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201. 끝나지 않은 꿈(1)
“헉, 허억. 이런 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숲을 해치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뒤에서는 검은 물결처럼 무수한 몬스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으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른 국가에서 연락받은 거 없어?!”
“다들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아! 무조건 피하래, 절대 싸우지 말고!”
“씨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몬스터의 수준도 대단한데 숫자는 어마어마해서 멀리서 보면 마치 검은 물감이 퍼지는 것 같았다.
“따라잡힌다!”
“후방의 플레이어들은 마법이든 뭐든 공격 좀 하라고!”
비명처럼 소리쳤지만 공격을 하기 위해 나서는 이는 없었다.
함부로 힘을 뺐다간 괴물들에게 따라잡힐 게 분명했으니까.
“마석, 마석을 사용하라고 했잖아! 그럼 해변으로 귀환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걸 사용하면…….”
사실상 자신들이 맡기로 한 영역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낫잖아!”
“젠장, 그 말이 맞아.”
러시아 대표 플레이어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수린이 건넸던 마석을 들어올렸다.
여태 탐사한 영역을 포기한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아니었다.
“모두 내게……!”
쿠구구궁!!
모이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땅이 울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자 달려가던 플레이어들 몇이 넘어졌다.
“뭐, 뭐야?!”
다행인 점은 지진 때문인지 몰라도 달려들던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멈췄다는 점이다.
“───!”
“──! ──!”
놈들은 알아듣기 힘든 괴성을 지르며 허공을 향해 몸을 퍼덕이고 있었다.
“헉, 허억. 뭐지?”
한번 땅이 울린 후, 움직이지 않는 몬스터들의 모습에 러시아의 플레이어들은 의아해졌다.
묘하게 고요해진 주변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드드드.
미세한 진동이 조금씩 울렸다.
방금 전에 비하면 아주 미약했지만, 플레이어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크게 물러섰다.
“물러서, 모두 물러서! 아래에서 뭔가 온다!!”
“왜? 무슨 일인데!”
“씨발, 피하라면 피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은 억지로 잡아끌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있다. 이 대지의 아래에 소름끼치는 뭔가가 지금 움직이고 있었다.
콰과과광!!
“가──아아────!”
이벤트 때 베히모스라는 몬스터를 본 적이 있었다.
끊임없이 거대해지던 그 괴물은 그들이 보았던 몬스터 중에 가장 거대했으며 커다란 울음소리를 지닌 몬스터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눈앞에 나타난 ‘괴수’의 모습에 깔끔히 사라졌다.
“뭐야, 저게.”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아니 ‘신’이라고 불릴 법한 무언가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을 쫓아오던 괴물들, 제대로 된 의식조차 없어 보이는 그것들이 두려움을 느끼며 물러설 정도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다곤, 이라고 했던가.’
한국의 플레이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다곤이라 불리던 괴수와 만났다고.
물론 그런 한국 플레이어의 말을 믿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 괴물과 맞닥뜨리고 르뤼에에 도착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자신들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말을 지어냈다.
단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저것과 만나고, 살아서 이 땅을 밟았다는 건가?”
다곤은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괴수다.
한국 플레이어들이 묘사했던 것과 동일한 외형을 지닌 괴물이 나타나자 러시아의 플레이어들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플레이어들은 대체…….’
작은 나라에 비해 대단한 실력을 지닌 플레이어들이 많다는 건 제법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저런 괴수와 만나고 무사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쿠구궁!!
“우, 움직인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던 다곤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대지를 부수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갈라진 틈에서 분수처럼 바닷물이 치솟아 올랐다.
마치 경계를 나누는 모습 같았다.
저 괴물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설마…….’
어디로 봐도 다곤은 저 괴물들의 편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마치 다곤이 인간들을 지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의문은 다곤이 경계선을 만들며 멀리 사라질 때까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아슬아슬했다.
나는 멀리서 보이는 거대한 괴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은 어때?”
“힘……들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네요.”
“역시 대단해. 괜히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비꼬는 거 아니죠?”
새치름한 눈으로 노려보는 이수린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진심이다. 이렇게 빠르게 르뤼에 이본을 다룰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모리안님과 이드라님이 도와줬으니까요. 솔직히 아직 난해한 게 많아요.”
모리안은 마법에 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만큼 많은 지식을 지닌 신이었고, 이드라는 크툴루의 신이다. 둘의 지식을 합친다면 르뤼에 이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었다.
