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투 플레이어-175화 (175/332)

# 175

175. 악마의 청탁(2)

기차 앞에서 들려온 비명소리에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지수가 다른 악마의 계약자들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조로아스터교의 인물들과 접촉할 생각이었다.

아마 그쪽에도 이미 악마의 계약자나 하수인이 습격하고 있을 것이다.

어둠속에서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성가시게 저항을…… 음?”

조로아스터교의 인물들이 모여 있는 뒤 칸으로 향하던 도중 악마의 하수인과 마주쳤다.

동양인들은 원래 머리가 검다 보니 악마와 관련되어 있어도 보통 그렇게 티가 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서양인들의 경우엔 악마와 관련된 플레이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뭐야? 여긴 들어갈 수 없다. 목숨이 아깝다면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가라.”

대략 2미터에 가까운 신장을 가진 녀석이라 상당히 위압감을 지닌 외모였다.

그런 놈의 뒤에는 서넛의 동료들이 나를 보며 낄낄 웃고 있었다.

“뭐야, 저 동양인은? 괜히 시끄럽게 될 수도 있으니 죽이는 게 낫지 않아?”

“음, 역시 그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자기들끼리 그런 대화를 나누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괜히 이런 곳까지 온 네놈의 어리석음을 탓해라.”

덩치 큰 플레이어는 그 몸집만큼이나 우람한 팔을 뻗어 내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것이 내 목에 닿는 일은 없었다.

녀석의 손목은 내 손에 사뿐히 잡혀 있었으니까.

“큭?! 크윽?! 뭐야, 전혀 안 움직여!”

덩치는 내게 잡힌 손을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기본적인 능력치가 상대도 되지 않을뿐더러, 혈천수라공까지 익힌 나는 근접전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이런 나와 정면에서 맞붙을 수 있는 플레이어는 이제 지수 정도가 아니면 무리다.

“너희는 왜 조로아스터교를 노리는 거지?”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지금 너네 조로아스터교에서 보호하고 있는 씨앗을 가져가려는 거잖아.”

내 말에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눈빛이 변했다.

아무래도 이 열차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악마와 관련된 이들인 모양이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으아아악!!”

콰쾅!!

나는 잡은 팔을 잡고 기차의 벽으로 가볍게 던졌다.

그러자 덩치의 몸이 기차의 벽을 찢으며 밖으로 날아갔다.

보통의 기차였다면 이런 충격으로 이상이 발생했을지도 모르지만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탓에 기차에는 큰 영향은 없었다.

도리어 부서진 외벽이 서서히 수리되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리, 릭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동료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녀석들은 나를 보았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괴물을 보는 눈이었다.

“이런 엿 같은! 당장 저놈을 죽여!!”

열차 칸 안에 있는 적의 수는 대략 스물.

그리 많지 않은 숫자다.

아마 칸에 타고 있는 평범한 일반인이나 플레이어들은 이미 이놈들이 모두 죽였을 것이다.

고로 굳이 살려둘 가치가 없었다.

“후.”

오른쪽 눈이 붉게 타오른다.

지수로부터 공유된 천살성의 살기가 서서히 피어오르며 열차칸을 가득 채웠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놈들의 몸이 단번에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 이건.”

어차피 이놈들은 잡졸에 불과하니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적었다.

오히려 조로아스터교를 구하는 편이 이득.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딛으며 주먹을 뻗었다.

퍼걱!!

달려들던 플레이어의 머리가 사과처럼 부서졌다.

악마의 하수인이라 제법 튼튼하고 생존력이 강했지만 머리가 부서진 상황에서 살아날 수는 없었다.

“빠, 빨리 제임스 대장님께…… 크아악!!”

스물에 가까운 숫자가 모두 정리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나는 혹시나 몸에 피가 튀었는지 확인한 후,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뭐야, 넌? 안 꺼져?”

어째 하나같이 이놈들은 레퍼토리가 똑같다.

‘저기 있군.’

나는 악마의 하수인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인물들을 확인했다.

자신들이 있는 칸에서 나오지 못하고 긴장 어린 얼굴로 경계하고 있는 이들.

“미안하지만.”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나를 노려보는 놈들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너희들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어서 말이야.”

어두운 칸 안에 조용히 허수공간이 열렸다.

아마 눈치챈 이들은 없으리라.

“얌전히 죽어라.”

