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 악마의 청탁(3)
샌프란시스코 유니언 스퀘어.
아자젤과 나, 그리고 지수는 막 기차역에 나와서 이동하는 조로아스터교 신도를 바라보았다.
“거래장소는 샌프란시스코 베이인 모양이야.”
“금문교를 지나기 전에 있는 장소인가요?”
“그래, 맞아.”
간단히 말해서 수많은 배가 정박하는 선착장과도 같은 곳이다.
보통 그런 장소는 몬스터에게 점령당해 제구실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주변에 다른 플레이어나 사람이 없는 곳이라는 소리다.
“꼭 악마의 계약자나 하수인과 같은 놈들은 그런 곳에 본거지를 삼더라.”
“그건 잘 모르겠어. 그곳에 있는 건 ‘분노’와 계약한 계약자 하나뿐이라고 하니, 다른 곳이 있을 수도 있지.”
“신자운에게 연락이 왔나?”
아자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와서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지만 꽤나 열심히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우리도 그쪽으로 이동해야겠군.”
우선 조로아스터교와 악마의 계약자들이 하는 짓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본거지는 그다음에 추적하면 될 거다.
‘미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으니 까마귀를 날려도 찾기 힘들 거야.’
우선 뿌려두긴 하겠지만 솔직히 힘들다.
우선 센프란시스코를 한정에서 조금씩 까마귀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잠깐.’
까마귀를 샌프란시스코 상공으로 날리기 무섭게, 기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아니 수백 명의 남성들이 역을 둘러싸고 다가오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지수는 아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즉, 다가오는 것들은 우리에게 악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못했다는 게 맞겠지.’
나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색욕의 계약자인 것 같다.”
이미 한번 보았던 것처럼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이곳을 향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의식을 잃었으니 지수가 악의를 감지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내 말에 아자젤이 처음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아, 그쪽은 좀 싫은데.”
“왜?”
“걔는 좀 거북해. 만날 때마다 나한테 친한 척 말을 걸어오거든.”
아무래도 마라 파피야스는 아자젤에게 지대한 관심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아름다운 것에는 사족을 못 쓰는 성격이라는 소문은 들었다.
‘아무튼…….’
나는 까마귀의 눈으로 유니온 스퀘어 주변을 살폈다.
‘조금 허술한데?’
몰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손쉽게 익숙한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크리스 브라이트가 시민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쟤 어떻게 산 거야?”
“네?”
“분명 내가 이벤트 퀘스트에서 죽였던 녀석이 살아 있잖아. 확실히 죽었던 것도 확인했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워낙 기상천외한 스킬이나 특성이 있으므로 넘어가기로 했다.
“꺄, 꺄아악!! 저게 뭐야!”
역으로 몰려드는 수수께끼의 무리들을 발견했는지, 방금 우리와 함께 열차를 타고 왔던 승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역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는 조로아스터교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한지수, 너는 이곳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을 맡아.”
“오빠는요?”
“난 이 사태의 주번을 처리하고 올게.”
내 등 뒤에서 새까만 날개가 펼쳐졌다.
저 수많은 인파를 뚫고 크리스에게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알겠어요.”
“하암.”
반면 아자젤은 관심없다는 얼굴로 하품하고 있었다.
마치 어서 사건을 해결하라는 태도다.
물론 이건 그녀의 성격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고, 아자젤은 도우면 도울수록 반드시 보답을 하는 성격이다. 그녀는 빚지는 걸 가장 싫어하니까.
그러니 이런 사건이 생기면 생길수록 내게는 이득이다.
콰창!!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건물의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내가 날아간 탓에 아래에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근데 크리스 브라이트는 내가 날아다닐 수 있다는 걸 알 텐데?’
또한 까마귀의 눈을 통해 주변을 살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다 보이는 곳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다니.
‘뭔가 이상해.’
크리스 브라이트는 멍청하긴 했지만, 아무리 멍청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뭔가 함정이 있나 싶어서 신격을 이용해 반경 1km를 감지해보았지만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이 근방에 있는 악마의 계약자는 크리스 한 명이다.
“그워어어!”
“그아아아!!”