물론, 이수린 정도의 실력을 지닌 마법사에 한정해서.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이동시키는 게 전부인데 괜찮아요?”
“이거면 충분해. 일부 지역으로 갈 수 없어진 건 아쉽지만, 드림랜드에서 흘러나온 몬스터들이 플레이어와 접촉하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
차원문은 닫았지만, 흘러나온 몬스터의 수가 워낙 많았다.
죽인다면 니알라토텝의 재물이 될 놈들이다. 당연히 나로선 처리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답을 내놓은 건 놀랍게도 이드라였다.
“그냥 가둬두면 되지 않느냐?”
“가둬?”
“르뤼에 이본을 사용한다면 다곤을 조종할 수 있다. 놈을 이용한다면 이 정도의 섬은 반토막내는 것도 어렵지 않지.”
르뤼에의 크기는 한반도와 거의 동일한 크기다.
그런 섬을 두 동강 내는 건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신이나 마찬가지인 다곤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곧바로 스타스폰이 있는 지역을 찾았고, 운 좋게도 르뤼에 이본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근데 딥원들에 비하면 세력이 상당히 적네요.”
“아마 니알라토텝의 영향이 클 거야. 딥원들은 니알라토텝을 숭배하지만 스타스폰은 아니거든.”
나는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문어 비슷한 것을 발로 차며 말했다.
“그렇다 해도 무시할 수는 없지. 조금 있으면 다른 지역에 있는 놈들까지 몰려들 거야.”
“알겠어요.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거죠?”
“글쎄…….”
바르자이의 언월도는 탈환했다.
드림랜드에서 흘러넘치는 괴물을 차단하는 것도 성공했다.
사실상 니알라토텝의 계획 중 절반 이상이 아작 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녀석은 어떻게 나올까.
“답은 어렵지 않다.”
이드라는 니알라토텝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분노할 테지.”
오싹.
이드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늘한 느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지면 아래로 움직이는 신격이나,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샨타크 등, 크게 달라진 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조차 잊을 만큼 분노할 거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지 않나요?”
이수린 역시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녀 역시 무언가를 느낀 게 분명했다.
“한정되어 있고말고. 하지만 명령을 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다. 괴물과 플레이어가 죽는 걸 막았어도, 바르자이의 언월도를 들고 이동하던 딥원들을 쓰러트렸다 해도. 니알라토텝은 요그 소토스를 소환하려 할 게다.”
“어째서죠?”
“이젠 오기라고밖에 할 수 없군.”
팔짱을 낀 이드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불멸의 존재이자, 신조차 오시할 수 있는 절대자가 한낱 인간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럼 우리가 여태 해온 일은 무의미한 거잖아요.”
투덜거리는 이수린의 말에 이드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네?”
“분노란 이성을 흐리게 만들지. 인간의 감정에 취약한 니알라토텝에겐 치명적인 일이다. 완전해야 할 신에게 약점을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도 솔직히 불안하긴 했다.
아무리 나라도 외신과 정면에서 부딪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어쨌든 우리는 바르자이의 언월도만 사수하면 소환을 막을 수 있는 거 맞지?”
“물론이다. 니알라토텝도 이제 사활을 걸고 덤벼올 테니 한시라도 빨리…….”
거기까지 말하던 이드라의 눈이 커졌다.
마치 뭔가에 놀란 것처럼.
나는 그 이유가 대략 짐작됐다.
“의식이 시작됐나?”
“……그래.”
“재물은?”
“역시 딥원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했군. 거기에 붙잡은 스타스폰까지 있다.”
괴물도, 플레이어도 안 된다면 남은 건 르뤼에의 토착 종족뿐이다.
자신의 손과 발이 되는 종족을 희생시켜서라도 의식을 실행할 생각이었다.
“바르자이의 언월도가 없는데 성급한 거 아냐?”
“우리에게서 언제든 언월도를 탈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지도 모르지.”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 무모한데.”
“패배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니까. 도리어 그대가 도망칠 수 없는 전장이니 정면에서 싸움을 유도해 조금의 피해라도 주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래서 불멸자 놈들이랑 싸우는 게 싫어.”
당장 상황은 유리했다.
바르자이의 언월도까지 이쪽의 손에 있는 이상 니알라토텝을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놈이 지금까지 내 예상대로 움직인 것처럼, 나도 놈이 생각한 경우의 수로 움직였을 확률이 있었다.
