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198. 기어오는 혼돈(1)
쿠구구궁!!
공간이 부서져 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공간이 부서졌다.
“미친…….”
내게는 똑똑히 보였다.
허공에 열린 검은 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우글우글한 괴물들의 모습이.
“지, 징그러워.”
이수린이 그녀답지 않게 약한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십분 동감했다.
‘예상은 했지만 어떤 몬스터보다 흉측하게 생겼군.’
1회차와 2회차를 겪으며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해 온 나지만 드림랜드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이런 나조차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한 외형이었다.
‘설마 드림랜드로 통하는 문을 열 줄이야.’
드림랜드는 니알라토텝이 지배하는 세계 중 하나다.
마치 지옥과도 같은 행성으로, 그곳에는 상상도 못할 괴물들이 우글우글 모여살고 있다.
그곳에 존재하는 괴물에 비하면 르뤼에의 흉악한 딥원이나 스타스폰도 장난에 불과하다.
“당장 피해야 한다, 이곳에 있다가는 그대로 휩쓸리…….”
이드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녀석과 이수린의 손목을 잡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하늘에는 샨타크가 있었지만, 아래에서 쏟아지는 마물의 폭포에 휩쓸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콰콰콰콰!!
검은 구멍에서 흘러나온 마물들은 주변의 나무들을 짓이기고 숲에 숨어 있던 약한 몬스터들을 도륙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니알라토텝…….”
이드라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이수린이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죠? 우리들을 죽이기 위함인가요?”
방금 전까지 우리가 서 있던 대지에는 흉측한 몬스터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하나하나가 딥원들 이상의 몬스터였다. 가뜩이나 위험한 르뤼에에 더 위험한 괴물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우선 저 괴물들은 사냥꾼이자 제물이다.”
“사냥꾼이자 재물?”
“플레이어들을 죽이고, 그 자신들마저 죽여 숫자를 채우기 위함이지.”
괴물이라도 생명은 생명이다.
우리에겐 아닐지 몰라도 외우주의 신들에겐 똑같은 생명체이기에 구분할 필요가 없다.
물론 ‘플레이어’라는 고급 제물에는 미치지 못할지도 몰라도 이 정도 숫자라면 크게 의미가 없다.
“저 괴물들은 각지에 퍼져 있는 플레이어들과 싸우게 될 테지.”
“그리고 그 싸움에서 하나하나가 죽을 때마다 하나의 제물로 카운트된다는 건가요?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이수린이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제단은 저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아마 제단은 다른 곳에 새로이 마련해 두었을 게다. 뭣보다…….”
이드라의 눈이 자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르뤼에의 지면 아래에서 놈의 힘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니까.”
“섬 위가 아니라 밑바닥에 뭔가를 새겨놨다는 거냐?”
“그렇다. 섬이 바다위로 떠오르며 생긴 공백. 말하자면 섬의 뒷면에 아주 거대한 마법진을 새겨둔 것 같군.”
보통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점차 르뤼에의 대지, 아니 그보다 아래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니알라토텝의 신격에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신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태연히 벌일 수 있는 신.
“그렇게나 내가 죽이고 싶었나?”
그렇지 않다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니알라토텝이 강한 신이라도 외신.
이 정도의 기적을 행할 정도라면 녀석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게 분명했다.
녀석의 홈그라운드는 어디까지나 여기가 아닌 외우주이니까.
“아마 니알라토텝은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다.”
“뭐?”
“중원에서 그대에게 패하고 니알라토텝은 상당히 분했을 것이다. 단순히 진 것으로 모자라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까지 빼앗겼으니까.”
“그야 그랬겠지만, 그래도 심한데?”
“신에게 분하다는 감정은 이질적인 것이란다.”
이드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먼 시선을 보냈다.
그 눈은 괴성을 내지르는 몬스터들이 아닌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들은 이곳의 신들과 달리 인간의 형상도 아니지. 감정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여태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스스로 이런 모습이 되고자 했던 건 나뿐이었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구나.”
녀석의 말에 답한 건 모리안이었다.
그녀 역시 몰려드는 괴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런 말하면 다른 신들에게 질책을 받겠다만, 우리들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불멸의 존재이며 기적의 편린을 손에 쥔 존재일 뿐. 인간과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절망했을 때 절대자를 찾지 않는 것뿐이다.”