아래에서는 마치 좀비와도 같이 몰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크리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좀 더 세세하게 조종할 수 있을 테지만, 워낙 수가 많은 탓에 단순한 인형이 된 것 같았다.
하긴, 어떻게 보면 진짜 좀비이기도 하다.
색욕의 악마는 유혹한 상대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확산할 수 있고, 저런 좀비와도 같은 이들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즉, 저 인간들에게 접촉하면 남성일 경우 좀비처럼 크리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강제력은 피안화의 길드장, 이아영이 가진 브리싱가멘에 미치지 못했지만, 확산속도나 범위로만 따지면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쉬이익!!
“꺅?!”
나는 크리스를 향해 날아가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크리스 머리 위에서 검은 공간이 열리며 날카로운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우선 가볍게 견제할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기에 크리스의 바로 앞에 떨어진 검이 박혔고, 크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지나치게 무방비한 모습이다.
크리스는 황급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나를 발견하고는 어째서인지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이거 봐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도했다는 얼굴을 지운 그녀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까마귀를 잡아! 빨리!”
물론 그런다고 좀비 같은 인간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내게 손끝하나 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설령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후우.”
나는 날개를 접고 지상으로 착지했다.
개미때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력을 집중했다.
혈천수라공의 보법을 응용하여, 천천히 지상에 발을 굴렀다.
쿠웅.
묵직한 진동이 대지를 강타했다.
내 발에서 시작된 진동은 파형이 되어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도로와 거리가 물결처럼 들썩이며 흔들렸다.
“그어아아아!”
다가오던 인간들은 지진과도 같은 흔들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다리가 꼬이며 넘어졌고, 넘어진 이들을 무시하고 걸어가던 다른 이들도 하나둘 넘어지기 시작했다.
진동이 멈췄을 때, 서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였다.
“흐, 흐으으.”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나를 복잡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그, 그걸 내가 말해줄 거 같아?”
크리스는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곤 힐끗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에는 붉은색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 나는 씨앗을 가져가야 해. 아니면 너나 아자젤의 계약자를 죽여야 한단 말이야!”
“왜지? 너도 다른 두 계약자와 같은 편인가?”
조용히 묻자, 크리스가 작게 실소했다.
“같은 편? 설마.”
그렇게 말한 크리스는 나를 새치름하게 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바로, 간절함을.
“과연. 다른 것은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내가 너에게 말해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래.”
나는 인벤토리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냈다.
어떤 독이 발라져 있는 검이다.
“그렇다면 죽이는 수밖에.”
“……!”
크리스는 검을 치켜든 나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법 애처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렀다.
“시리스…….”
검에 찔린 크리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뒤로 넘어졌다.
방금 전까지 반짝이던 눈동자가 점차 빛을 잃어갔다.
파각!
“…….”
크리스의 숨이 끊어지자, 녀석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붉은색 반지가 부서졌다.
“역시 그랬나.”
부서진 반지에서는 옅은 마력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마력에서는 짙은 마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아무리 ‘독’을 발랐다고 해도 정말로 숨이 끊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의 내게는 엘릭서가 없으니까.
그러니 엘릭서만큼 영험한 존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백설아.”
“?”
도넛을 먹고 있던 백설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
“흥, 죽었나.”
신자운은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했다.
현재 신자운이 있는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바로 조로아스터교와 곧 거래가 있을 장소였다.
“씨앗을 빼앗아 이쪽이 우위를 점한다는 건 이미 틀려먹었군. 이젠 정면에서 구슬리는 방법뿐인가.”
“크리스년은 아무것도 못하고 죽은 겁니까?”
“그 멍청한 년이 그럼 그렇지. 하지만 까마귀의 힘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정면에서 싸워서는 결코 이길 수 없겠어.”
탐욕의 악마와 계약한 남자.
마틴의 말에 주변의 사내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강한 마틴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칭하는 까마귀가 그저 두려울 뿐이다.
‘과연, 아자젤이 김세한을 데리고 온 건가.’
또한 저들에게 이용당한 누군가가 그에게 당해서 죽은 모양이다.
