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177화 (177/332)

# 177

177. 가치 있는 자(1)

“부르실 땐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합니다.”

백설이는 슬픈 눈으로 들고 있는 도넛 반쪽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다른 도넛들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오게요.”

“……미안. 다음에 가게 통째로 사줄게.”

슬프게 도넛을 응시하는 백설이를 보니 나까지 가슴이 아파졌다.

“이번엔 오래 있을 필요 없어, 얘만 치유해 주고 돌려보내 줄게.”

“정말입니까? 저번에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선 한참 중원에서 머물게 했잖아요. 거기다 저 까먹고 돌아가려고 했으면서.”

할 말이 없다.

진천백과 싸우고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을 얻은 탓에 백설이를 깜박 잊고 말았다.

자칫했으면 중원에서 놔두고 와서 몇 달을 더 중원에서 보냈을 수도 있다.

당시 지구와 중원은 시간대가 다른 상태였으니까.

“이번에는 정말이야. 얘만 치료하면 돼.”

“……알겠습니다.”

백설이는 마지못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크리스를 보았다.

“어머나, 오랜만에 만나네. 얘는 어떻게 데려왔어.”

“백설이는 내가 언제든 소환할 수 있다.”

“신기하네, 플레이어의 능력이니?”

“비슷해.”

상황이 해결된 걸 봤는지, 지수와 아자젤도 이곳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도 쭈뼛쭈뼛 역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지수의 도움으로 이미 이곳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아자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크리스를 보며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이 아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어?”

“죽기 직전이면 가능해.”

“근데 이건 죽었잖아?”

겉으로 보기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죽은 것이 아니다.

“가사 상태로 만든 거다. 이 검에 묻어 있는 독으로.”

“독?”

아자젤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검에는 얇은 막처럼 독이 발라져 있었다.

“이것에 찔리면 마치 죽은 것처럼 되어버리거든.”

이것은 내가 몽상의 던전 속에서 이민아를 통해 제조했던 독이다.

사람들을 가사상태로 만들었던 독.

‘민아의 연금술이 일취월장했다는 증거지.’

그것을 이곳에서 제현하기 위해, 도망치려는 민아를 붙잡고 강제로 연금술 스킬을 연마하게 했다. 꽤 오래전부터 민아를 들들 볶았음에도 완성된 건 최근이었다.

하지만 결코 느린 건 아니다.

도리어 엄청나게 빨랐다.

민아의 연금술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엘릭서를 만들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나는 막대한 양의 연금재료를 모으고 있었고, 르뤼에가 떠오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신대의 땅.

그곳은 위험한 만큼 현재 지구에서 구할 수 없는 연금재료도 존재했다,

“그래도 상처가 치명상인 건 변하지 않으니, 내버려두면 정말 죽어.”

“그건 그럴 거 같네.”

이미 바닥은 크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흥건했다.

이대로 몇 분만 있으면 정말로 죽을 것이다.

“백설아 부탁해.”

“알겠습니다.”

백설이의 뿔이 하얗게 빛나며, 천천히 마력이 모였다.

그리고 그 마력은 점차 몸을 타고 흐르며, 손에 작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계속해서 마법진이 겹치며 크리스의 몸을 감쌌다.

평범한 회복마법이 아니다.

신대의 마녀, 모르간이 직접 전수한 ‘회생 마법’이었다.

웅웅웅.

마력파장이 울리며 크리스의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검에 찔린 상처가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깔끔히 나았고, 창백했던 크리스의 안색에 온기가 돌아왔다.

“사람이 이렇게 낫기도 하는 군요, 신기해요.”

지수가 그것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그런 지수의 감탄이 황당할 뿐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낫는 게 신기하다고? 그게 네가 할 소리냐?’

이게 회생이라면 지수는 ‘부활’ 수준이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지수의 회복력은 천살성과 재생 스킬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나도 곧 재생스킬이 A급이 될 것 같은데 지수처럼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머리 부셔도 안 죽는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정말 불사신인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몸도 튼튼한데 불사신이라니.

이대로 신격만 얻는다면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린과 비슷한 수준이 된다면…….

