 언제나 가지고 있는 감정일 뿐이에요.”
슬그머니 대답을 회피하는 지수에게 아자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빤히 봐도 지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이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말하면 분명 아자젤이 폭소할 게 분명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