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91. 외계(外界)의 도시(2)
“르, 르뤼에 이본? 확실히 그것이라면 거기에 있겠구나.”
“예, 스타스폰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드라가 알려준 것이냐?”
“비슷하죠.”
1회차를 겪으며 알게 된 정보였지만, 이드라에게서 들은 내용도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1회차에서는 르뤼에 이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네크로노미콘…… 알 아지프의 정체는 알지 못했다.
덕분에 죄다 죽을 뻔했지.
마법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르뤼에 이본을 사용해 희생한 덕에 요그 소토스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전도유망한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죄다 죽어버린 탓에 우리는 뼈아픈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그것을 나의 아바타에게 다루게 할 생각이로군?”
“물론 대책 없이 맡기려는 건 아닙니다. 그것을 다룰 방법도 익히고 갈 생각이죠.”
“이드라에게 배우게 할 생각이라면 용납할 수 없다. 그 신이 마도서를 다루는 법을 알 리가 없을 테니.”
이드라도 나름 마녀라는 명칭이 붙어있지만 마법과는 큰 연관이 없는 신이다.
반면 마법에 능한 모리안이라면 그것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여신님은 모릅니까?”
“나도 모른다. 외계의 문서를 내가 어찌 다루겠는가.”
“흐음, 그렇군요. 하지만 한 명 그런 마도서를 다룰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걸 다룰 수 있는 이가 있다고?”
“예.”
물론 그녀는 르뤼에에 가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는 가지 못한다. 그것은 그녀의 태생이 요정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마녀, 모르간. 그녀는 나인성교본의 원본을 본 적이 있는 마녀죠.”
“……일개 요정이 그것을 만졌다, 라는 말이냐?”
“그녀는 요정 중에서도 특별한 객체이니 영향이 적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왕조 시절 그것이 번안되는 과정을 지켜본 모양입니다. 당시에는 무척 어렸지만 똑똑히 기억한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1회차에서 회수된 르뤼에 이본은 아서의 손에 들어가, 모르간에게 맡겨졌다.
“호수의 마녀라면 호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이동할 수 있으니…… 황하로 마침 갔다고 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구나.”
당시는 신화의 시대였으니 모리안은 자신의 구역에서 한창 활동 중이었으리라.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모리안님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라면 대단한 마도서인 모양이네요.”
“대단하고말고. 네크로노미콘을 제외한다면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마도서중엔 최상의…… 아차.”
무심코 대답하던 모리안은 황급히 이수린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심드렁하던 눈은 별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조사대라는 거 지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나요?”
“물론이다. 하지만 익혀야 할 것이 있지. 두 가지나.”
하나는 어둠에 익숙해지는 암시안이며, 다른 하나는 르뤼에 이본을 다루는 방법이다.
“3주 안에 할 수 있겠나?”
싱긋 웃으며 말하자 이수린의 머리가 빠르게 끄덕여졌다.
“물론이죠. 어서 안내해 주세요. 마도서를 다루는 법을 익히고 싶거든요.”
좋아, 걸려들었군.
모리안은 본인의 입을 꿰매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1회차보다 한층 이수린을 소중히 하는 모양이야.’
좋은 징조다.
만약 이수린이 위험해지면 모리안의 도움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그럼 지금 바로 가겠나? 이 근처에 호수가 있다면 바로 갈 수 있는데.”
“예, 따라오세요.”
성큼성큼 앞서나가는 이수린이 모습은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이다.
언제나 쿨한 그녀지만 마법 앞에서는 다섯 살 어린아이 같았다.
‘그럼 이제 준비는 끝났나.’
아무 생각 없이 갔던 1회차와는 달리, 이번에는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준비한 상태였다.
남은 건, 니알라토텝이 르뤼에에서 무슨 수를 쓰느냐, 쓰지 않느냐의 차이.
‘절대 요그 소토스를 소환하게 두지 않겠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것이 소환된다면 뭘 하더라도 우리에게 남은 건 파멸뿐이었으니까.
***
“안녕하십니까! Tkbs의 기자 심형환입니다. 이제 곧 한국의 용감한 조사대원들이 한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그 과정을 전부 제가! 여러분께 생생히 전달드릴 테니 기대해 주십시오!”