“끝났습니다.”

백설이가 손을 떼자 말끔히 회복된 크리스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 숨이 멎었던 것 치고는 마치 잠이 든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해독도 했어?”

“네.”

“그럼 곧 깨어나겠네.”

그냥 기다려 줘도 상관없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나는 잠든 것처럼 고로롱 거리는 크리스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퍼억!

“아파!!”

딱밤을 맞은 크리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이마는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까지 쌔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엄살은.

“정신 차렸냐?”

“아, 어. 그게 나 정말 살았네?”

“그렇게 사인을 주는데 모를 리가 있나.”

대놓고 나를 보자마자 손에 낀 반지를 봤고, 사람들을 조종해서 나를 가리킬 때도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내밀었다.

어디로 봐도 반지에 뭔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행동이었다.

“누, 눈치 빠르네. 그래 까마귀라면 알아줄 거 같았어.”

크리스는 안도한 얼굴로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마가 여전히 아픈지 손바닥으로 슬슬 문지르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반지는 내가 죽지 않으면 뺄 수 없는 물건이야. 마틴이라는 녀석이 만든 물건이지. 마틴이 누구냐면…….”

“탐욕의 악마의 계약자잖니?”

“마, 맞아. 어떻게 아는 거야? 아니, 그보다 누구야?”

크리스는 아자젤을 올려다보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그것은 아자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자젤에게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백치미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냥 게으름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함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 계약자가 말해줬지.”

“아! 그, 그러면 당신이 그…… 나태의 악마…… 세요?”

“맞아, 아무튼 계속 말하렴.”

아자젤은 양산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크리스를 재촉했다.

무척 흥미로워하는 얼굴이다.

“바, 반지를 벗으려면 내가 죽는 방법밖에 없었어. 반지를 통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녀석들이 볼 수도 있어서 섣불리 너에게 접근할 수도 없었지.”

그래서 이런 행동을 한 거였나.

조금 어설프긴 했지만 녀석들은 확실히 속이긴 한 모양이다.

“역시 인간은 신기하네. 그렇다고 적이었던 까마귀가 자신을 살려주리라 생각한 거야?”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무모했지만 잘못된 방법은 아니다.

힘이 없는 크리스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나만 더 묻자.”

“뭐, 뭔데?”

“너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분명 내가 죽였을 텐데?”

크리스는 내 질문에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결심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와 동생은 하나의 특성이 있어. 쌍둥이라서 생긴 건지도 모르겠는데. 둘 중 한명이 죽으면 다른 하나가 살릴 수 있지.”

“네 동생이 죽은 너를 살린 거군.”

“맞아.”

어떤 의미론 불사신이나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해괴한 특성을 가진 녀석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럼 네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놈들에게 붙잡혀 있어.”

크리스는 그렇게 말한 후, 나를 향해 간절한 어조로 빌었다.

“부탁해. 동생을 구해줘. 그렇게 해준다면 뭐든지 할게!”

“뭐든지?”

근데 뭐든지라고 말해도 이 녀석 좀 꺼림직 했다.

좋은 스킬을 지녔지만 내가 다루기에는 좀…….

“자, 잠깐만.”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크리스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녀석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나 알아! 알려줄게. 그리고 동생만 살려준다면 난 죽어도 상관없어!”

“죽어도 동생이 살려주잖아.”

“그, 그래도!”

정말 다급해 보이는 크리스의 모습에 얼마나 상황이 급박한지 알 수 있었다.

이전에 나를 한번 죽이려고 했던 녀석이었지만 그건 아카터스의 의뢰를 통해 악마에게 직접 전달받은 내용일 거다.

계약자인 크리스가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건 안다.

그래도 영 땡기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징징거리는 것도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 그때 내가 너를…… 읍!”

“너 그거 말하면 죽어. 정말 형체도 못 남기고 죽을 걸?”

계속해서 떠들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까지 말하려던 크리스의 입을 막았다.

나는 힐끗 지수를 보았다.

다행히 지수는 크리스의 말을 제대로 못들은 것 같았다.

크리스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덕이다.

