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193. 그림자를 조심하라(1)
사망자가 없다는 것에 놀란 나와는 달리, 현균은 침통한 얼굴이었다.
“고작 입구에 도착한 것에 불과한데 이런 피해라니. 우리가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군.”
이미 충분할 정도로 잘해냈지만 현균의 입장에서는 큰 피해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뭣보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여덟 명의 플레이어들이 문제였다.
“세한아.”
현균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땠다.
뭐든 내게 물어만 보는 자신이 한심했는지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저들이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예, 아마 일주일 정도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이드라에게 눈짓했다.
이드라는 르뤼에를 휙휙 돌아보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깨어나지 못한 플레이어들을 간호해 줄 수 있어?”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싱긋 웃는 이드라의 모습은 긴장이라곤 없어보였다.
그녀의 입장에서 르뤼에는 지방 별장 같은 느낌이니 당연한 일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환자들에게 향하는 녀석을 보며 현균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범한 여성이네. 디어사이드에는 정말 괴물들만 있는 것 같아.”
“그냥 상황파악을 잘 못하는 애라서 그렇습니다.”
“그, 그래?”
현균은 내 대답에 당황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디어사이드의 길드원을 고작 간호로 돌릴 수는 없지. 간호는 따로 담당을 정할 테니 그녀…….”
“이드라입니다.”
“아, 그래. 이드라 씨는 너와 함께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아뇨.”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쟤는 그냥 여기 있는 편이 낫습니다. 당장은 할 일도 없고, 르뤼에에 돌아다니다가는 홀라당 사라질 수도 있거든요.”
“으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알겠다.”
현균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깊이 묻지는 않았다.
‘그레이트 올드원을 보고 실신했다면 이드라의 도움 없이 깨어나기 힘들 테지.’
정신적으로 상당히 망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드라는 꿈과 환상의 마녀이니 그들이 보았단 다곤을 다른 것을 본 것으로 치환하여 정신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어떤 치유마법이나 엘릭서로도 불가능한 치료 방법이었다.
오직 이드라와 나만이 가능한 일.
하지만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고, 이드라는 당장 딥원이나 스타스폰과 싸울 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두고 가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좋아, 그럼 우선은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과 합류해야겠어. 근데 정말 모두 이 해변으로 오는 건 확실하겠지?”
“예, 확실합니다. 제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르뤼에의 입구는 이곳 하나거든요.”
물론 출구는 많다.
많아도 다곤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지만.
“하지만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확률도 있습니다.”
“어째서?”
“아셨다시피 이곳으로 오는 길은 험합니다. 저희는 금방 찾아왔지만 다른 이들은 아닐지도 모르죠.”
“하긴 그렇군.”
한국의 플레이어들은 암시안을 익혀 습격하는 딥원들을 별 피해 없이 막았다.
하지만 다른 국가의 사람들은 딥원을 우리처럼 빠르게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아서나 샹관 유엔에게 전달하기는 했다만.’
그 외에도 암시안에 관한 소문을 퍼트려두긴 했지만 얼마나 익혔을지는 모른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관리한 한국보다는 적은 건 분명했다.
‘그래도 오늘내일 안에 도착할 테지.’
현재 바다에서 플레이어들을 습격한 딥원들은 제대로 된 전투병도 아닌 일개 정찰병이나 심부름꾼. 현재 수준이 올라간 플레이어들이라면 조금 힘들기는 해도 극복해 올 수 있을 것이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다곤은 이드라가 재워둔 상태였다.
굳이 이드라의 냄새를 흘려 다곤을 꿰어낸 게 아니다. 다곤을 재워두지 않는다면 놈이 바다를 누비며 다른 나라의 배를 작살냈을 게 분명했다.
“우선 합류할 때까지는 이곳에서 정비를 하도록 하죠. 저는 섬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혼자?”
“아닙니다, 동행도 한 명 있죠.”
“……매번 너에게는 신세만 지는구나.”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우르르 몰려다니면 귀찮았다.
내게는 전부 짐에 불과하니까.
“이수린.”
“네? 어쩐 일이세요, 절 찾아오고. 여태 내버려두기에 까먹은 줄 알았거든요.”
언제나 그렇듯 이수린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다지 필요가 없었으니까.”