형환은 현재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르뤼에로 출발하는 아침이 밝고, 부산의 항구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그는 들뜬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다른 기자들은 하나도 없다. 오직 나뿐이야!’
암시안을 익힌 기자가 설마 자신뿐이라니.
환상 속 몬스터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해 포기하고 있었건만 기적처럼 스킬을 익힐 수 있었다.
“독점, 독점 중계라니. 후후후.”
생방송은 무리지만 녹화방송만으로 충분했다.
아니, 애초에 녹화방송밖에 할 수 없었다. 위험지역인 만큼 끔찍한 장면이 나올 수도 있으며, 자신의 추한 모습을 그대로 내보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걸로 대박을 쳐서 국장가지 가는 거다. 힘내자 심영환!”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힘차게 외치는 그의 모습을, 민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얼굴로 보았다.
“긴장감이 전혀 없어 보이네. 저래도 괜찮은 거야?”
“벌벌 떨고 있는 것보단 낫지.”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민아는 자신의 곁에 있는 두 명의 사람을 보았다.
창우는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그 옆의 여성이었다.
‘이수린이라고 했나?’
세한이 말하길, 플레이어 중 최고의 마법실력을 지닌 이.
기린아인 백설이보다는 실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그건 백설이가 대단한 거지 이수린이 부족한 게 아니다.
뭣보다 아직 어린 백설이와 달리 이수린은 노련했고, 다양한 마법을 다룰 수 있었다.
‘다 좋은데, 왜 저렇게 흥분하고 있담.’
르뤼에가 있는 방향을 보는 이수린의 얼굴은 참으로 기묘했다.
겉만 보면 시크한 성인 여성이었지만, 묘하게 들뜬 눈빛이나 발그스레한 볼.
그리고 묘하게 거친 숨결은 민아를 흠칫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또 특이한 계집아이를 데려왔구나.”
이드라는 그런 이수린을 보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세한 근처에 있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빠져 있었다.
‘이 몸이 제일 정상이라니.’
인간과는 조금 다른 가치관을 지녔을 뿐, 하는 행동만 보면 자신이 가장 정상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오오, 저 여성은 누구지? 처음 보는 플레이어인데……”
“말이라도 걸어볼까?”
“아서라, 근처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보니 디어사이드 소속인 모양이야.”
이드라는 이드라대로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극한의 미를 구현하고 있었다.
꿈의 마녀인 그녀는 인간에게 모습을 보일 때 인간이 느끼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녀의 모습을 하곤 했다. 그건 타락하여 세한의 아바타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처럼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인간이 되어버린 지금도 대단한 미녀였다.
“그럼 이제 출발할 테니 모두 배에 승선해 주십시오!”
현균의 외침이 들렸다.
그의 곁에는 어두운 얼굴의 박동권이 눈에 띄었다.
세한은 그런 그를 보며 씩 웃었다.
‘혹시 내빼지 않을까 했는데, 그러진 않았군.’
만약 내뺐다면 죽이지는 않았어도 목의 족쇄를 한층 무겁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조사대장님께 묻습니다.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은 언제 합류하는 겁니까? 그리고 숫자는 대략 얼마쯤 되는 거죠?”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르뤼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신들의 말에 다르면 입구는 하나라 바다를 해치고 나가면 결국 만나게 된다더군요.”
“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저마다 출발한 대륙이 다르니, 도착하는 장소도 다를 것이다.
한반도와 동등한 크기인 르뤼에에서 어찌 같은 곳에 도착한단 말인가.
‘하긴 이런 논리가 무슨 필요가 있나.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신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플레이어들은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굉장히 크고 좋은 배네. 근데 그냥 평범한 배 아니야?”
“다른 금속으로 만들기에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조선소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금속으로 배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
뭣보다 일반적인 금속과 강도도 다르고 성질도 달라 배를 만들려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현균의 외침과 함께 뱃고동 소리가 울리며 대략 60명의 플레이어들을 실은 배가 부산항을 떠났다. 이제 배는 르뤼에가 있는 태평양 연안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세한 씨 이곳에서 대충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을까요?”
“주변에 몬스터도 있으니 대충 일주일쯤 걸릴 겁니다.”
“그렇군요.”
창우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렸다.
일주일이라, 사실 배를 타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세한의 말로는 심안을 지닌 창우는 딥원들의 천적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과연 그런 세한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긴장되었다.