만약 크리스의 말을 들었다면 크리스의 몸은 이미 뭉개진 만두가 되었을 것이다.

크리스도 지수의 소문을 들었는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좀 바보 같고 단순한 녀석이긴 하지만, 이런 놈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악마의 계약자이니 후환을 생각해 죽였던 거지만, 이런 식으로 옭아매게 된다면 제법 쓸 만한 말이 될 수도 있었다.

“7대 악마의 계약자를 수족으로 부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

“그, 그럼!”

“도와주마. 대신…… 알고 있겠지?”

“무, 물론이야!”

고개를 위아래로 빠르게 끄덕인 크리스는 숨을 몇 번 고른 후,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아자젤이 끼어들었다.

“잠깐만. 이거 난감하네.”

“무슨 일인데?”

“내 계약자가 조금 무모한 짓을 해서 말이야.”

아자젤은 그녀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쫓기는 중인 모양이네. 당분간 연락을 받기는 힘들 거 같아.”

“위험한 상황인가?”

“아마도. 도와줄래?”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아자젤은 최고의 손님이다. 빚을 만들 기회가 있으면 최대한 만들어두는 게 좋다.

‘그래야 나중에 마계 연회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솔직히 아자젤과는 마계 연회에서나 얽히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빨리 아자젤과 연이 닿아버렸다.

조금 성가신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았다.

당장 르뤼에도 문제였으니까.

그런 내 모습을 본 크리스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랑 대우가 틀리잖아.”

“급이 너랑 같냐?”

무슨 당연한 말을 하는 건지.

크리스의 어깨가 축 늘어지며 입술이 비쭉 튀어나왔다.

“신자운이 있는 곳은 어디지?”

“샌프란시스코 베이야. 서둘러.”

아자젤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곧, 다른 악마의 계약자가 도착할 것 같으니까.”

***

“저기다!”

일개 지부 정도로 생각했지만 머무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하수인은 이미 수십 명을 죽였고, 계약자와도 두세 번 마주쳤다.

아무리 신자운이라도 이쯤 되니 조금 지칠 정도였다.

“……왜.”

그런 신자운의 뒤를 조용히 쫓아오던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신자운이 가져다준 물을 마시고 겨우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갑자기 나타난 신자운에게 처음에는 경계했던 그녀였지만 다른 계약자나 하수인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아군으로 판단한 것 같았다.

단지 그녀, 시리스는 작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는 건가요? 당신, 악마의 계약자잖아요.”

그녀도 물론 악마의 계약자다.

그것도 색욕의 악마의 계약자. 하지만 같은 악마의 계약자라고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도리어 좋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당장 탐욕과 분노의 악마만 해도 아자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의 계약자인 신자운을 당장 죽이고 싶어 할 만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신자운은 현재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래가 아니에요, 왜 저를 도와서 위험을 무릅쓴 거죠? 당신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데.”

왜 도왔냐고 오히려 질책하는 시리스의 모습에 신자운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마음이다.”

“……네?”

“그냥 찜찜해서 그랬을 뿐이야. 다른 이유는 없다.”

“겨우 그거로?”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어떤 의미로는 신자운은 아자젤과 닮아 있었다.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그래도!”

“쉿.”

신자운은 시리스의 입을 막았다.

대화를 나누기엔 주변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다른 놈이 온 것 같군.”

“예?”

“너나 나와 같은 7대 악마의 계약자 말이다.”

비탄의 가면은 착용자의 감정을 마력으로 변환시킨다.

그리고 주변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느끼고 정보를 전달했다.

아직 제대로 다룰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느껴지는 강렬한 분노는 평범한 계약자의 것이 아니다.

‘강해.’

솔직히 이길 수 있을지 모를 정도다.

하지만 지면 죽음뿐이니 죽을 생각은 없었다.

자운은 눈을 감고 다가오는 감정을 느꼈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 쏘아지는 날카로운 분노.

그것이 느껴지는 곳은 그다지 먼 곳이 아니었다.

‘바로 위!’

자운은 시리스의 몸을 안고 크게 뒤로 뛰었다.

그와 동시에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폭음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