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196. 마도서를 찾아서(1)
대략 며칠 후, 해변에는 다른 나라에서 온 플레이어들로 가득 들어찼다.
우리가 해변 근처에 있는 촌락을 점령한 탓인지, 딥원들에게 피해를 입은 국가들의 수도 줄어든 탓에 큰 병력의 손실 없이 800명에 이르는 플레이어가 해변에 집결해 있었다.
“근데, 오빠. 유럽 연합의 플레이어들은 뭔가 기가 죽은 것 같지 않아?”
각국의 플레이어들을 둘러보던 민아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과 달리 유럽연합은 아주 반타작이 나버렸는데.
“세한. 오랜만이에요.”
“아, 유엔. 오랜만이군.”
중국 플레이어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유엔이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민아도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언니.”
“안녕, 민아야.”
이래저래 창천 길드는 디어사이드와 많이 얽혀 있다보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친화력이 좋은 유엔은 지수를 제외한 다른 길드원들과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어라, 지수 씨는 함께 안 왔나요?”
“너도 지수가 어렵냐?”
“……조금.”
어설프게 웃는 유엔은 말을 줄였다.
지수는 유엔과 내가 대화를 나눌 때면 이상할 정도로 저기압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수는 이번 일에 맞지 않아. 스타스폰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거든.”
“스타스폰?”
“르뤼에를 양분하는 종족중 하나지. 어차피 조금 후에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전달될 거야. 할 일이 많거든.”
“전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차분하게 답하는 유엔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알아. 늘 고마워하고 있어.”
현재 게임을 유지하게 되며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유엔은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많이 도운 플레이어였다.
현재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을 준 아레나와 경매장 등을 전부 창천길드에서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유엔은 그것에 어떤 불만도 가지지 않았고 언제나 나를 도와줬다.
거기에 알데바란과 싸울 때는 직접 길드원들을 이끌고 싸워주기도 했지.
“그, 그 정도는 별거 아닌 걸요.”
부끄러웠는지 유엔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이걸 지수 언니가 봤어야 하는데.”
그런 유엔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민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 뭐어?!”
“들키고 싶지 않으면 이번에 경매장에 올라오는 신상품 옷 좀 줘요. 그럼 여기서 일어난 모든 일에 함구할 테니까요.”
“……하아.”
영악하게 웃는 민아의 모습에 유엔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 둘의 대화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마치 지수를 괴물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지수가 이성의 접근에 예민하다고 해도 단순히 대화를 하는 정도로 뭐라 할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리 지수라고 해도 그냥 대화만 나누는 걸로는 해코지하지 않아.”
“하아……….”
유엔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
“르뤼에는 넓은 만큼 미리 구역을 나눠 탐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각 국가의 대표들은 천막에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르뤼에를 탐색하기에 앞서 구역을 나누기 위해서다.
“어떤 곳이 좋을 줄 알고 구역을 나눠? 그냥 다 같이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나?”
러시아의 대표 플레이어 이반이 현균의 말에 반박했다.
그런 생각을 한 건 그뿐이 아닌지 다른 플레이어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같은 구역을 탐사하면 분쟁이 생길 수도 있으니 구역을 나누는 편이 낫습니다. 어차피 르뤼에는 알려진 정보가 없어 좋은 광물이나 소재를 얻어도 순전이 운이니까요.”
“으음.”
“거기다 몰려다니면 습격당할 위험이 커집니다. 800명이나 되는 플레이어가 죄다 우르르 몰려다니면 너무 눈에 띄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곳에 있는 다른 괴물들도 섣불리 덤비지 않을 텐데?”
“아뇨. 한곳에 뭉쳐 있으면 딥원들이나 스타스폰들이 연합해서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뭉쳐 있는 800명만 죽이면 되니까요. 하지만 퍼져 있다면 그들도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을 테니 조심하게 될 겁니다.”
회의는 상당히 길어졌다.
어떻게 인원을 나눌지,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분배는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만 했으니까.
정리하자면 간단했다.
제비뽑기를 통해 순서대로 각 국가의 리더가 이동할 장소를 선택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소재는 해당 국가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했다.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현균은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점?”
“알다시피 이 섬에는 이미 한번 만난 적이 있을 터인 딥원들이 있죠. 그리고 그들과 대립하는 스타스폰이라는 종족이 있습니다.”