“절대자를 찾지 않는다?”
“그래, 절망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인간은 보다 상위의 존재를 찾는다. 그 역할을 여태 신이라는 존재가 해왔던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어떤 상황에 몰려도 보다 상위의 존재를 찾지 않는다. 그저 노여워할 뿐이야. 그러니 니알라토텝의 마음이 뭔지 이해가 되는구나.”
모리안의 말은 생각보다 의외였다.
그녀의 말처럼 이것을 다른 신에게 이야기했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모리안도 인간세계에 많은 간섭을 했던 존재 중 하나다. 이런 생각을 지녔기에 보다 인간을 친숙하게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흠흠, 그래, 그녀의 말이 옳다. 니알라토텝은 노여워하고 있는 것이다. 너에게 패하고 분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게지. 심지어 우리들은 그런 분노조차 익숙하지 못하니 조절을 못한 것이다.”
이드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튼 네크로노미콘부터 회수해야겠어. 저기에 있는 것 맞겠지?”
“맞아요.”
이수린의 말에 나는 문이 열린 공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곳에서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기세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우선 문을 닫아야 해.”
“물론이다. 서둘러라. 더 이상 쏟아져 나오다간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게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레이트 올드원?”
“그렇다.”
문을 닫는다면 기세가 약해진 지금이다.
마음 같아서는 문이 열리자마자 닫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모여 있던 마력이 그대로 폭발하여 르뤼에를 반으로 쪼개버렸을 것이다.
“꺅!”
나는 검은 날개를 펼치고 이드라와 이수린을 고쳐 안았다.
전속력으로 날아가기 위함이다.
‘팔이 뜯어질 수도 있으니.’
이드라야 크게 문제는 없겠지만 이수린은 인간이니 그럴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문을 닫아야만 했으니까.
“캬아아악!!”
말의 머리를 한 괴조가 달려들었다.
이드라가 말했던 샨타크다.
허접한 외형과 다르게 이놈들의 능력치는 경악스러울 정도다.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눈 깜박할 사이에 머리통을 뜯어 먹히리라.
나 역시 되도록 피하고 싶었던 상대였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후우.”
신격과 마력을 움직인다. 극성에 오른 혈천수라공의 힘이 전신으로 퍼져나가자 내 양눈이 적색과 금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 이건 또 뭐예요?!”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본 이수린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나는 달려드는 샨타크를 향해 오른 다리를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콰콰쾅!!
“뀌에에엑!”
발차기에 얻어맞은 샨타크는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지면에 우글우글 모여 있던 괴물들의 몸을 짓누르며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맙소사.”
수미터에 이르는 괴조가 단 한방에 지상으로 떨어져 침묵하자 이수린은 물론 모리안조차 경악한 얼굴이었다.
“신대의 생물을 단 한 방에 침묵시키다니. 아무리 플레이어의 능력치의 한계가 높아졌다고 해도 가능한 건가?”
“그게 내 아바……아니 나의 신의 힘이로다.”
거만한 얼굴로 말하는 이드라의 모습이 우스웠다.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피라냐처럼 달려드는 샨타크의 모습에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쾅쾅! 콰콰쾅!!
발차기 한 번에 한 마리.
비처럼 떨어지는 샨타크에 지상에 있던 몬스터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이수린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아래로 내려가서 다 쓸어버리면 되지 않아요?”
“말했다시피 저놈들을 죽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대로 죽여 버린다고 해도 저것들은 결국 제물로서 소임을 다할 테니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하, 적도 죽이지 말고 아군도 죽으면 안 된다니.”
하늘을 가득 채우던 샨타크들이 우수수 떨어지자 검은 공간의 열린 제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샨타크들의 사이로 생긴 조금의 틈.
세한은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가속시켰다.
“꺄아악!!”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세한은 작은 틈을 꿰뚫으며 제단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문 근처에 있던 딥원들은 그 충격만으로 찢어발겨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살면서 이렇게 비명을 지른 적은 처음인 거 같네요.”
내 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이수린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력으로 보호한 탓에 특별히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마도서는?”
“그건…….”
이수린은 마력을 방사해 주변에 있는 마법 물품을 탐사했다.
