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181. 아흐리만(1)
주변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하늘에 있는 검은 구체, 아흐리만을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저건 상급 신격을 지닌 존재이니 일반적으로 정면에서 싸워선 승부가 되지 않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뭣보다 물리적인 피해로는 죽일 수 없지. 저건 기본적으로 정신체니까.”
인간의 선의와 악의가 뭉쳐진 존재이니 당연하다.
단지 선의보단 악의가 압도적으로 많아 저런 모습이 되었을 뿐이다.
“우선 방금 말했던 것처럼 크리스도 부를 테니까, 너와 크리스는 최대한 주변사람들을 대피시켜.”
“저는요?”
지수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와 신자운은 저것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야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자젤을 보았다.
아자젤은 하얀 양산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웃었다.
“물론, 나도 도와줄게.”
원래부터 기행을 일삼는 녀석인지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아자젤은 정말 저것을 부활하기 전에 막을 방법이 없었을까?’
계속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이젠 지난 일이다.
만약 아자젤이 저것을 부활시키기 위해 가만히 있었다면, 내가 몇 번을 물어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까마귀, 정작 너는 하는 게 없는 거 같은데?”
“나? 나는 바빠.”
단순히 저걸 처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건 말하자면 지구에서 자연 발생한 ‘몬스터’ 신격을 지닌 신화급 몬스터다.
그걸 단순히 낭비하는 건 너무 아깝잖아.
“회의를 해야 되거든.”
***
“이벤트 몬스터로 지정하라 이 말인 게냐?”
「그래.」
영상에 비친 세한의 말에 이드라는 턱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아흐리만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신.
가짜주제에 7대 악마를 집어삼킨 대재해.
이드라는 그것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너무 아쉬웠다.
「지금 네 채널로 영상을 방영할 수 있지?」
“충분히 가능하다.”
「거기에 보상을 준다면 상당수의 플레이어를 긁어모을 수 있을 거야. 아키넨, 어떻게 생각해?」
세한의 말에 이드라의 옆에 서있던 아키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미국 서버에 공지를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게릴라 이벤트라고 하면 될 거 같군요.”
“하지만 보상을 준다면 달성도가 필요하지 않느냐. 아무리 봐도 아흐리만이라는 짝퉁신을 평범한 플레이어들이 피해를 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만.”
주변의 플레이어들을 아무리 긁어모은다고 해도 애초에 도움이나 될지도 의문이다.
그런 이드라의 질문에 대답한 건 사원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김경수 팀장이었다.
“디펜스 퀘스트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정구역으로 오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을 퀘스트로 지정하는 것이죠. 사장님이 원하시는 것도 이것 아닙니까?”
「맞아.」
세한은 씩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저건 확실히 신격을 가진 신이지. 그것도 상격의 신격을 지녔어. 하지만 플레이어가 상대하기엔 오히려 알데바란보단 나아.」
“어째서지?”
“지성이 없으니까.”
저것은 오롯이 본능으로 행동하는 괴물이다.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전혀 소용이 없다.
“거기에 보험도 있고.”
“보험? 아하.”
이드라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알겠다. 우선 우리는 이벤트 퀘스트를 공지하도록 하마.”
「땡큐.」
자기 할 말만 하고 뚝, 통신을 끊어버리는 세한의 모습에 이드라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꺼진 화면을 한동안 응시했다.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다만 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다.
‘이런 걸보면 나도 신에서 한층 멀어진 건지도 모르겠어.’
옵저버에 비치는 아흐리만을 보며 이드라는 피식 웃었다.
신을 만들고자 했던 인간과, 인간에 가까운 신.
과연 어느 것이 더 우스운지 이드라는 알 수 없었다.
***
에릭은 미국에서 이름난 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
센티넬 학살자라는 이명이 붙은 그는, 자신의 실력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의 운영진이 물갈이 된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크게 상승되고, 센티넬의 격이 낮아진 탓에 센티넬을 죽이는 건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대단한 건 맞았지만, 이전처럼 만인이 우러러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기회야.’
에릭은 갑자기 들려온 알림에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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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퀘스트 : 샌프란시스코 수호
샌프란시스코 베이 근방에 나타난 인공신 ‘아흐리만’에게서 샌프란시스코를 수호하라.