“음, 아바타인 플레이어들이라면 알고 있다.”
이미 신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플레이어들이 몇몇이 있었나 보다.
현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진 물건 중, 네크로노미콘과 르뤼에이본이라는 물건이 있습니다. 그것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지닌 부족과 마주치거나 정보를 얻는다면 꼭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달? 누구에게?”
“저예요.”
회의실 안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다.
시선이 집중된 장소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여성이 서있었다.
“……당신은 어디 소속의 플레이어입니까?”
“한국, 이긴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전 아가트람 소속의 이수린이라고 해요.”
“아, 아가트람!”
이곳에서 아가트람을 모르는 플레이어는 없다.
거기다 아가트람 최고, 아니 전 플레이어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이수린의 이름은 무척이나 유명했다.
‘웬만해선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설마 르뤼에에 와 있을 줄이야.
경악이 깃든 주변의 시선에 이수린은 옅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크로노미콘이나 르뤼에 이본은 무서운 마도서예요. 마주치면 죽을 테니 혹여나 객기를 부려 얻으려고 하지 마세요. 정보를 얻으면 무조건 제게 전달해 주셔야 해요.”
“어떻게 전달하면 됩니까?”
“쪽지 시스템은 장식이에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이수린의 말에 플레이어는 머쓱한 얼굴로 물러섰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욕심 부리지 마세요. 바로 전달해 주셔야 되요. 그리고 이거.”
이수린은 플레이어들에게 작은 종이와 마석을 나눠졌다.
마석은 무려 특급 마석이었으며 종이에는 기이한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탐사를 마치거나, 위험한 상황이면 마법진을 찢어서 바로 탈출하세요. 특급 마석과 한 세트입니다. 반경 50미터 이내의 플레이어들을 이 캠프로 전송시킬 수 있어요.”
“뭐, 뭐라고요?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하니까 이렇게 나눠준 거죠. 의심스러우면 사용하지 않으셔도 되요. 위험한 상황에서 그냥 죽거나 멍청하게 걸어서 돌아오면 되니까요.”
사용하든 말든 이수린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런 날카로운 태도가 플레이어들에겐 도리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받아둬서 나쁠 건 없지.’
설마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이수린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럼 대충 마무리 된 것 같군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주의사항을 잊지 마시고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하겠습니다.”
현균의 말과 함께 각 국가의 대표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현균은 여태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세한에게 말했다.
“이걸로 됐나?”
“예, 이렇게 경고했음에도 지키지 않는다면 그쪽 잘못이죠.”
“그래, 맞아. 너는 따로 움직일 거지?”
세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민아, 그리고 이수린은 따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아, 그리고 이드라도요.”
“네가 따로 움직인다고 하니 조금 걱정이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국의 플레이어들은 강하고…… 창우 씨는 남을 거니까요.”
창우가 있다면 적어도 딥원들에게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거기다 유럽 연합의 플레이어들도 저희와 함께하지 않습니까?”
연합의 리더 앤더슨은 한국과 함께하길 원했다.
남아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많았지만 부상자도 그만큼 많았고, 사기가 꺾인 터라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렇다보니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그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한국이 차지하고 남은 일부만을 받는 조건으로 계약하게 된 것이다.
“알겠다. 그럼 네가 부탁한 걸 찾는 대로 바로 연락을 줄게.”
“다시 말하지만 딥원들이든 스타스폰이든 이상한 물건을 든 녀석들과 마주치면 교전을 피해주세요. 바로 캠프로 도망치셔야 합니다.”
“알겠어.”
현균은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다.
뭣보다 그의 곁에는 박동권이 있었다.
그가 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돌아가려고 하리라.
***
“그럼 따로 움직인다고 한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천막에서 나오자마자 이수린이 물었다.
시크한 얼굴을 했지만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우선 북쪽으로 이틀 정도 가로질러 가야 해.”
“북쪽? 그곳에 르뤼에 이본이 있는 건가요?”
“아니, 이드라의 말로는 네크로노미콘이 그곳에 있거든.”
사실 이드라가 알려준 건 아니었다.
내가 1회차에 그곳에서 네크로미콘을 보았었지.