아까처럼 먼 거리를 탐지하는 게 아닌 주변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는 물품이 느껴졌다.
이수린은 손을 들고 방금 탐지한 마도서가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찾았어요. 바로 저쪽이에요.”
이수린이 가리킨 방향에는 수많은 딥원과 드림랜드의 괴물들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저중에 가지고 있는 놈이 있다는 건가?”
“그건 몰라요. 하지만 확실히 저 부근에 있는 건 확실해요.”
“좋아.”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쉬익!!
등 뒤에서 허수공간이 하나 열리며 한 자루의 검이 날아갔다.
비검 프라가라흐.
푸욱!!
옅은 실선이 그어지는 동시에 날아간 비검이 가장 앞에 있던 딥원의 몸을 꿰뚫었다.
바로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크게 회전하며 주변에서 달려드는 딥원과 몬스터들을 마구잡이로 뚫고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되도록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네크로노미콘을 회수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 세상에.”
프라가라흐의 힘을 보는 게 처음인 이수린은 경악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점차 좁혀지던 괴물들의 포위망이 단번에 넓어졌기 때문이다.
“저기다!”
이드라가 가리킨 곳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 잘린 팔이 하나 있었다.
아마 본디 네크로노미콘을 소유하고 있었던 딥원 제사장이었겠지. 하늘에서 떨어진 우리와 부딪치며 몸이 산산이 부서졌던 모양이다.
딱!
나는 프라가라흐의 방향을 틀며 손가락을 튕겼다.
잘린 팔의 위로 허수공간이 열렸고, 날아간 프라가라흐는 그것을 가볍게 꿰어 허수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스.”
허수공간에 들어갔던 프라가라흐는 내 옆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나는 프라가라흐에 구슬처럼 꿰인 팔을 천천히 뽑았다.
“……이런.”
확실히 잘린 팔은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문제는 녀석이 손에 쥔 건 마도서가 아니었다.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
드림랜드의 문을 여는 방법이 적혀있는 부분만을 찢어 손에 쥐고 있었다.
이수린이 느낀 마도서의 반응은 분면 이 페이지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
“이, 이건 네크로노미콘이 아니잖아요?!”
이수린 역시 그것을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녀도 깨달았을 테니까.
‘역시 내가 가장 처음 여기로 오리라 생각한 건가.’
그걸 알기에 네크로노미콘의 위치를 옮기고, 내가 착각할 수 있도록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를 몇 장 남겨두었다.
그리고 드림랜드의 문을 열어 나를 이곳에 고립시킨 것이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네크로노미콘의 위치는 어디 있다는 거죠?”
이수린이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네.”
“예?”
“일이 좀 커지긴 했지만, 예상한 대로라서.”
이수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가 이내 천천히 가늘어졌다.
잠시 당황했었지만 이내 그녀도 깨달은 것이다.
“아……. 그러네요. 지금 당신이 견제하는 건 단순히 네크로노미콘이 아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수린은 영리했다.
“내가 막고자 하는 건 요그소토스를 소환하는 것뿐이지. 아마 니알라토텝은 내가 이곳에 헛걸음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문을 닫는 일도 상당히 고역이고 당장 이곳을 떠나 다른 일을 대처할 수 없으니까.”
“그렇죠.”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이드라를 흘깃 보았다.
“정말 신들은 오만하네요. 당신만 어떻게 하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걸까요?”
“우리에게 인간이란 먼지와 같으니. 녀석은 세한을 제외하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다.
물론 드림랜드로 통하는 문을 열어버린 건 의외였지만.
“민아에게 바로 쪽지를 보내야겠군.”
“이제 움직이리라 생각하나 보네요.”
“내가 이곳에 고립된 상황이야말로 녀석이 원하던 바니까. 그럼 소환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그건 나를, 아니 인간을 아주 우습게 본 거다.
내가 가지 않더라도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바르자이의 언월도가 네크로노미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거다.”
네크로노미콘의 위치는 달랐지만 바르자이의 언월도의 위치는 그대로 있었다.
만약 위치가 달랐다고 해도 어릿광대가 찾아서 움직였을 테니 전혀 문제없었다.
“넌 실수한 거야.”
아마 이번 일이 끝나게 되면 녀석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