신자운은 그것을 당연하다 생각했다.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플레이어중 어느 누가 김세한을 해할 수 있겠는가.
아자젤이 말하길, 이미 그는 능력치만 제외하면 초월자에 발을 디딜 수 있을 정도의 신격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제 겨우 입문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신자운에게는 까마득한 경지였다.
‘나는 그동안 대체 뭘 한 건지.’
나름 포인트도 쌓고 능력치도 제법 올렸다고 생각했지만 세한에게는 택도 없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바로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좋아, 준비해라.”
마틴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신자운도 그를 뒤쫓기 위해 조용히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아, 그렇지.”
그때, 마틴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년의 동생도 이제 쓸모가 없으니 죽여. 얼굴은 반반하니 가지고 놀고 죽이고 싶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저, 정말입니까? 알겠습니다!”
마틴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반면 나머지 사내들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크, 그년 보고만 있느라 아까웠는데 잘 됐어.”
“마틴 님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으니, 그대로 죽여 버리나 싶었다니까.”
사내들은 그렇게 말하며 킬킬 웃었다.
그리곤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년의 동생?’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신자운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자다.
그러니 무시하고 마틴의 뒤를 계속해서 쫓으며 아자젤에게 상황을 전달하는 게 옳았다.
“……병신.”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자운은 피식 웃으며 어리석은 자신을 욕했다.
그리곤 방금 전에 우르르 몰려갔던 사내들의 뒤를 쫓았다.
저벅, 저벅.
글라스톤 베이의 선착장은 몬스터들이 휩쓸고 간 탓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사내들은 만신창이가 된 건물을 개조하여, 자신들의 아지트로 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처음에는 갑자기 악마의 계약자인가 하는 놈이 나타나서 어떻게 되나 했다니까.”
“하지만 이렇게 다 잘 풀렸으니 얼마나 좋아.”
“그래, 그래.”
사내들은 그런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며 걸어갔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 양쪽에는 철창이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설마, 인신매매를 하는 조직이었나?’
마치 이전에 자신이 속해있던 암천 길드와 비슷했다.
물론 암천 길드의 경우에는 비탄의 가면의 힘을 채우기 위해서였지만 이놈들은 말 그대로 사람을 사고팔고 있었다.
‘플레이어도 있군.’
신자운은 이들이 생각보다 큰 조직과 얽혀있음을 깨달았다.
그도 뒷세계에 있던 인간이다.
인간을 사고파는 건 작은 조직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더 큰 조직이 뒤에 있는 게 분명했다.
유력한 건, 탐욕의 계약자 마틴과.
분노의 계약자 에단.
신자운은 그 둘의 이름을 이미 아자젤에게 전달한 상태였다.
“이봐, 자냐?”
사내들이 발을 멈춘 곳은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 있는 철창이었다.
다른 철창과 달리 몇 개나 되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고, 철창의 재질도 평범한 지구의 금속이 아니었다.
플레이어,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플레이어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철창이었다.
“어이쿠, 이거 죽으면 안 되는데? 누구 물 좀 가져와라!”
그의 외침과 함께 몇몇 사내들이 물을 가지러가며 빈틈이 생겼다.
신자운은 그 틈으로 철창 안에 쓰러져 있는 이가 누구인지 볼 수 있었다.
이제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옷을 벗기는 건 정신 차리기 전에 하는 게 좋겠지?”
사내들은 낄낄 웃으며 철창을 열고 쓰러진 여성에게 다가갔다.
여성은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지 반쯤 실신해 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 지켜볼 필요는 없겠군.”
상황은 이해했다.
그리고 이곳에 특별한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벅.
신자운은 숨어 있던 어둠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엉? 저거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천천히 철창으로 걸어오는 신자운을 보며 여성의 옷을 벗기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동양인 놈이잖아? 네놈 뭐냐.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알 필요 없다.”
신자운은 손에 낀 장갑을 천천히 당기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어차피 다 죽을 테니까.”
비탄의 가면에서 마력이 샘솟으며 신자운의 전신으로 퍼졌다.
그는 세한을 괴물이라 표현하며 늘 자신을 비하했지만, 그 역시 결코 평범한 플레이어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