“참 직설적이기도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그 편을 좋아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이수린은 한숨을 쉬며 눈에 서린 독기를 지웠다.
애초에 그녀는 딱히 내가 싫어서 그런 시선을 보낸 게 아니다.
그냥 여태 가만히 있어야 했던 게 지루했을 뿐이다.
“그럼 이제 마도서 찾으러 가는 거죠?”
“음, 뭐 비슷하긴 한데. 당장은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죠?”
“우선 근방의 세력구도를 알아야지.”
이수린에게 줄 건 나인성교본이다.
그건 딥원이 아닌 스타스폰이 가진 마도서다.
지닌 바 힘은 네크로노미콘이 훨씬 강했지만 딥원들은 그것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기에 나인성교본을 가진 스타스폰들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사실상 섬의 세력구도는 고착화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두 종족이 같은 편인 건 아니었군요.”
“둘 다 미친놈들이라 보이는 건 다 물어뜯거든.”
“살벌하네요.”
“외계에서 온 놈들은 다 그렇지.”
“당신의 아바타도 말인가요?”
피식 웃으며 말하는 이수린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기야 이수린 정도면 이드라의 정체를 대략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 모리안이 계속 떠들었을 테니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지금은 아니라는 거네요.”
“그래.”
솔직히 후회 중이었다.
1회차의 내가 이드라를 좀 더 소중히 생각했다면.
녀석을 믿었다면 다른 결말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을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수린에게 손짓했다.
“아무튼 따라와. 마도서의 위치를 탐색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니까.”
“의외네요. 당신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는 건 몰라. 마법은 잼병이고.”
마력이 있어도 마법의 이치를 알지 못하니 사용할 수 없다.
거기다 르뤼에에서는 별자리의 힘, 간단히 말해 까마귀자리의 힘을 사용하기 힘들었다.
외냐면 이 르뤼에라는 장소가 외계에 가까운 곳이었으니까.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별자리의 힘을 끌어오기 힘든 것이다.
억지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신력 낭비가 너무 심했다.
신력은 최대한 아껴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었다.
“좋아요, 가죠. 날아갈 건가요?”
“아니 걸어갈 거야.”
날아가면 너무 눈에 띈다.
‘1회차와 달라진 점이 있는지 우선 파악해야 해.’
나는 이수린과 함께 해변을 천천히 벗어났다.
“처음 보는 식물들이네요.”
해변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빽빽한 나무들이 들어찬 숲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숲에는 기기괴괴한 식물들이 많았다. 소름이 끼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수린은 순수한 연구자의 눈으로 그것들을 관찰했다.
‘우선 근방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워낙 괴상한 숲이라 기억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갑자기 니알라토텝의 사주를 받은 딥원이나, 혹은 스타스폰이 습격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마력 반응은 없어?”
“예, 강한 마력파장을 발산하는 물건은 느껴지지 않아요.”
나도 마력에는 민감한 편이었지만 현 인류 최고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는 이수린에 비하면 부족했다. 나나 지수와 같이 특별한 플레이어에 비하면 부족한 아가트람이지만, 그들도 충분히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다.
실제로 이수린 정도의 마법사가 아니면 내가 더 마력에 민감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대략 3시간 정도 숲을 둘러보았지만 전부 기억에 있는 그대로였다.
‘내가 민감했나?’
아무래도 1회차와는 달라진 게 많아 르뤼에에도 뭔가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당장은 없는 것 같았다.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은 우선 귀환해요.”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이수린이 말했다.
확실히 조금 더 있다간 숲에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기괴한 숲에서 빠져나가기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좋아, 그럼 돌아…….”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요?”
“기척이 느껴져.”
내 말에 심드렁하던 이수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 괴물들인 가요?”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지.”
“네?”
“이 기척은 사람이야.”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르뤼에에 제일 먼저 도착한 건 우리가 아니었던 모양이군.”
거기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현재 쫓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
“헉, 헉헉!”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창백한 얼굴로 숲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상처투성이의 모습이었다.
“그, 그놈들이 쫓아오는 것 같아?”
“모르겠어. 어두워지지 않는 걸 보면 우리를 놓친 거 아닐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등 뒤에서는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괴성이 들렸다.