무너진 건물 수 : 0개
사망한 일반인 :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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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퀘스트였다.
상대는 무려 신!
에릭은 신이라는 존재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지만, 엄청난 존재라는 건 추측할 수 있었다.
‘좋아, 내 상대로 부족함이 없어.’
「아흐리만이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방금 들은 바에 의하면 7대 악마까지 집어삼켰다는 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에릭은 갑자기 들려온 자신의 신의 목소리에 딱딱하게 굳었다.
7대 악마를 집어 삼켰다고?
에릭은 이미 이벤트 퀘스트에서 ‘색욕’의 악마의 계약자에게 홀려 조정당한 적이 있었다.
악마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사건이다.
그런데 그런 악마를 통째로 삼켰다고?
「까마귀에게는 빚이 있지. 너도 최선을 다해 싸워라. 내가 힘을 빌려주마.」
‘아니 빚은 또 뭔데?’
에릭의 신은 아폴론이었고, 아폴론과 세한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는 알지 못했다.
작은 참새 모양의 옵저버가 에릭의 어깨에 앉았다.
본인은 불사조라고 주장하지만 어디로 봐도 참새다.
「자, 가자!」
우렁차게 소리치는 아폴론의 외침에 에릭은 괜히 불안해졌다.
그런 에릭과는 별개로 샌프란시스코에는 하나둘 플레이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게임에 뜬 공지와 갓튜브의 영상을 통해 아흐리만의 등장을 목격한 신들이 아바타들을 이곳으로 유도했기 때문이다.
“저게 아흐리만인가?”
“움직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데?”
하늘에 떠 있는 불길한 구체는 고요했다.
만약 신들이 저것에 대해 경고를 하지 않았다면 멋대로 공격하는 플레이어도 있을지 모른다.
‘좋아, 계속 모이고 있어.’
세한은 까마귀를 통해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드는 플레이어들을 확인했다.
공지가 계시되고 세 시간.
대략 2천 명에 가까운 플레이어가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모였다.
‘대피 상태는…….’
크리스와 시리스의 능력으로 민간인들은 현재 최대한 멀리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아무리 강제로 대피를 시킨다고 해도 도시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최대한 아흐리만에서 멀리 떨어지는 게 한계였다.
그렇게 대략 30분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세한은 점차 아흐리만의 매끄러운 표현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제 시간이 됐군.”
즉, 아스모데우스의 신격을 소화하는 것에 끝냈다는 뜻이다.
쿵, 쿵!
둥근 구체에서 팔과 다리가 솟아나며 발을 내딛었다.
길쭉한 양팔은 하늘을 가렸고, 기괴한 형태의 머리가 솟아났다.
눈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붉은 무언가가 번쩍였고, 벌어진 입은 괴수의 그것처럼 끔찍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와우.”
신격만 따지면 상격에서도 중간 이상은 간다.
솔직히 어이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건 힘이 모두 ‘신격’을 흉내 내는데 몰려 있기에 그럴 뿐, 육신이나 힘은 진짜 신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위의 신’에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평범한 플레이어가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러니, 세한은 여러 가지 보험을 만들어 뒀다.
[강대한 적을 상대로 용맹히 맞서는 용사들에게 신들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경쾌한 알림과 함께 하늘에서 하얀 빛이 쏟아지며 플레이어들의 몸에 흡수됐다.
“오오, 갑자기 뭐지?!”
“히, 힘이 넘쳐흐른다!”
빛에 닿은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크게 능력치가 상승했고, 마력이 넘쳐흘렀다.
신들의 축복이라고 말했지만, 이건 이드라가 직접 퍼트린 ‘버프’다.
포인트를 사용하여 이곳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고, 신격이 깃드는 버프를 발생시킨 것이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포인트가 소모됐겠지만, 이드라가 그간 모은 포인트가 워낙 많아서 이정도로는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플레이어 강화는 이 정도면 됐고.’
거기에 나는 추가적으로 또 하나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이드라의 전승스킬을 사용하기 전, 세한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도 아무런 보험 없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불러 모아 싸우기로 한 건 아니다.
세한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조금씩 움직이는 천체를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아무래도 조금만 있으면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럼 나는 내가 할 일을 해보실까.”