푸푸푸푹!!

방금 전처럼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열차칸 내에 열린 무수한 허수공간에서 길쭉한 창들이 튀어나오며 열차 안을 가득 채우던 악마의 하수인들을 꿰뚫었다.

정확히 머리만.

수십에 이르는 플레이어가 단숨에 시체로 변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악마와 관련된 녀석들이니 차라리 여기서 죽여두는 게 낫다.

살려뒀다가는 훨씬 많은 플레이어들이 죽게 될 테니까.

“…….”

조로아스터교의 인물들은 눈에 경악이 서렸다.

눈에 띄게 반응하는 자는 없었지만 어디로 봐도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당신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군요.”

나이가 지긋한 사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이곳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인물 중 가장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대충 이놈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플레이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확실히 악마 특유의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외알 안경을 낀 노인은 나를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저희를 도왔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역시 눈치가 빠르다.

나는 여기서 한발 물러설까 했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직설적으로 말했다.

“지금 이 기차에 있다는 ‘씨앗’ 때문입니다.”

“……호오.”

“그분은 지금 당신들과 거래중인 악마에게 씨앗이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시거든요.”

아자젤은 사실 씨앗에 대해선 잘 모른다.

원래는 전혀 몰랐다가 미국에 와서 악마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던 중 알게 된 것에 불과했다.

“그분은 신입니까, 아니면 악마입니까.”

“악마입니다. 7대 악마 중 하나죠. 하지만 당신들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씨앗을 빼앗으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

그는 내 뒤에 있는 인물이 악마라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조로아스터교는 다른 신을 취급하지 않기에 신이나 악마나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신과 악마가 가지는 대중적인 이미지는 알고 있었다.

“만약 신이라고 말했으면 더욱 의심스러웠을 겁니다. 악마와 대립하는 선한 이미지를 내세워 저희를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겠죠.”

그러리라 생각했다.

“씨앗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당신이라면 언제든 저희에게서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을 터. 이리 오십시오.”

노인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 주변의 신자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지금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들을 보면 당연한 일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지.

“씨앗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쌓아둔 짐을 치웠다.

짐의 아래에는 커다란 관이 있었다.

평범한 관은 아니다. 사슬로 구속되고, 기이한 장치들이 관에 장착되어 있었다.

“「은둔자여,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라.」”

노인의 중얼거림과 함께 천천히 관이 열렸다.

대충 관만 보여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노인은 친절하게도 관까지 열어 내게 보여줬다.

“이것이 씨앗입니다.”

“허.”

열린 관 안에 있는 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씨앗은 분명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인간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면 인간이라면 인간이긴 한데.’

관 안에 들어있는 건, 바로 인간의 유해였다.

***

“유해라, 그거 흥미롭네. 그것이 씨앗의 정체였나.”

아자젤은 내게 보고받은 이야기를 들으며 싱긋 웃었다.

그녀는 기차 여행이 즐거운지 창밖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밝은 이후에도 기차는 큰 소란 없이 평탄하게 기찻길을 달리고 있었다.

“왜 관에 시체 같은 걸 넣고 다닌 걸까요?”

그렇게 말한 지수는 자신의 말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보니 관에 시체가 들어 있는 건 당연하네요.”

“그건 그렇지.”

새벽의 전투 때문인지 지수는 조금 졸린 눈치였다.

하기야 그렇게 날뛰었으니 당연한가.

‘무슨 정육점인줄 알았어.’

지수가 지나온 열차 칸은 하나같이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악한 존재에게는 자비가 없는 지수이니 말 그대로 사람의 신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대체 열차에서 어떻게 싸우면 그렇게 되는 건데.’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찌 보면 천살성에 걸맞은 행동이었다.

“근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유해를 탈취하실 건가요?”

“내버려 둘 거야.”

“어머나, 의외네. 너라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유해를 빼앗지 않을까 싶었는데.”

물론 그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놈들이 노리는 게 유해이니, 미끼로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죠. 또한…….”

“또한?”

“유해를 제대로 부활시킬 생각입니다.”

“인류의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데?”

“원래 강한 무기는 다루는 법에 따라 달라지는 법입니다.”

꽤 고생을 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 유해는 단순히 묻어버리기엔 아까운 물건이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가 거래하지 않고 다시 숨어버리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모른 척 그들에게 유해를 가져가라고 했거든요.”

“왜?”