“젠장, 우리는 어둠을 부를 것도 없다는 건가?!”
“차라리 쫓아오는 놈들을 죽이는 건…….”
“미쳤어 몇 놈일 줄 알고!”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래야 지금 끌려간 동료들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거의 다 왔어. 조금만 가면 해변이야.’
‘다른 국가에서도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게 분명해.’
해변에 가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도망치고 있었다.
쿠웅.
“아, 아아아.”
하지만 그런 희망이 꺾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을 비웃는 것처럼 다른 딥원들보다 배는 거대한 딥원이 그들을 가로막았으니까.
“저, 전투병이라니.”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 근처에 매복하고 있었다는 건가?”
딥원들의 전투병은 덩치는 거대하고 강했지만 뒤에서 쫓아는 정찰병보다 발이 느렸다.
그러니 설령 딥원들과 싸우게 된다고 해도 정찰병을 생각했지 전투병과 싸우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인 모양이군.”
그들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저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이 와서 다른 동료들이라도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나.’
그들은 유럽 연합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영국이 빠지긴 했지만, 유럽연합은 상당히 뛰어난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 지역에서 선발된 300명의 인원은 자부심이 굉장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보다 한발 빨리 르뤼에를 향해 출발했다.
‘먼저 섬의 자원을 선점한다.’
신들의 말로는 이곳에는 대단한 자원들이 묻혀 있다고 했다.
그것을 자신들이 차지한다면 세계는 유럽연합의 손에 들어오게 되리라.
그런 부푼 꿈을 안고 르뤼에를 향하던 그들은 제대로 섬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
이곳에 오기 전 딥원들과 치열하게 싸웠고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런 어둠 속에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유럽연합은 세한이 퍼트린 ‘암시안’을 익히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찌라시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한국에서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퍼트린 헛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연합의 플레이어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딥원들의 가축이 되어 있었다.
“캬샤야야야.”
마치 비웃는 것처럼 전투병이 다가왔다.
거대한 손에 들린 할버트는 그들의 몸을 단번에 두 동강 내리라.
“으아아아아!”
공포를 이기지 못한 한 플레이어가 부러진 검을 휘두르며 전투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다른 네 명의 플레이어는 그가 곧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
딥원들은 하나같이 강했지만 전투병은 그중에서도 괴물이었다.
“샤악……!”
수직으로 떨어지는 할버트를 보며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동료가 곤죽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서걱.
‘응?’
뭔가 소리가 이상했다.
할버트가 인간을 반으로 쪼개는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산뜻했다.
“뭐, 뭐야.”
머리가 없었다.
물론 덤벼든 플레이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전투병의 몸에서 뿜어진 보라색 피를 온몸에 적시며 멍하니 서있었다.
“무사합니까?”
“누, 누구.”
갑자기 들려온 태평한 목소리에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시선을 돌렸다.
소리가 들려온 장소에는 한 플레이어가 긴장감 없는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 자가 방금 전투병을 죽인 건가?’
대체 어떻게?
마법?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전투병의 마법내성은 엄청난 수준이라 유럽 연합 최고의 마법사가 공격을 퍼부어도 잔 상처를 입을 뿐이었다.
“샤아아아! 샤아!”
“샤야야야!!”
멍하니 서서 뭐라 말도 못하는 그들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현재 쫓기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전투병은 하나였지만 정찰병들은 수십이었다.
아무리 전투병보다 약하다고 해도 수십이면 그들을 단숨에 죽일 수 있었다.
“빠, 빨리 피합시다! 어서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검은 사내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새까만 공간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저, 저건 대체.”
대체 저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깨달기도 전에 검은 공간에서는 무수한 창칼이 쏘아졌다.
“캬야야야야!!”
뒤에서 달려오던 딥원들은 사출된 무기에 난도질당하며 피를 흩뿌렸다.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딥원들이 마치 허수아비처럼 쓰러지는 모습에 다섯 명의 플레이어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흠, 끝났군.”
그가 손을 내리자 검은 공간들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거 참…….”
검은 사내는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당신들 참 운이 좋네요.”
이들이 뭐라 생각하든, 세한의 입장에서는 다곤을 피해 먼저 르뤼에에 들어온 이들이 신기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