“걱정할 것 없도다.”
그런 창우에게 말을 건 것은 이드라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어쩐지 그녀가 웃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니까 말이야. ‘우리’들은 그것을 모르고, 설령 안다 해도 외면할 테지. 하지만 나는 모든 인간이 빛나는 존재임을 안다.”
이드라는 그렇게 말하며 창우를 보았다.
심안을 지닌 것 외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드라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헌신적인 인간이로군.’
자신이 아닌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사는 남자.
만약 이 마음이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다면 대단한 일을 벌일 수도 있으리라.
예를 들자면…….
‘바르자이의 언월도를 사용한다던가?
눈을 뜰 수 없는 창우라면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드라는 어쩐지 그런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
항해가 시작된 후, 일주일간은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해상의 몬스터가 습격해 오긴 했지만 이곳의 플레이어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
큰 피해 없이 가볍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문제가 시작된 건, 8일째부터였다.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던 하늘은 이내 빛을 잃었다.
새까만 어둠의 장막이 배를 감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전조는 전혀 없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아, 모두 조심해!”
감이 좋은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꺼내들고 긴장하고 있었다.
어두워진 하늘에선 딱히 비가내리지도 않았으며 바다는 잔잔했다.
파도 하나 일어나지 않는 고요해진 바다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온다.”
세한은 이미 신격을 배에 퍼트려둔 상태였다.
배의 밑바닥에서 스믈스믈 기어 올라오는 괴이(怪異)를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챘다.
세한은 옆에 있는 현균에게 눈짓했다.
긴장한 얼굴을 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준비하세요! 적의 습격입니다!”
콰콰쾅!!
시퍼런 번개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밝아졌던 주위는 거짓말처럼 한층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가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사람들의 시야는 새까맣게 변해갔다.
“샤아아아, 샤아아.”
얼핏 들으면 바닷바람 소리와도 같은 울음소리였다.
배를 타고 기어 올라온 ‘그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플레이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딜!!”
어둠속에서도 플레이어는 능숙하게 심해어의 머리를 한 괴물, 딥원의 공격을 말끔히 피해냈다.
“샥?!”
설마 이런 어둠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공격을 피할 줄은 몰랐던 듯, 놈은 훤히 자신의 빈틈을 노출했다. 그 빈틈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플레이어가 화살을 쏘았다.
푸욱!
“샤아악! 샤악!!”
미끈거리는 거죽을 뚫고 화살이 박혔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화살은 놈의 거죽은 아주 조금 뚫고 박혔을 뿐이다.
“환상과 크게 다를 것 없습니다! 모두 긴장하지 말고 싸우세요!”
만약 환상 속에서 딥원과 싸워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능숙히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스킬을 사용해 갑판 위로 기어 올라오는 딥원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수가 너무 많아!’
배를 타고 올라오는 딥원의 수는 끔찍할 정도로 많았다.
마치 먹이를 포식하기 위해 나무를 기어 올라가는 개미와도 같았다.
“칫!”
제네시스의 간부 중 유일하게 배에 승선한 홍가은은 수세에 몰려있었다.
그녀가 다른 플레이어보다 강한 이라는 걸 알았는지 열이 넘는 딥원들이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샤아아아!”
기괴한 삼지창을 들고 걸어오는 딥원들을 보며 홍가은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위험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이 그를 도울 수는 없었다.
남을 돕다가는 그대로 목숨을 잃을 게 뻔했으니까.
아무리 홍가은이라고 해도 열이 넘는 딥원들을 홀로 상대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거기다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는 터라 딥원들의 위치를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었다.
만약 암시안을 익히지 않았다면, 검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쉬이익!!
절체절명의 순간, 죽음을 각오한 그때 어둠을 가르며 은빛의 궤적이 하늘을 갈랐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검광(劍光)이었다.
“샤악!!”
짙은 어둠은 방해 따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딥원들의 몸을 순식간에 절단했다.
그의 행동은 도리어 딥원들보다 여유롭고 매끄러웠다.
“괜찮습니까?”
“아, 네에.”
딱딱한 목소리에 홍가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안도가 되었다.
디어사이드의 ‘검귀(劍鬼)’라 불리는 송창우.
그의 앞에서는 어떤 어둠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