아자젤은 내 판단을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차피 그거 내버려두면 터지니까요.”

“터진다……? 아하, 과연. 이해했어.”

아자젤은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한 모양인지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다.

반면 지수는 여전히 아리송한 눈치다.

“터진다는 게 무슨 뜻이죠?”

“내버려두면 재해로 변할 시체지. 조로아스터교의 오랜 유물이 드디어 부활할 때가 된 거다.”

시체지만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저, 잠에 빠진 것뿐이다.

인간의 악의, 혹은 선의로 변할지도 못하는 존재.

신화시대에 만들어진 조로아스터교의 유물.

“아후라 마즈다의 파편을 심어 만들어진 인공 신. 그 실험의 결과물이다.”

“그럼 왜 악마를 만나려고 하는 거죠? 내버려두면 알아서 부활할 텐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부활시키려는 게 아니야.”

“그럼 부활을 막으려고?”

“아니, 자기들이 그것을 다룰 방법을 찾고자 하는 거지. 어차피 봉인은 할 수 없거든. 그거 터지고 내버려두면 7대 악마의 계약자가 아니라 본체가 와야 해.”

“너무 위험하잖아요.”

“아마 뭔가 생각이 있을 테지.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비술도 조로아스터교에 남아 있을 테니까. 단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누락된 부분이 있을 테고. 만약의 사태를 위해 악마의 도움을 받으려는 걸 거야.”

엄연히 상격의 신위를 가진 존재다.

나는 시체에서 그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이미 지금 부풀어 오른 신격만 해도 나와 동등했다.

실제로 1회차에서 조로아스터교는 자신들의 비술만으로 그것을 조종하려다 실패했다.

유해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적어도 조로아스터교는 물론, 미국의 5분의 1이 아작났다.

나도 그 사태를 막기 위해 미국에 왔었으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대체 놈들은 뭘 만든 건지.’

인간이란 언제나 그렇다.

현재나 과거나, 결국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럼 아자젤……님이 그 역할 맡으면 그만이잖아요.”

“난 못해. 그런 거 할 수 있는 녀석은 탐욕의 악마뿐이야. 걔라면 저것을 다룰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고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저 시체를 넘겨 악마의 계약자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봐야만 했다.

“아무튼 흥미로워. 과연 이제 어떻게 되려나?”

아자젤은 강자에 관심이 많다.

아무래도 유해에 더욱 관심이 간 모양이다.

‘다만 아직 헷갈리는 건 악마들의 목적.’

유해를 이용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들도 아자젤처럼 호기심에 유해를 부활시키고 싶어 하는 건가?

‘아무래도, 모르간을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하나다.

유해의 육체를 빼앗는 것이었다.

***

“설마 기차를 습격한 게 실패할 줄은 몰랐는걸. 지금 연락되는 애 없지?”

“예, 아무래도 다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럼 까마귀나 아자젤이 그곳에 있다고 봐도 되겠군.”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죄다 죽었을 리 없다.

탐욕의 악마의 계약자, 마틴은 마른 입술을 천천히 혀로 핥았다.

“이거 난감하네. 우리 악마님께서 화내시겠어.”

악마는 아자젤처럼 언제든 현계할 수 있었다.

비록 그 힘을 제한 받는 탓에 쉽게 다른 게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현계하는 아자젤이나 이드라가 특이한 것이다.

권능의 제한을 받고, 육체적 능력이 한없이 떨어져도 강력한 그녀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크리스 브라이트는 어떻게 할까요? 이야기를 전해서 습격시킬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군.”

크리스가 어떻게 되든 마틴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녀석을 까마귀의 손에 죽게 만들면 색욕의 악마가 뭔가 반응을 보일 수도 있으니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직접 죽이기엔 양쪽 다 여러모로 성가신 존재니까.

“그나저나 멍청한 조로아스터교 놈들이 우리가 한 걸 모르는 모양입니다.”

“설령 안다고 해도 방법이 있나?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인데 말이야.”

다만 유해는 하나이기에 누구의 그릇으로 사용할지가 쟁점이다.

두 악마가 현재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곧 결정되겠지.

“7대 악마와 함께라면 세계를 지배하는 건 우리다.”

최상위 신격을 지닌 7대 악마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드라라는 신이 탈취했다는 이 게임을 자신들이 빼앗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것은, 이 별의 지배자이자 신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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