천천히 움직이는 거신을 바라보며 나는 고요히 숨을 내쉬었다.
몸 안에 흐르는 마력과 마기를 천천히 전신으로 순환시켰다.
그리고 마기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신력을 움직였다.
왼쪽은 마기를, 오른쪽은 신력을.
양쪽 눈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워지며 세한의 눈이 한쪽은 붉게, 다른 쪽은 금색으로 빛났다.
‘자고로 싸움은 선빵필승인 법.’
세한의 옆에서 검은 공간이 열리며 한 자루의 검이 날아갔다.
비검 프라가라흐.
진천백의 손에 큰 손상을 입었었지만, 자체 회복능력과 시우의 재련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전과 달리 프라가라흐는 금빛의 신력이 칼날을 타고 흘렀다.
세한의 경지가 한층 발전했기 때문이다.
“가라.”
쉬이이익!!
하늘을 가르며 프라가라흐가 거신을 향해 돌진했다.
콰아아앙!!!
이전이 단순히 검상을 입히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말 그대로 대포와도 같았다.
거신의 가슴팍을 프라가라흐가 꿰뚫자, 거대한 구멍이 생기며 거신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헉! 뭐, 뭐야?!”
에릭은 방금 전 하늘을 가르고 지나가는 무언가를 보았다.
워낙 빨라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가 날아가 거신의 몸에 박혔고 거대한 구멍을 뚫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다!’
크게 휘청거리는 거신의 몸을 보며 에릭은 빠르게 달려가던 다리에 한층 힘을 넣었다.
몸에서 끌어오는 힘이 에릭에게 자신감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가자! 저놈을 막는 게 아니라 쓰러트리는 거다!!”
“우오오오!!”
에릭은 자신의 길드원을 이끌며 가장 앞에서 달렸다.
상대는 까마득히 거대한 존재였지만 자신의 장기인 화염 마법으로 불태운다면 순식간에 연소시킬 수 있으리라.
“아──아아아──”
공기가 진동하며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인간의 절규처럼 구슬픈 울음소리에 플레이어들은 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특별한 피해는 없었지만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소리다.
쿵, 쿠쿠쿠쿵!
아흐리만이 한걸음 앞으로 내딛자 발에 치인 건물이 장난감처럼 무너졌다.
마치 괴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몸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던 아흐리만의 몸은 단숨에 아물었다.
마치 애초에 그런 상처를 입지 않았던 것 같았다.
고오오오.
“오──아아──아아아!”
쿵쿵!
아흐리만은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양팔을 지면에 내디뎠다.
네발짐승처럼 자세를 잡은 아흐리만의 입이 뒤틀리며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벌어진 입속에서는 보라색으로 빛나는 광체가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위, 위험한 거 아냐?’
버프를 받아 차올랐던 자신감도 보라색 태양처럼 타오르는 광체를 보고 있자면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피, 피해!”
신나게 앞으로 질주하던 플레이어들도 빠른 속도로 집속되는 신력과 마력의 빛에 전율하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등을 돌렸다.
터지기 직전처럼 부풀어 오른 마력이 플레이어들에게 쏘아지려는 순간, 바로 앞에 양산을 든 소녀가 나타났다.
“후우.”
작게 심호흡을 한 소녀는 양산을 펼치며 앞으로 뻗었다.
‘미친년인가?’
누구라도 그 광경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콰아아아아!!
부풀어 오른 보라색 광체는 이윽고 아흐리만의 입에서 빛의 격류가 되어 쏘아졌다.
대지를 뒤집고 주변의 건물들을 파동만으로 무너트리며 다가오는 광체에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
하얀 소녀, 아자젤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양산을 휘둘렀다.
부족한 능력치? 상대보다 떨어지는 신격?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다.
빛의 격류는 아자젤이 든 양손의 움직임에 따라 틀어졌고, 지상이 아닌 하늘을 향해 휘어졌다.
콰아아아아!!
“휴.”
순식간에 하늘로 사라지는 광체를 보며 아자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매일 놀고먹는 게 그녀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실력은 아직 안 죽은 모양이다.
“저건 내가 막을 테니까, 너희는 열심히 공격이나 하렴.”
아자젤은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뒤에 서서 몸을 움츠리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살았으면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