“……그렇게 주의를 주더니 네크로노미콘을 얻을 생각인가요?”
“얻으려는 건 아니야. 봉인시키려는 거지.”
“무시무시한 마도서라면서 그렇게 쉽게 봉인을 할 수 있어요?”
“그건 내가 할 게 아니야.”
1회차에선 수많은 마법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봉인했지만 지금은 이드라 한 명이면 떡을 쳤다.
이수린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조금 굳어 있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생각대로만 되면 순조롭네요.”
“그렇지. 하지만 순조롭게 풀릴 것 같지는 않군.”
“왜죠?”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단순한 느낌만은 아니다.
이곳에는 니알라토텝이 있었으니까.
‘딥원 대장 따위가 이븐가지의 분말을 들고 있던 것도 그런 연유겠지.’
아마 니알라토텝의 경고였으리라.
혹은 이제부터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는 도전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민아.”
“응? 뭐야, 오빠. 회의 끝났어?”
캠프로 돌아가자 돗자리 위에서 뒹굴거리던 민아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모습만 보면 마치 해변으로 피서 온 관광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대충 마무리됐다. 아마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탐사 시작할 거야.”
“우리는 따로 움직이는 거지?”
“그래, 다만 좀 달라.”
“다르다니?”
나는 이수린과 이드라, 그리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같이 움직이는 건 이렇게 셋이고, 너는 따로야.”
“……잠깐만. 뭔가 불안한데. 내가 생각한 그건 아니지?”
민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더불어 녀석의 어깨 위에서 얼굴은 잔뜩 구기고 있는 어릿광대의 옵저버가 눈에 들어왔다.
“그게 맞을 거다.”
이제부터 이민아는 딥원의 첩자로서 활동을 해야만 했다.
***
“그럼 모두 무운을 빕니다!”
현균의 외침과 함께 각국의 플레이어들이 제각각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르뤼에의 넓이는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였지만 자동차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플레이어들이 흩어져 수색한다면 2주 내에 중요한 지역들은 대부분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저기 오빠.”
떠나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민아가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정말 나 혼자 행동해야 되는 거야?”
“그래.”
내 단호한 말에 민아가 나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대체 자신에게 어찌 그럴 수 있냐는 눈이다.
“나 아직 미성년자거든? 혼자서 그런 곳에 방치해뒀다가 큰일나면 어쩌려고! 이거 아동학대야!”
“이미 비슷한 일은 여러 번 했잖아.”
“그것과 이건 다르지! 딥원들은 너무 징, 징그러운걸.”
여태까지 중 가장 격렬한 거절이었다.
그만큼 딥원들이 징그러운 거겠지.
이해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네크로미콘이 있는 곳을 가는 것보단 안전해. 그리고 네가 가는 곳에 어릿광대가 찾는 게 있을 거다.”
“어릿광대가 찾는…….”
“미스틸테인을 말하는 거야, 까마귀?”
민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어릿광대가 끼어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곳은 딥원들이 르뤼에에서 긁어모은 각종 자원을 모아두는 곳입니다. 미스틸테인은 물론 바르자이의 언월도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죠.”
“녀석들이 아자토스를 부르는 의식을 사용하는지 감시하려는 거군.”
역시 어릿광대는 예리했다.
“어차피 의식은 네크로노미콘이 있는 장소에서 할 겁니다. 재단이 그곳에 있으니 민아는 바르자이의 언월도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지만 지켜보면 됩니다.”
“그럴 바에는 바르자이의 함께 이동하는 게 낫지 않아?”
“저도 그렇게하고 싶지만…….”
나는 어릿광대의 아바타에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미 르뤼에는 니알라토텝의 지배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이동하게 되면 바로 눈치챌 겁니다.”
“민아는 괜찮고?”
“민아는 신격이 없죠. 혼자서 조용히 이동하면 니알라토텝이 결코 알아차릴 수 없을 겁니다.”
“지배하에 있는데 그걸 몰라?”
“아우터갓들이 인간을 먼지처럼 취급하는 걸 알지 않습니까. 녀석의 입장에서는 먼지가 좀 흩날리는 기분일 겁니다. 녀석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제게 집중되어 있겠죠.”
그렇게 말한 나는 조용히 이드라를 보았다.
이드라는 내 말에 긍정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