“…….”
이드라의 표정은 어쩐지 어두웠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
한참을 고민하던 이드라는 눈을 찡그리며 니알라토텝이 있는 장소, 즉 요그 소토스를 소환하기 위한 제단이 있는 방향을 빤히 응시했다.
“왜 그래?”
“…….”
“이드라?”
드물게도 이드라는 내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불안해진 마음에 나는 그녀를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데? 뭔 일 났어?”
이드라는 대답이 없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경악이 담겨 있었다.
‘경악이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드라의 수많은 모습을 봤지만 녀석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그 얼굴에는 묘한 기쁨과 애달픔이 느껴졌으며 알 수 없는 혼란마저 느껴졌다.
‘까마귀의 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이리도 불편할 줄이야.’
분명 이드라는 허접한 능력치를 지니고 전승 스킬도 제한된 상태였지만, 신의 직감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드라가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얼굴을 하는 건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니알라토텝이 움직였다.”
묘한 침묵이 흐른 후, 이드라는 천천히 입을 뗐다.
“뭐?”
“바르자이의 언월도를 탈취하기 위해 한국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고 있구나.”
“하, 빠르기도 하네.”
대충 예상한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어차피 마석을 사용한다면 해변으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을 테니, 그곳에서 함께 니알라토텝을 기다렸다가 싸우면 되는 일이다.
“그럼 바로 형한테 마석을 사용하라고 연락해야겠네. 우리도 마석을 써서 바로 해변으로 이동할 테니 가까이 붙어.”
“알겠어요.”
이수린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짝 붙었다.
상당히 긴장했는지 얼굴이 굳어있었다.
반면 이드라는 여전히 제단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드라. 뭐해?”
“세한.”
내 부름에 이드라는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도 없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다.
“나를 믿느냐?”
그건 무척이나 갑작스런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도 비슷한 말은 들은 것 같았지만, 이렇게나 기운이 없지는 않았다.
마치 슬픔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이드라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을 잠시간 바라보던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믿어.”
1회차의 나라면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2회차를 겪으며 이드라에 대한 생각을 고쳤다.
외신의 존재는 여전히 두렵지만, 이드라가 내게 보이는 호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여전히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이드라는 언제나 거짓 없이 내게 다가왔으니까.
“그렇다면…….”
이드라는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금안에 나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니알라토텝이 바르자이의 언월도를 가져가는 걸 막지마라.”
“뭐라고요?!”
녀석의 말에 답한 건 내가 아니라 이수린이었다.
심지어 모리안조차 얼마나 놀랐는지 인형의 모습으로 변해 이드라의 코앞까지 날아갔다.
“꿈의 마녀! 대체 무슨 생각이냐. 그것이 넘어간다면 이 세상이 멸망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안다.”
“그럼 대체 왜!”
모리안의 질책에 이드라는 붉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건 대답할 수 없는 게 아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녀가 알고 있는 어떤 이유를,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녀석이 내게 보인 사상최초의 어리광이었다.
“……좋아.”
“세한?”
나는 가볍게 답했다.
이수린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무슨 생각이에요! 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긍정하다니요!”
“아바타의 부탁인데 신으로서 들어줘야지.”
“하, 대체 무슨 헛소리를…….”
분개한 목소리로 내 팔을 잡고 흔드는 이수린의 행동에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드라는 그런 나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보았다.
이것 역시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막지 말라며.”
“그건, 그렇게 말했지만…….”
“왜, 혹시 확실한 게 아닌 거냐?”
살짝 떠보듯 말하자 이드라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작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분명, 확실하다. ……확실하고 말고.”
“그럼 됐잖아.”
나는 대충 자리를 털고 앉았다.
그리고 창우에게 니알라토텝이 오면 얌전히 바르자이의 언월도를 건네라는 쪽지를 보냈다.
‘혹시 모르니 다른 쪽지도 하나 보내두고.’
이드라를 못 믿는 게 아니다.
만약을 위한 보험이었다.
“분명히 저곳에 있다.”
그런 내게 이드라는 다가와 옷깃을 잡았다.
“정말로…….”
고개를 숙이고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울먹거렸다.
어째서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단순히 니알라토텝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닌.”
그렇게 말하는 이드라의 눈동자는.
“진정한 해답이.”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